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1941~)의 중편 「낭만파 남편의 편지」와 체코 출신 프랑스 작가 밀란 쿤데라(1929~)의 경장편 『정체성』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모티프에 의존하고 있다: 권태기에 빠진 부부(커플)가 있다;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남편(남자) 쪽에서 깜짝 이벤트를 꾸민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아내(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배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남자한테서 온 편지라 오해한 아내(여자)는 편지를 받은 사실을 남편(남자)에게 숨긴다; 아내(여자)가 편지를 받은 사실을 숨기는 것을 남편(남자)이 수상하게 생각하고, 아내(여자)의 본심을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 유혹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에 아내(여자)가 응하면서 부부(커플)의 관계는 파국으로 빠져든다…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각기 발표된 두 소설이 이처럼 동일한 스토리 라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다. 여느 경우라면 한쪽이 다른 한쪽을 표절했다는 말이 나오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경우 대체로 표절 혐의는 한국 작가쪽을 향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안정효의 중편이 1993년에 발표되었고 쿤데라의 소설 원작이 1998년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먼저 나온 소설이 나중에 나온 걸 표절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쿤데라가 안정효를 표절했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안정효의 소설이 프랑스어나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그 대략적인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쿤데라가 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안정효의 작품을 읽은 한국어 독자한테서 직?간접적으로 얘기를 전해 듣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그 가능성은 역시 희박하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두 작가의 소설과 비슷한 모티프를 지닌 제삼의 이야기가 먼저 존재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지만,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을뿐더러 그 가능성 또한 그리 높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단 하나, 한국과 프랑스의 두 작가가 각기 자신의 뮤즈한테서 동일한 모티프라는 선물을 받은 것이다! 문학적 영감의 세계란 이토록 오묘하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두 작가가 아무런 사전 교감이 없이 사실상 동일한 이야기를 꾸며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학작품들 사이에서, 그리고 작가들 사이에서 거울 관계를 보고자 했던 이 연재의 타당성이 여기에도 있지 않겠는가.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부부의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머리맡 탁자에다 아내가 갖다놓은 조간신문을 집어들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라는 소설 첫 문장에서 강조되는 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라는 부사어구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게 반복되는 것은 남편의 행동만은 아니어서, 아내의 행동 역시 반복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남편과 아내는 그들이 어제 아침 같은 시간에 취했던 동작을 하나하나 그대로, 순서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되풀이했다.” 이런 것을 삶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의 모든 것이 어제의 모든 것을 되풀이하는 행위라면 오늘은 오늘로서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다. “복제된 하루, 복사기로 무수히 찍어낸 하루”란 독자적인 하루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부부의 아침 시간이 (…) 여유가 없고 살벌한 권태의 반복이었고, 반복의 반복이었고, 반복의 반복의 반복이었다고 남편은 생각했다.” “그들 부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아도 그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어떻게 손을 써봐야 되겠다고 남편은 생각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반복적 일상에 지루함과 권태를 느끼기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요즈음 살아간다는 것이 참 심심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아무래도 무엇인가 빠뜨린 듯 허전한 기분을 느꼈다.” 남편의 편지는 이런 배경에서 고안된 것이다.
『정체성』의 두 주인공 장-마르크와 샹탈은 부부는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에 있는 커플이다. 샹탈은 먼젓번 결혼에서 아이 하나를 낳았지만 그 아이가 일찍 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혼했으며 그 뒤 장-마르크를 만나 동거 중이다. 샹탈이 장-마르크보다 네 살 위이고 연상녀의 수입이 남자보다 다섯 배 많으며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여자의 집이라는 사실을 우선 기억해 두자.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샹탈의 이 말이 장-마르크를 자극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어떤 이유에서든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그녀를 당장 도와야만 한다는 절박한 욕구를” 느끼게 만든다. 샹탈의 말을, 장-마르크가 아닌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바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남자애인보다 네 살 연상인 그녀의 처지에서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는 말은 육체의 점진적 소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빨간 경고등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연하의 남자애인을 둔 여자가 자신의 육체의 노화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장-마르크로서는 샹탈이 여전히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필요에서, 샹탈을 도와야겠다는 욕구에서 생각해낸 것이 익명의 편지다.
