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1971~)의 단편소설 「치숙」은 채만식(1902~1950)이 쓴 같은 제목의 단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 할 수 있다. 채만식의 「치숙」은 1938년 <동아일보>를 통해 선보였고, 송경아의 「치숙」은 2002년 겨울호 계간 『문학·판』에 발표되었다. 송경아는 자신의 단편이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주라는 사실을 소설 첫머리에서부터 분명히한다. 두 작품의 도입부를 비교해 보자.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채만식 「치숙」 시작 부분)
“우리 외삼촌 말이지요. 대학원 박사과정 다니는 삼촌. 그게 참, 난 우리 삼촌이 뭘 하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방에다 책은 잔뜩 쌓아놓고 매일 그걸 뒤적이기는 열심히 뒤적이는데… 담배는 뻑뻑 피워대, 술을 마셨다 하면 늦게 들어와, 또 그런 날은 내가 학교 가는 시간 넘도록까지 침대에 누워 뒹굴거려.” (송경아 「치숙」 시작 부분)
소설 제목인 ‘치숙’이란 한글로만 보아서는 요령부득이고, 한자를 표시해 주어야 비로소 뜻이 들어오는 말이다. ‘痴叔’, 그러니까 바보 아저씨라는 뜻이다. 채만식과 송경아의 소설은 모두 조카인 화자가 보기에 바보 같기만 한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채만식의 소설에서는 화자의 오촌 고모부가, 그리고 송경아의 소설에서는 외삼촌이 각각 그 바보에 해당한다.
조카들의 눈에 바보로 비친 두 아저씨들 사이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다. 채만식의 ‘아저씨’는 앞에서 인용한 조카의 말에도 나오다시피 일제 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 신세까지 지고 나온 처지이며, 송경아의 ‘외삼촌’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지금 다니는 사회학과 대학원을 마친 뒤에는 시민 단체에서 일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체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삐딱한 비주류의 삶을 사는 인물들인 것이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두 인물 모두 남들보다 훨씬 공부를 잘했고 또 많이 했음에도 세속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실패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조카들의 눈에 자기 아저씨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한심해 보이는 지점이 바로 그 대목이다.
“자, 십 년 적공, 대학교까지 공부한 것 풀어먹지도 못했지요. 좋은 청춘 어영부영 다 보냈지요. 신분에는 전과자라는 붉은 도장 찍혔지요. 몸에는 몹쓸 병까지 들었지요.”
“만약 우리 증조할아버지네 집안이 그렇게 치패를 안 해서 나도 전문학교나 대학교를 졸업을 했으면 혹시 우리 아저씨 모양이 됐을지도 모를 테니 차라리 공부 많이 않고서 이 길로 들어선 게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상 채만식 「치숙」)
“그래 어렸을 때 공부 잘하면 뭐 해? (…) 1학년 때 자기 동기애가 죽었다고 대학 다니는 내내 운동권만 쫓아다니다가 한세월 다 보내고. (…) 정신적 고뇌래. 그래, 배부른 소리라니까.”
“삼촌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는데 왜 돈을 못 벌어요?” (이상 송경아 「치숙」)
이 영악한 조카들의 생각에 공부의 쓸모란 돈을 벌고 ‘성공’하는 데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공부란 허무하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일 따름이다. 채만식의 화자는 명색 아저씨를 두고 “어디루 대나 그 양반은 죽는 게 두루 좋은 일인데 죽지도 아니”한다고 게정을 낸다. 송경아의 화자는 삼촌을 지금처럼 망친 범인으로 공부를 지목한다.
