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1737~1805)의 소설 「허생전」은 그의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에 「호질」과 함께 실려 있는 작품이다. 연암은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삼종형(=팔촌형) 박명원의 수행원 자격으로 북경을 거쳐 청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는 열하까지 다녀와서 이 책을 썼다. 「허생전」은 이 가운데 ‘옥갑야화’ 부분에 실려 있는데, 연암 일행이 옥갑의 여관방에서 심심풀이 삼아 돌아가며 역관들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이다. 남산 아래 묵적골에서 글만 읽던 선비 허생이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가서는, 변 부자한테 빌린 돈으로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해서 큰 돈을 벌고, 도둑 수천 명을 교화해서 빈 섬에다 부려 놓은 뒤, 어영대장 이완을 상대로 북벌론의 허구성을 역설하다가 문득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는 것이 「허생전」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특히 이완이 주창하는 북벌론을 논박하는 뒷부분에서 당시 조선 사회의 위선과 병폐에 대한 연암 특유의 신랄한 비판의식을 접할 수 있다.
『열하일기』의 자유분방하고 도발적인 문체는 연암 당대의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과거 시험에서까지 연암의 문체를 흉내낸 답안이 나올 지경이 되자 기성 문단은 불안과 불만에 휩싸였고 정조는 문체반정책을 통해 연암의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며 비판했다. 『열하일기』가 조선 왕조가 끝나도록 정식으로 출판되지 못한 것은 이 책이 지닌 불온한 파괴력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고전이란 세대를 이어 가며 거듭해서 읽히고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는 법이다. 「허생전」 역시 꾸준히 읽히며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이미 이광수(1892~1950)의 장편 『허생전』(1924)과 채만식(1902~1950)의 중편 「허생전」(1946)이 나왔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젊은 작가 김종광(1971~)이 장편 『율려 낙원국』(2007)으로 허생 이야기를 재해석한 바 있다. 연암의 「허생전」을 다시 쓴 여러 작품 가운데 이 자리에서는 이남희(1958~)의 단편 「허생의 처」(1987)와 최시한(1952~)의 단편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1992)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연작소설집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에 들어 있다. 고등학생 ‘나’(선재)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연암의 「허생전」을 배우는 국어 수업 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수업을 진행하는 ‘왜냐 선생님’은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의력, 그리고 비판정신을 중요시하는 인물이다.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왜냐?’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체적인 사고력을 요구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그의 사람됨을 말해준다. “이건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극장이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도 왜냐 선생님에 대해서만은 호감을 지니고 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해서 문예반에도 들어 있는 ‘나’에게 왜냐 선생님 역시 관심과 기대를 표한다. 왜냐 선생님의 수업은 「허생전」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발표하기와 허생이 누구인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왜냐 선생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한 것을 발표하고 서로 다른 견해를 놓고 활발히 토론을 벌이도록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허생전」이 단순히 옛사람이 쓴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도 유의미한 텍스트가 되도록 신경을 쓴다.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자율적인 발표와 토론을 중시하던 그가 허생과 그 지은이 연암에 대해 ‘평가’한 다음 대목은 그의 세계관을 짐작하게 한다.
“(허생은) 무슨 일을 하든 정신적으로는 한 번도 선비의 자리, 양반 사대부라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그 말입니다. (…) 이 점이 바로 허생의 한계요 「허생전」을 지은 연암 박지원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비와 양반 사대부라는 기득권을 결코 놓지 않았던 허생과 연암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왜냐 선생님이 ‘교육 노동자’로서 전교조에 가입해야 했던 이념적 근거를 말해준다. 「허생전」의 줄거리 요약과 허생의 사람됨에 대한 토론으로 진행된 두 번의 수업에 이어 왜냐 선생님은 「허생전」과 연암 당시의 사회 상황 및 실학 사상의 관계 등에 대한 토론을 세 번째 수업으로 예고했지만, “왜냐 선생님의 「허생전」 셋째 시간은 없다!” 왜냐? 선생님이 전교조 가입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당시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전교조 대량 해직 사태로 초점을 옮겨 가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 왜냐 선생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동철과 말더듬이지만 생각이 올곧은 윤수 사이에 멱살잡이가 벌어지고, 세 번째 「허생전」 수업이 예정된 월요일 아침에 왜냐 선생님의 출근이 저지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윤수는 홀로 땡볕이 쏟아지는 운동장에 나가 앉아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그때까지 사태를 관망만 하던 ‘나’도 윤수가 있는 운동장으로 달려 나간다…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이른바 ‘전교조 세대’의 탄생 설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회의식이 발달해 가던 나이에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부당하게 교단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아이들은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된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에 이어지는 단편 「반성문을 쓰는 시간」에서 당국의 감시를 받는 반체제 인사의 집에서 일종의 ‘축제’를 벌인 일 때문에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 ‘나’, 그리고 이 작품들이 포함된 연작소설집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결말에서 스파르타식 학원을 뛰쳐나가 ‘두레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찾아 떠나는 윤수의 행보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들의 앞에 4?19 세대와 5?18 세대가 있었다면 그들의 뒤를 잇는 것이 ‘촛불 세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홍길동은, 일종의, 투사입니다. 홍길동은 자기 부하들이나 자기가 돕는 이들과 하나가 되어 싸우고, 끝에 가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허생은, 돕기만 할 뿐 어디까지나 선비이고, 그래서 결국 지고… 지고 맙니다.”
