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느해던가 적적하여 못견디어서
나그네 되어 호을로 산골을 헤매다가
스스로워 꺾어모은 한옹큼의 꽃다발―
그 꽃다발을 나는
어느 이름 모를 길 가의 아이에게 주었느니.
그 이름 모를 길 가의 아이는
지금쯤은 얼마나 커서
제 적적해 따모은 꽃다발을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 주고 있는가?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 「나그네의 꽃다발」의 첫 두 연이다. 미당의 시 중에서 그다지 탁발한 작품이라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심오한 사상이나 절절한 감정을 담은 것도 아니고 미당 특유의 능란한 언어 구사가 돋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누구나 품어 봄 직한 호젓하고 소박한 상상력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화자가 심심풀이 삼아 꺾어 모은 꽃다발을 이름 모를 아이에게 전해 주었고, 다시 그 아이가 장성해서 역시 꽃다발을 꺾어서는 또 다른 아이에게 전해 줄 것이며, 그런 행위가 거듭되다 보면 “그리하여/ 천년이나 오백년이 지낸 어느 날에도/ 비 오다가 개이는 산 변두리나/ 막막한 벌판의 해 어스럼을/ 새 나그네의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이 쥐이고/ 그걸 받을 아이는 오고 있을 것인가?”(「나그네의 꽃다발」 마지막 연)라는 기대가 이 시의 결론이다.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두고 낯선 손에서 손으로 꽃다발이 전해지리라는 것은 엄밀한 역사적 경험이나 과학적 근거와는 무관한, 다만 낭만적이고 무책임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유의 상상은 막연하고 아득한 만큼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보편적 상징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는 느낌이다. 마치 편운 조병화(1921~2003)의 「의자」 연작 중 잘 알려진 일곱 번째 작품처럼 말이다: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구효서(1957~)가 「나그네의 꽃다발」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쓴 것도 미당의 시가 지니는 원초적이고도 보편적인 차원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효서의 소설에서 화자 ‘나’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황 구장네 둘째아들의 무덤을 발견하고 회상에 잠긴다. 무덤의 주인 ‘명식’은 ‘나’가 초등학생이던 24년 전 교장 사택의 사이프러스나무에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달아서 죽은 인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다녀오느라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던데다 시골 아이의 눈에 “아무리 보아도 비현실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던 희디흰 셔츠”를 입고 “갈꽃 핀 산허리를 하릴없이 헤매이던 모양” 때문에 ‘나그네’로 기억되어 있다. 화자의 회상 속에서 명식은 자살하기 몇 시간 전 아직 어린 나 ‘정환’에게 자신이 군대 시절에 목격한 어느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사들을 가상 적지에 떨궈 놓고 알아서 탈출하도록 하는 훈련 기간 중 산속 버려진 움막에서 만난 사십대 사내는 “어려운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죽을 생각으로 약을 먹었지만 죽지는 못하고 식도만 눌어붙는 바람에 고무 호스를 통해 음식물을 섭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명식은 그 사내가 헤어질 때 움막 주변에 피어 있던 꽃들을 한 무더기 꺾어 자기에게 주었으며, 1년 뒤 제대하고서 찾아가 보았을 때는 이미 죽은 뒤더라는 이야기까지 마저 들려주며 ‘나’에게 자신이 꺾어 만든 꽃다발을 쥐여준다. 이런 말을 곁들이면서.
“정환아! 어려운 사랑이 왜 어렵냐면 말이지. 결국 이렇게 되니까야. 그런 사랑이란, 사랑이냐 아니면 세상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막다른 곳으로 사람을 마구 몰아넣거든.”
초등학생 정환에게 어려운 사랑에 관한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준 명식은 그날 저녁 자살을 감행했고,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죽음이 정환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유부녀 교사와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돈다.
명식이 아직 어린 정환을 상대로 사랑과 죽음에 관한 심각한 이야기를 토로한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속내를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다는 심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식이 고해성사를 하듯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그는 정환에게 자신이 꺾은 꽃다발을 건네주었던 것인데, 정환이 회고하기에 “받아든 꽃다발이 내 조막손엔 버거웠다.”
명식의 꽃다발을 받는 순간 어린 정환이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았다고 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나 그 꽃다발인즉 일종의 ‘운명에의 초대’가 아니었겠는가. 무슨 말이냐고? 자, 여기 두 개의 꽃다발이 있다. 군대 시절 명식이 움막의 사내한테서 받았던 꽃다발, 그리고 명식이 어린 정환에게 건넨 꽃다발이 그것이다. 명식에게 꽃다발을 건넨 사내는 일찍이 죽었고, 명식 역시 꽃다발을 건넨 그날 저녁 자살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똑같이 ‘어려운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죽은 두 사람이 주고 받았으며 그 중 한 사람이 정환에게 건넨 꽃다발의 의미란 분명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종내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사랑’이라는 운명에로의 초대 말이다. 움막의 사내가 명식에게 꽃다발을 건넨 행위란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어려운 사랑’의 운명을 나눠 준 것이며, 그 운명을 받아 들었던 명식이 이번에는 어린 정환에게 꽃다발을 줌으로써 자신들의 운명과 죽음을 나누어 주었던 것.
