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유하 「오징어」 전문
이신조(1974~)가 1998년 『현대문학』 신인공모 당선작인 단편소설 「오징어」를 쓰면서 유하(1963~)의 시 「오징어」를 염두에 두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예창작과 출신 작가 지망생으로서 그가 유하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 1991)를 읽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지금은 영화 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유하는 기형도(1960~1989)의 요절 이후 한국 시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스타’였고 『바람부는 날이면…』은 그의 대표 시집으로 꼽힌다. 「오징어」는 이 시집 맨 앞에 ‘서시’처럼 놓여 있는 작품이다.
빛을 보고 몰려드는 오징어의 생리에 빗대어,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화려하고 유혹적인 소비문화에 대한 경고를 발한 작품이 「오징어」다. 유하의 시집에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연작 열 편을 포함해 ‘도시시’로 분류할 만한 작품들과 ‘하나대’라는 지명으로 상징되는 전통 농촌 문화의 몰락을 그린 작품들이 절반 정도씩 들어 있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유하에게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라는 유명한 타이틀을 붙여 준 바 있거니와, 그의 압구정 시편을 비롯한 도시시들은 화려하고 감각적인 도시의 삶에 대한 매혹과 반성을 아울러 보여준다. 김현이 유하를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라 이른 것은 그의 첫 시집 『무림일기』(세계사, 1989)에 관한 해설성 평론에서였는데, 이 책에 비해 그의 두 번째 시집인 『바람부는 날이면…』은 중독과 매혹보다는 반성과 비판 쪽으로 좀 더 쏠려 있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들을 보라.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 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쎅시하게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부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사과맛 버찌맛
온갖 야리꾸리한 맛, 무쓰 스프레이 웰라폼 향기 흩날리는 거리
웬디스의 소녀들, 부띠끄의 여인들, 까페 상류사회의 문을 나서는
구찌 핸드백을 든 다찌들 오예, 바람불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저 흐벅진 허벅지들이여 시들지 않는 번뇌의 꽃들이여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6」 부분
이신조의 단편 「오징어」의 주인공이 구치 핸드백을 들고 압구정동을 활보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겸 화자인 스물두 살 젊은 여성 ‘나’는 서울 구시가지의 오래된 놀이공원에서 캉캉춤을 추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압구정동’이 부럽지 않다. 동해안 속초 출신인 이 여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연탄불에 오징어를 구워 팔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일자리를 얻었던 것. 그런 그가 지금은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고향 속초로 향하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스물두 살의 나, 서른두 살의 그”가 연루된 ‘아름다운 통속’이 있다.
놀이공원과 계약을 맺은 이벤트 회사의 야외공연부 팀장인 ‘그’는 놀이공원의 임시 계약직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하던 ‘나’를 공연 팀에 스카우트한 당사자다. “겹겹 주름이 물결처럼 펼쳐진 집시풍의 붉은 원피스”와 “화려한 레이스의 속바지며 머리에 꽂는 크고 붉은 천 장미”, 그리고 “진한 화장”에다 “가로줄무늬 스타킹과 검정 에나멜 구두”는 ‘나’로 하여금 “문득 다른 여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 여자를 마른오징어와 고향 속초로 대표되는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환상이 그것만은 아니어서, 유부남인 ‘그’와의 짜릿한 연애야말로 여자에게 다른 세상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보였다.
“숱이 많고 억세고 구불거리는 그의 음모. 어느 순간 나만을 향해 웃어 보이는 하얀 지우갯밥 같은 웃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종류의 유쾌함과 흥미진진함에, 그것에 애가 타는 나는 나를 멈출 수 없었다.”
“비가 오는 저녁, 좁은 우산 속 같은 그곳(=여관방)에서 나는 더없이 유쾌하고 흥미진진했다. 비 오는 날의 놀이는 놀이공원에 있지 않았다.”
굳이 압구정동에 가지 않더라도 놀이공원의 무대와 비 오는 저녁의 여관방이 여자에게는 곧 압구정동이었다. 춤과 연애라는 두 가지 환상은 오징어를 유혹하는 휘황한 빛처럼 이 어린 여자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러나 환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날 임신한 ‘그’의 본처가 나타나 ‘나’에게 물벼락을 안기면서 여자는 비로소 환상에서 깨어난다. “알아? 네가 잘못한 거야! 어린 년이”라는 본처의 힐난은 그 여자로 하여금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남루한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한다. 그래서 지금 여자는 마른오징어와 남루한 청춘이 있는 고향 속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오징어는 참을 수가 없어요. 마른오징어를 보면… 죽여버리고 싶어요”라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떠나 왔던 그 속초로 말이다.
“이부자리를 펼치는 엄마의 속바지는 지독하게 낡아 있다. 저 숨길 수 없는 삶의 보푸라기들. 분장실 사물함에는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속바지가 들어 있다.”
고향 집에 돌아와 목격하는 엄마의 낡은 속바지, 그리고 놀이공원 분장실에 두고 온 공연용 속바지는 여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현실과 환상을 각각 대리하는 듯하다. 여자는 과연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유하의 시 「오징어」에서였다면 선택은 단순했을 수 있으리라. 휘황찬란한 빛이 사실은 죽음의 함정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빛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여자가 도시의 ‘거짓된’ 환상을 박차고 남루하더라도 진실된 생활을 택했으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신조 소설 「오징어」에서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오징어잡이배의 불을 바라고 헤엄치는 오징어떼를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라.
“저 깊은 바다 속 대낮처럼 불을 밝힌 오징어배를 향해 오징어떼들이 유유히 헤엄쳐가고 있다. 어쩌면 오징어는 자신이 속고 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유혹하는 그 눈부신 빛의 섬찟한 정체를 알면서도 애써 속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속고 있음을 알면서도 짐짓 속아 주는 오징어.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짭짤하고 고소한 죽음의 맛”을 풍기는 불투명한 마른오징어와 “내장과 먹물주머니가 전부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산 오징어 사이의 구분이다. 그동안 주인공 여자가 알았던 오징어는 마른오징어일 뿐이었다. 그래서 죽이고 싶도록까지 오징어를 혐오했던 것. 그러나 어쩌면 스스로가 마른오징어 신세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여자는 이제 ‘다른’ 오징어, 그러니까 투명하고 싱싱하게 살아 있는 오징어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된다. 소설 말미에서 급기야 그는 스스로를 산 오징어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오징어배의 강렬한 집어등이 놀이공원 야외무대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밤의 모래사장에서 캉캉춤을 추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아마도 그는 오징어를 유혹하는 빛의 손길을 운명의 초대쯤으로 간주하게 된 모양이다. 그 결과 ‘죽음의 빛’을 좇아 헤엄치는 오징어의 유영은 나비의 자유로운 날갯짓으로까지 격상된다. 마침내 그는 ‘운명이여, 오라’ 식의 의연한 태도로 상황에 맞서고자 한다.
“투명한 오징어는 뜻밖에도 의연하다. 자신을 유혹하는 그 눈부신 빛의 섬찟한 정체를 알면서도, 희고 적나라한 죽음, 딱딱하고 무심한 검은 죽음을 알면서도. 오징어는 짙푸른 바다 끝으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징어, 바다의 나비. 가볍게 날아오르는 투명한 바다의 나비.”
유하의 오징어가 다만 수동적인 희생자일 뿐인 데 비해 이신조의 오징어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비록 파국이 예정되어 있다 해도 끝까지 가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오징어는 비극의 주인공에 육박하는 면모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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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