이것은 앞서 인용한 왜냐 선생님의 「허생전」에 대한 평가 발언을 끌어낸 ‘나’의 말이다. 허생이 누구에게 졌다는 것인지, 그가 과연 지기는 진 것인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허생전」에 대한 주체적이며 참신한 해석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전교조 세대’다운.
그리고, ‘나’와 윤수에 비해서는 가려졌지만, 학생들이 허생의 사람됨을 놓고 중구난방 의견을 발표하던 중에 나온 어떤 학생의 이런 평가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아내를 전혀 돌보지 않는 걸 보면, 좀 매정한 데가 있습니다.”
「허생전」에서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고결한 선비 허생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장사를 하게 만든 ‘범인’으로까지 지목되는 아내의 처지에 공감한, 그 역시 참신한 독법이라 하겠다. 이 학생의 관점은 『열하일기』에서 「허생전」의 뒷이야기로 배치된 「‘허생’ 뒤에 붙여 쓰다 2」에 등장하는 윤영이라는 노인의 말과 통한다.
“허생의 아내 말이야. 참 가엾더군. 결국 다시 굶주릴 거야.”
이남희의 단편 「허생의 처」는 바로 이렇듯 남편 허생이 돌보지 않아서 비참한 처지에 놓인 허생 처의 처지에서 ‘다시 쓴 「허생전」’이라 할 만하다. 허생 처를 화자 ‘나’로 삼아 씌어진 이 소설에서 아내의 눈에 비친 허생은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허생의 아내가 배 다른 여동생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자.
“느이 형부 할 줄 아는 거라곤 배고픈 거 참고 위세 떠는 거하고 글 읽는 거뿐인데…”
집안에 양식이 떨어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애오라지 글만 읽으며 생계는 아내의 삯바느질 수입이 아니면 처가의 도움에나 의지하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는 5년 동안 소식 한 자 없다가 문득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갔던 꼴 그대로 돌아오는데, 소문을 듣자 하니 그 사이에 무슨 수단인가로 억만금을 벌었다고 하는데도 집안에는 땡전 한 푼 들이지 않는 무정한 남편.
“그때 나는 똑똑히 알았다. 남편은 언제까지나 저렇게 책을 끼고 신선놀음을 할 터이고, 나는 언제까지나 굶주려야 할 것이라는 걸. 자식마저 없으니 난 죽어서도 제삿밥도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하고 굶주릴 것이다.”
남편 허생이 책 속에서 거창한 이치와 도리를 탐구하는 데 비해, 허생의 처에게는 가시버시가 짝을 이루어 자식 낳고 그 뒷바라지를 해서는 말년(과 사후)에 효도와 공경을 받는 평범한 삶이 소중하다. 허생이 책과 이념의 인간이라면 허생의 처는 육체와 일상의 인간이다. 허생 처의 생각에는 책을 읽는 일 역시 “사람이 살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려는 때문”이지 달리 이유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것을 세속이라 해도 좋고 속물이라 해도 좋지만, 그것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거나 돌팔매질을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후세의 생산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허생에게 그 처가 ‘차라리 팔자를 고치겠노라’고 하자 허생은 인륜과 예의와 염치를 들먹이며 꾸짖는다. 마침내 허생의 처가 폭발한다.
“인륜? 예의? 염치? 그게 무엇이지요? 하루종일 무릎이 시리도록 웅크리고 앉아 삯바느질을 하는 게 인륜입니까? 남편이 무슨 짓을 하든 서속이라도 꾸어다가 조석을 봉양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술친구 대접까지 해야 그게 예의라는 말입니까?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게 염치를 아는 겁니까? 아무리 굶주려도 끽소리도 못하고 눈이 짓무르도록 바느질을 하고 그러다 아무 쓸모 없는 노파가 되어 죽는 게 바로 인륜이라는 거지요?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 않겠습니다. (…)”
허생에 대한 허생 처의 분노는 「허생전」의 지은이 연암을 향한 후배 여성 작가 이남희의 비판을 대리하는 셈이다. 소설 「허생의 처」는 허생 처의 분노의 대폭발로 마감되거니와, 허생 처의 입을 빌린 연암에 대한 비판은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전 뭔가요? 앞으로도 뒤로도 어둠뿐이에요.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유유자적 더러운 세상을 경멸하며 가슴에 품은 경륜을 뽐낼 뿐이지요. 당신은 친구들과 담화할 때 학문이란 쓰임이 있어야 하고 실이 없으면 안 되고, 만물은 서로 이롭도록 운용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당신은 세상에 있는 소이(所以)가 없고 당신을 따르는 한 나 역시 그러해요. (…)”
허생으로 대리되는 연암에 대한 이남희의 비판을 최시한의 비판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로워 보인다. 최시한의 경우도 그렇지만, 허생과 연암에 대한 이남희의 비판 역시 반드시 온당하다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허생 처의 일장 연설에서 짐작되듯이 「허생의 처」는 페미니즘의 강력한 영향 아래 씌어진 작품이다. 페미니즘이 절대 진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무맹랑한 요설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쨌든 「허생의 처」가 「허생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을 문학사에 보탠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전이란 이렇듯 자신을 희생(?)해서 문학사의 살을 찌우고 뼈를 단단하게 하는 구실 역시 맡는 법이다. (*)
--------------------
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