꽃다발의 형태를 한 운명을 선사하고 선사 받기 위해서는 그것을 건네는 쪽뿐만 아니라 받는 쪽의 처지와 자세 역시 중요하다. 꽃다발을 내밀고 받아 드는 심상한 행위가 감히 운명의 이름을 감당하는 무거운 의식이 되기 위해서는 상황과 조건이 두루 충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명식한테서 꽃다발을 건네 받은 ‘나’ 정환의 처지는 어떠했던가.
“그때 그(=명식)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순간 이미 어린 내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을까. 흐음, 하고 나는 신음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래, 건실한 가장이었지.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작금의 이런 상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지 않은가. 이 땅에 문득 태어나, 때늦게 누군가를 지독히도 사랑하다, 못 견디어 내내 죽음만을 생각하는 모진 덫에 빠져들다니.”
소설 속에서 정황이 세세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 누군가를 지독히도 사랑한 끝에 죽음만을 생각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소설 앞부분에서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이 마누라에 관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때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는 구절까지 참조해서 이해해 본다면, 유부남인 그는 때늦은 사랑 때문에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앞의 두 ‘선배’들의 전례를 좇아 결국 죽음을 택하게 될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명식한테서 꽃다발을 건네 받은 그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역시 꽃다발을 건네 준다는 사실이다.
명식의 무덤을 찾아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지금 처지를 곱씹어 보던 그는 무덤 주변 산자락을 헤젓고 다니며 왕바랭이니 금강아지풀이니 억새꽃 등속을 한 움큼 꺾어 든다. 스스로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행위였는데, 자신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명식의 무덤 앞에 피어 있던 각시취 몇 송이를 마저 꺾어 보태서는 그 꽃다발을 어느 화강암 바위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을 지나던 중학생 또래의 소년들 중 하나가 ‘나’가 놓은 꽃다발을 집어들고 활짝 웃는다…
‘나’와 소년 사이의 꽃다발의 건넴이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운명이란 의식(意識)과 의식(儀式) 너머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만든 꽃다발을 집어드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가 생각하듯이 “명식이 청년이 보았다던 그 고무 호스의 사내도 유년의 한때에 저렇게 무심히 어느 바위 위에 놓여 있던 꽃다발을 집어들었던 것은 아닐까.” 사내가 집어들었던 그 꽃다발이 명식과 ‘나’를 거쳐 다시 이름 모를 중학생 소년에게로 건네졌고, 그것은 사내 이전이나 지금 ‘나’의 눈앞에 있는 소년 이후에나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 갈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꽃다발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사랑과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에 꽃다발이 있었다. 그것은 꺾은 것이 아니고, 저 먼먼 태초의 심연으로부터 나그네에서 나그네로 전달되어온 전령이 아니었을까. 세월이 지나도 본래의 의미라곤 풀끝만큼도 퇴색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절실하고 선연해지기만 할 뿐인 그것. 땅 위에 왔다가 그렇게 훌쩍 가버리는 비운의 나그네들에 의해 목숨과 맞바꾸어지는 것.”
구효서 소설에서 꽃다발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전령’임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꽃이란 질 때 지더라도 쉬지 않고 또 피는 것이며, 죽을 때 죽더라도 다른 산 어느 구렁에선가는 똑같은 꽃들이 또 무심하게 쑥쑥 자라 마침내 흐드러지고 마는 것”이라는 구절이 정말로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마침내 ‘어려운 사랑’에 빠져들고 그 사랑의 대가로 목숨을 바친다는 것. 그러니, 도킨스의 표현을 빌려 오자면, 사람이란 다만 사랑이라는 ‘유전자’를 나르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 차라리, 인간은 유한하되 사랑만은 불멸이라는 뜻이 아닐까.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나그네다. 그들은 왔다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그네/사람이 왔다 간 자리에 사랑만은 주인으로서 유구하다.
미당의 「나그네의 꽃다발」은 편운의 「의자」와 비슷하게 인간의 경험과 문화의 대를 이은 전승을 노래했다. 그 제목을 따 온 구효서의 소설에서 사람들이 꽃다발을 매개로 주고받는 것은 ‘사랑과 죽음의 운명’이라는 범주로 구체화했다. 아무려나 선배 시인의 시 「나그네의 꽃다발」은 후배 작가의 소설 「나그네의 꽃다발」로 재탄생했다. 그렇다면 구효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처럼, 문학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 역시 누군가한테서 꽃다발을 전해 받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 주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 일들이 모이고 쌓여 문학사가 이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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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