「낭만파 남편의 편지」의 남편은 “한때 자신도 퍽 낭만적인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연애 시절 이후에는 편지를 써 본 적이 없는 그가 새삼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낭만성을 되찾음과 아울러, 반복과 권태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결혼생활에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뜻에서였다. 그는 우선 “외로운 카네이션 한 송이의 무늬가 박힌 편지지”를 고른다. 카네이션은 그들 부부에게 특별한 상징성을 지니는 꽃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쾌감이 풍족한 밤을 지냈거나 침묵의 미움을 끝내고 발꿈치를 툭툭 차서 화해가 이루어진 다음 날이면 아내가 유리잔에 꽂아 식탁에 올려놓고는 하던 꽃”이 바로 카네이션이었던 것.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모하는 남성으로부터”
편지가 지나치게 단출했다는 것으로 남편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가 발신자를 익명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로서는 일종의 깜짝 쇼의 효과를 노린 선택이었다. “실제로 내용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까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낭만적인 사랑의 편지가 남편으로부터 날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아내는 뜻밖의 선물에 감동하리라고” 남편은 믿었다. 그러나 그의 짐작과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내는 그것이 남편한테서 온 편지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봉투를 열어 편지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외간 남자로부터 유혹의 편지를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에 스스로 가슴이 뛰고 그예 이 ‘불륜의 편지’를 가스 레인지 불로 태워 없애기에 이른다. 아내는 여고 시절 첫 번째 연애편지를 받은 이후 대학 신입생 시절과 졸업반 때 두 번째와 세 번째 편지를 받았고, 세 번째 편지를 보냈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제 아내에게 ‘네 번째 남자’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샹탈이 받은 편지 역시 단출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더 큰 공통점은 여기서도 발신자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발신자는커녕 아예 주소도 우표도 없는 편지였다. 누군가 손수 우편함에 넣었다는 뜻이다). 물론, 「낭만파 남편의 편지」에서 남편이 발신자 이름이 없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아내가 알아차리리라고 믿었던 것과 달리, 장-마르크는 샹탈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장-마르크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남자가 샹탈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믿어 주기를, 장-마르크는 바라는 것이다. 샹탈의 반응 역시 ‘낭만파 남편’의 아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첫 번째 느낌은 불쾌함이었다.” 샹탈은 그 편지가 “장난 편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샹탈이 그 편지를 휴지통에 던져 버리거나, 장-마르크에게 그런 편지를 받은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그것이 샹탈에게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장난 편지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샹탈은 “속옷 장롱을 열어 브래지어 밑에 편지를 넣었다.”
‘낭만파 남편’의 아내 역시 편지를 감춘다. 비록 첫 번째 편지는 불에 태워 없앴지만,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는 편지는 같은 운명을 맞지 않는다. 아내는 그 편지들을 “은수저를 담아두었던 까만 플라스틱 통에다 넣어 쌀통 속에 깊이 파묻어 숨겨놓았다.” 아내는 왜 두 번째 세 번째 편지를 첫 번째 편지처럼 불에 태워 없애 버리지 않고 은밀한 장소에 감춰 두었는가. 아니, 그 전에 남편은 왜 첫 번째 편지로 그치지 않고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이어지는 익명의 편지를 계속해서 보냈는가.
처음에 남편은 아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첫 번째 편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아내가 편지를 받았고 그것이 남편이 보낸 ‘깜짝 편지’임을 알면서도 무시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보았다. 남편의 추측은 갈수록 심각해져서 아내가 그 익명의 편지의 발신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로 알고 있으리라는 데로까지 나아간다. “다른 남자로부터 사랑의 편지를 받았다는 얘기를 아내가 일부러 그에게 숨겼는지도 모르겠다고 남편은 생각했다.” “어쩌면 아내는 기뻐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아예 “다른 남자를 원하고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고” 남편은 의심하기에 이른다. 아내가 두 번째 편지를 받고도 아무런 내색이 없자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심을 거의 확신으로 바꾼다. “발신인을 밝히지 않은 세 번째 사랑의 편지를 쓰면서, 남편은 어느새 아내를 시험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남편은 편지에서 노골적으로 아내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추측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아내는 첫 번째 편지를 불에 태워 없앤 뒤 어느 정도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던 차에 두 번째 편지를 받게 되자 “봉투 안에 담긴 미지의 운명을 조금쯤은 두려워하면서도 아내는 거기에 담긴 사연에 대해서 자신이 약간의 반가움과 안도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 이후의 편지를 없애 버리지 않고 쌀통 속에 깊이 보관하게 된 아내의 심리는 대체로 이러했다.
발신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구애의 편지를 받은 두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당연하게도, 편지를 보낸 이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나름대로 ‘수사’를 벌인다. 그들이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남자들인 남편 및 애인을 ‘용의선상’에 올려놓지 않은 것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남편이나 애인이 제 이름을 감추고 그런 편지를 보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여자가 주변의 이런저런 남자들을 익명의 구애자 자리에 올려놓고 관찰하며 ‘범인’ 목록에서 차례로 지워 나가는 장면은 다소 희극적이다.
장-마르크는 샹탈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의 발신인이 자신임을 그녀가 알아 주리라는 기대나 예측을 하지 않았다. 그 편지를 받고서 샹탈이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듯한 모습을 보며 그는 행복해진다. 그가 익명의 편지로써 노린 효과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다였을까. “그는 그녀가 전보다 더 즐겁게 옷을 입고 더 쾌활해진 것을 보고 행복했지만 동시에 그의 성공이 그를 분하게 했다: 예전에는 그가 부탁을 해도 그녀는 빨간 진주 목걸이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 말에는 복종하는 것이다.” 게다가 샹탈이 편지들을 받은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 역시 수상쩍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것은 훗날 그녀에게 접근하여 유혹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이 편지를 비밀로 간직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조심성이 내일의 모험을 보호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편지를 간직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이 미래의 모험을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채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두 남자는 제 꾀에 제가 빠졌다! 선의에서 시작된 그들의 ‘장난’을 심술궂은 운명의 신은 벌거벗은 악의로 탈바꿈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파국.
