蘭(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 신석정 「작은 짐승」 1 · 2연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 안도현 「저물 무렵」 1 · 2연
안도현(1961~)의 시 「저물 무렵」이 신석정(1907~1974)의 「작은 짐승」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씌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어딘지 닮은 면모가 적지 않다.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영향이 아니라면 간접적이고 무의식적인 영향과 모방의 관계가 둘 사이에는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두 작품은 나란히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다. 「작은 짐승」에서의 ‘난이와 나’, 그리고 「저물 무렵」의 ‘그 애와 나’가 그들이다. 두 작품 모두에서 등장인물 두 사람은 어딘가에 앉아서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작은 짐승」에서는 산에서 바다를, 「저물 무렵」에서는 강둑에서 강물과 만나는 서녘 하늘을 두 사람은 각각 바라보는 것이다(「저물 무렵」에서도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라는 구절이 알려주듯,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는 두 사람의 상상의 시야 속에 들어와 있다). 두 쌍은 각각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에만 열중할 뿐 “말없이”(「작은 짐승」) 앉아 있거나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저물 무렵」) 있다는 공통점 역시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말도 없이 어딘가를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는 점 역시 비슷하다. 그렇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뜻한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을 상기해 보자.
「작은 짐승」은 전체가 4연으로 기승전결 구조를 보이는 데 비해, 「저물 무렵」은 모두 9개 연으로 되어 있다. 후자가 좀 더 다변인 셈인데, 「작은 짐승」이 ‘난이와 나’가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행위에 머무르는 반면 「저물 무렵」에서는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는 행위가 다음 단계로 좀 더 나아가는 면모를 보인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작은 짐승」 3연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몇 살 열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 「저물 무렵」 8연
「작은 짐승」에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구름과 느티나무 잎새 같은 것들일 뿐 ‘난이와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것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따름이다. 반면 「저물 무렵」에서는 “열몇 살” 두 아이가 입술을 포개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작은 짐승」이 정적이고 관조적이라면 「저물 무렵」은 동적이고 서사적이라 할 수 있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작은 짐승」 4연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 「저물 무렵」 9연
두 시의 마지막 연은 주인공 두 쌍이 각각 “느티나무 아래”와 “강둑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앉아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두 쌍은 각각 “작은 짐승”과 “어린 노을”에 견주어진다(두 시 사이의 상동관계가 좀 더 철저해지기 위해서라면, 안도현의 시는 「저물 무렵」이 아니라 「어린 노을」이 되었어야 했겠다).
앞서 말했듯이, 두 시 사이의 영향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두 작품을 한데 묶어서 거론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실은 안도현의 산문 한 편을 읽은 일이 계기가 되었다. 그 글의 제목은 「이름이 란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로, 이 제목을 표제로 삼은 합동 산문집에 실려 있었다(공동 저자는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하응백).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여자애가 있었다. 나와 그 애와의 연애는 스물두어 살 무렵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산문에서 안도현은 이름 끝 글자가 ‘蘭’인 여자애에게 신석정의 「작은 짐승」을 읽어 준다. 상대방은 그 시를, 자신을 위해 쓴 안도현의 작품으로 오해한다(그리고 안도현 자신은 그 오해를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텍스트 너머의 이야기이지만, 그 연애는 결혼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안도현이 스물두어 살 무렵에 만나 연애했고 결국 그의 부인이 된 이의 이름 끝 글자가 바로 ‘란’이다. 「저물 무렵」에 등장했던 ‘그 애’라는 지칭이 이 산문에서 다시 등장하지만, 두 ‘그 애’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후배 시인의 연애에 ‘동원’된 작품이니 만치 「작은 짐승」의 두 주인공 ‘난이와 나’를 연인 사이로 헤아릴 법도 하지만, 신석정의 전기적 배경을 살펴보면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안도현이 이 시에 관해 쓴 또 다른 글에 따르면 ‘난이’는 신석정의 네 딸 중 둘째의 이름이라고 한다. 「작은 짐승」은 1939년 『문장』에 발표되었는데, 시인의 딸 ‘난이’가 1935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시에 등장하는 ‘蘭이’는 너댓 살 정도 된 어린 소녀라는 것이 후배 시인의 추론이다. 게다가 일제 말의 암흑기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고려해 보면 이 작품을 단순한 연애시로만은 읽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작은 짐승」의 ‘난이와 나’를 반드시 시인 자신과 그의 둘째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전기적 배경을 무시하고, 처음 짐작했던 것처럼 오붓한 연애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작품을 더 잘 읽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살아 있더라도, 그처럼 변형되고 확장된 독법을 더욱 반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
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