“공부 열심히 하면… 많이 하면… 삼촌처럼 돈도 못 벌고… 여자 친구한테도 차이고… 공부는 무서워요… 엄마, 나 공부하라 그러지 마… 난 의사 될 거야…” (송경아 「치숙」)
두 소설의 화자가 모두 이른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사실은 이 작품들을 읽는 별도의 독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송경아의 화자가 초등학교 3학년인 어린아이인 데 비해 채만식의 화자는 십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짐작된다(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닌 뒤 일찌감치 사회에 나와 제법 세상 경험을 쌓았으며 막연하나마 결혼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있다는 소설 속 정보에 의거했다). 이 두 조카들이 자신의 오촌 고모부와 외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을 바보 같다고 헐뜯는 것이 소설의 외양이지만, 이들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이상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말은 거꾸로 새겨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치의 오래된 묵계라 할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두 소설에서 진짜 바보는 화자들이 바보로 지목하는 아저씨들이 아니라 그런 화자들 자신이라는 뜻이다.
오마주 관계인 두 소설은 60년 남짓 시차를 두고 발표되었으며, 그런 만큼 기본적인 틀에서의 공통점에 못지않게 구체적인 세목에서의 차이 역시 존재한다. 채만식의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화자인 조카가 당시 일제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내선일체 이념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다이쇼도 한 말이 있고 하니까 나는 내지인 규수한테로 장가를 들래요. (…) 내지 여자가 참 좋지요. 나는 죄선 여자는 거저 주어도 싫어요. 그리고 내지 여자한테 장가만 드는 게 아니라 성명도 내지인 성명으로 갈고 집도 내지인 집에서 살고 옷도 내지 옷을 입고 밥도 내지식으로 먹고 아이들도 내지인 이름을 지어서 내지인 학교에 보내고…” (채만식 「치숙」)
몸과 마음은 물론 혼까지도 철저히 일본 식을 따르겠노라는 조카의 맹랑한 다짐 바탕에는 아저씨가 ‘아편처럼’ 빠져들었다는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란 것이 게을러서 가난한 자들이 부지런해서 잘사는 이들의 재산을 힘으로 빼앗아 가려는 깡패 짓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가 존경하는 ‘다이쇼’한테서 배운 논리다.
“짓이 부랑당 짓일 뿐 아니라, 또 만약에 그러기로 들면 게으른 놈은 점점 더 게으름만 부리고 쫓아다니면서 부자 사람네가 가진 것만 뺏어먹을 테니 이 세상은 통으로 도적놈의 판이 될 게 아니오?” (채만식 「치숙」)
채만식 소설 주인공의 사회주의에 해당하는 것이 송경아 소설 주인공에게는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일 것이다. 여기서 외삼촌은 의사가 되겠다는 어린 조카에게 무의촌이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인술로서의 의술을 펼치는 삶을 제안해 보지만, 조카에게는 그의 말이 외계 언어처럼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올 뿐이다.
송경아의 소설에서 학생운동을 거쳐 시민운동에 투신하려는 주인공의 계획에 대한 좀 더 심각한 태클은 여자친구로부터 온다. 화자인 조카가 우연찮게 엿듣게 된 대화에서 삼촌의 여자친구는 단호하게 말한다.
“난 당신이 좋아. 하지만 평생을 당신한테 희생하는 게 낙이었던 당신 어머니나, 당신 때문에 대학 못 간 당신 누나처럼은 못 살아.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해? 나도 우리 엄마 귀한 자식인데. 당신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왜 그리 당당해? 당신은 내가 좋다면서, 당신이 책임지고 돈 벌 테니 나 하고 싶은 일 다 하라고 말이라도 해 준 적 있어?” (송경아 「치숙」)
가족과 생계에 대한 대책 없이 자신의 고귀한 이상만 붙좇는 외삼촌을 향해 “당신은 마초야”라고 비난하는 여자친구를 철없는 조카와 동궤에 놓고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릇 남자와 여자의 역할 및 포부가 다를 수 없다는 인식에서 송경아의 소설은 채만식 소설에 비해 확실히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외삼촌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두 「치숙」에서 주인공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오해와 갈등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인을 지닌다. 세속적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일신의 안위보다는 공동체 전체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 하는 데에서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할 만큼 허술하고 못나빠졌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채만식의 소설에서부터 송경아의 소설까지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한반도는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가 되었지만, 두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노라고. 송경아가 또 한 편의 「치숙」을 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노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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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