‘낭만파 남편’은 링 위의 복서가 상대 선수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듯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면서 만나자고 제안하는 편지였다. 제안자는 당연히 ‘그대를 사모하는’ 미지의 ‘남성’이다. 물론 그런 편지를 보내면서도 남편은 “여섯 번째 편지의 초청에 아내가 응하지 않기를 바랐다.” 편지를 받은 아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아내는 “제자리 걸음을 하는 그녀의 심심한 삶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자신이 ‘전통과 관습’의 이름 아래 시들시들 시들어 가는 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시들시들 시들어 시들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더 꽃을 피워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또한 그것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일대 모험이자 도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편과 아이로 상징되는 권태롭지만 안온한 일상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결국 아내는 결심한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그 누군가를 만나기로. 그렇지만 아내가 모험과 도박에의 초대에 응하기로 한 것은 아니다. 남자를 만나서는 “편지를 그만 보내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아내는 외출 준비를 한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시작한 것이다. “이왕이면 네 번째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여자의 심리라니!)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흡사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가운데 파국의 예감을 내장하고 있다. “아내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고, 예쁘게 얼굴 화장을 하고, 텔레비전의 소리와 움직임밖에는 아무것도 살아 있지 않은 아파트 문을 나서 네 번째 남자를 만나러 갔다.”
장-마르크도 샹탈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그 편지를 보낸 직후, 둘 사이에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다. 샹탈이, 속옷 장롱 속 브래지어 밑에 숨겨둔 편지를 그동안 장-마르크가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장-마르크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한 샹탈의 반응이 궁금해서 몰래 뒤져 보았던 터였다). 더 나아가 그녀는, 필적 감정을 거쳐, 편지를 보낸 이가 장-마르크 자신이라는 사실 역시 눈치채게 된다. 이제 그녀의 추측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그가 왜 이런 편지를 보내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것일까? 샹탈이 내린 결론은 파괴적이다: “그녀로부터 홀가분하게 벗어나기 위해. 사실 그가 더 어렸고 그녀는 늙었다.” 선의에서 출발한 편지가 이렇게 뻔뻔한 악의로 오해될 수도 있을까. 마침 자신의 집을 방문한 옛 시누이와 조카들이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일을 핑계 삼아 샹탈은 이렇게 소리친다. “이 아파트는 내 것이고 누구에게도 내 장롱을 열어 나의 소지품을 뒤질 권리가 없어. 누구도. 내 말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거야. 그 어떤 사람도.” 그 말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을 장-마르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을 계기로 샹탈은 장-마르크를 사실상 자신의 집에서 내쫓는다. 그렇게 ‘결별’을 선언한 날 밤, “너무도 쉽게 그녀가 잠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사실 “좁은 침대에 누운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편히 자지 못했다.” 또 하나의 오해.
장-마르크가 마지막 편지를 보낸 것은 둘 사이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었지만, 이제 편지 놀이를 그만 끝내기로 한 장-마르크는 편지 속 남자로 하여금 자신이 런던으로 떠난다는 토로를 하게 했다. 런던은 샹탈과 장-마르크 사이에 자주 언급되었던 도시이기 때문에 그 지명을 접하는 순간 샹탈이 장-마르크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암호화된 서명”이라는 점에서 런던은 안정효 소설의 카네이션에 해당한다.
결별 선언과 런던이라는 ‘암호’ 사이에서 일종의 두뇌 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은 파리 북역발 런던행 같은 기차에 시차를 두고 올라탄다. 이즈음부터 소설은 서서히 몽환적인 분위기로 바뀌어 간다. 장-마르크가 기차 안에서 샹탈을 발견하고, 샹탈 역시 장-마르크로 짐작되는 남자의 뒷모습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다. 런던에 내린 뒤에는 아예 현실과 비현실이 구분할 수 없게 뒤섞인다. 그 혼돈 속에서 샹탈은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건물에 갇힌 채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 버리고, ‘그’가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샹탈이 갇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건물 앞에서 장-마르크는 샹탈의 이름을 소리쳐 부른다.
장-마르크가 샹탈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장면에서 장이 갑자기 바뀐다.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 누워 있고 장-마르크가 샹탈을 껴안은 채 소리치고 있다.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꿈속의 일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인데,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가 꿈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열차가 영불해협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샹탈이 편지의 필적을 확인하느라 필적 감정소를 찾은 때였을 수도 있으며, 아예 첫 번째 편지를 받는 장면이었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심지어는 꿈에서 깬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소설 마지막 장면이 꿈일 수도 있는 것이다. 꿈과 현실이 분간할 수 없게 뒤얽혀 있는 이 소설에서 꿈 또는 악몽은 언제고 수면 위로 튀어올라 안온한 현실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는 『정체성』 역시 「낭만파 남편의 편지」에 못지않게 어두운 결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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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