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문화차이(?)로 괴로운 기혼여성입니다. 시골의사님께서 좀 다른 관점의 말씀을 해주시지 않을까 싶어 용기 내었습니다.
열애하여 결혼한 지 6년이고 다섯 살배기 귀여운 아이도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좋게 말해서) 방임형 가정-부모님의 불화가 심하여 사실상 방목 상태로 자랐습니다-에서 자랐고, 힘들었지만 간섭이 없었기에 나름의 생기와 즐거움을 만끽하며 지내왔습니다. 항상 아르바이트를 했고 뭔가를 배우고 여행을 즐겼습니다.
남편은 경남의 도시에서 자란 외아들입니다. 여자 형제간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아들’ 대접을 받고 자랐다고 합니다.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웠던 터라 부모님의 노고뿐 아니라 여러 친척의 도움을 받고 서울에서 대학을 마쳤고 지금은 제법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여행도 다녀본 일이 별로 없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모범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모범적인 회사원으로 한 직장에서 계속 근무 중입니다.
저희 두 사람은 열애했고, 지금도 서로 사랑합니다. ‘나 좋은 대로 한다'는 제 거침없는 행동이 남편에겐 매력적이고, 남편의 배려하는 태도는 제게 따뜻한 안정감을 줍니다. 세상을 살며 느끼는 기쁨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좋아야 좋다는 식이고 남편은 남도 좋아야 자기도 행복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어떤 감정적 보상을 받으면서 사랑해온 것 같습니다. 남편은 저의 당당한 활기가 존경스럽다고 하고, 전 남편의 이해심과 책임감에 감동하니까요.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저희 부부는 만신창이가 된 심정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서로 상처를 줄까요. 시댁과 관련된 하나하나가 제겐 고역이고 저의 행동 하나하나가 남편에겐 낯선 일탈처럼 보입니다.
여자들은 뒷전에 있는 제사, 아들을 선호하는 시댁의 문화, ‘니, 밥값 하나?'로 안부를 전하는 시댁 어른들(아이를 낳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제겐 낯설고 어렵습니다. 뭔가 저를 낮춰야 하는 분위기. 옷도 좀 더 얌전하고 튀지 않는 것으로 ‘입어주고' 시댁을 향합니다. 그리고 저의 잦은 해외 출장, 남자 못지않은(남편 표현입니다) 일에 대한 열정, 아이와 남편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회적 욕심, 개인주의적 태도… 모두가 남편에겐 버겁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가사노동 분담과 육아에서도 많은 다툼과 타협이 있었습니다. 결국 제가 일을 접고 집에 있습니다만 ‘주부'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차이가 크네요.
시댁과 잠시 연락을 끊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해결되지 않더군요. 시댁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 저의 문제더군요. 시댁과 연락하지 않는 동안 남편은 어딘가 불편해보였고 웃지 않았고 괴로워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모습에 안타까웠고요.
서로 얼마나 많은 얘기를 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얼마나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래도 익숙해졌고, 전 더 이상 시댁에 가서 체하지 않고 남편 역시 저의 일 욕심을 이해해주고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다툼은 계속됩니다.
저와 저희 부모님께 너무 무례하신 시댁 어른이 계십니다. 정말로 보고 싶지 않고 생각만 해도 괴롭습니다. 남편도 그분 얘기엔 말할 염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안이 조용해야 하므로' 제가 그냥 고개 숙여 인사라도 해주길 바랍니다. 남편도 시댁 어른들도 그걸 막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남편은 제가 가장 소중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과 화목한 그림 안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을 이해합니다. 남편이 자란 환경과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는 무척 괴로워하고 저를 원망합니다. 저 역시 그 과정에서 지쳐갑니다.
서른 조금 넘은 나이에 물론 평균 정도의 절망은 겪었지만, 전 항상 삶에 대한 ‘식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허무합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애써왔는데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던가 싶습니다. 결국 남편과 저의 간극이 이 정도로 크구나, 이것 하나를 깨닫기 위해 여기까지 왔나 싶습니다.
고개를 들어 물어보면 ‘다 그러고 사는 것’, ‘서로 주고받을 것(?)을 제대로 받으라’, ‘한국남자들한텐 아예 기대를 말라’ 이런 식의 체념이나 계산적인 타협이 해결책으로 나오곤 합니다. 제겐 맞지 않는 충고인 것 같습니다. 전 남편에게 단 한 가지만을 받고 싶습니다. 시댁 어른들은 어떠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 한 가지를 영영 줄 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절망스럽습니다. 이혼 외엔 대안이 없는 걸까요. 오누이처럼 서로를 알고 있는 저희, 정말로 사랑하지만 상처를 주는 저희에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서로 사랑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편안한 상태를 주장하는, 그냥 그런 존재인가요. 서로 다가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다가갈 거리가 너무 멀어서 벌써 신발이 닳아버렸어요.
'Time makes it work!', 미국 캘리포니아의 유명 와이너리 ‘할란 에스테이트’ 입구에 씌어 있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만듭니다. 한데 우리는 이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좋은 포도종자와 기술이 와인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육도 그렇습니다. 학교는 정해진 틀을 만듭니다. 개인의 능력과 특성을 무시하고, 일정기간 내에 일정한 목표만큼의 성과를 이루어 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왜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가르치는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란 배우는 곳입니다. 그럼 중고등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울까요. ‘학문’이라고 답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학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문을 배우는 과정은 ‘대학’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원래 학교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소양과 품성을 익히게 하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을 가리켜 ‘학습(學習)’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학(學)은 배우는 것이지만, 습(習)은 익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습(習)’자를 파자(跛者)해보면 내가 양쪽에 날개를 달고 나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먼저 날개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치를 배우고, 스스로 연습해서 잘 날 수 있도록 익히는 것, 그것이 학습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고, 선생님과 사이에서 질서를 익히고, 꿈을 키우는 전 과정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데 이런 과정들은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누구는 노래를, 누구는 춤을, 누구는 운동을 잘하듯, 공부도 잘하는 아이가 있고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그런 아이들을 가리켜 지진아(遲進兒)라 부릅니다. 무엇이 지진하다는 뜻일까요, 학교에서 부진하지 않아야 할 것은 공부가 아니라, 바로 사회를 꾸려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학업 성취도가 조금 낮은 것은 백가지 중에 한 가지를 잘 못하는 것입니다. 한데 어떤 녀석들은 학업도 쳐지면서 죽어라고 말도 듣지 않습니다. 어떻게 학생이 저럴 수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행동을 하거나, 규율에 체질적으로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만나보면 다들 예상과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가수 김장훈 씨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고 합니다. 학교의 기준이라면 사회적 패잔병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서울법대를 나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반사회적 범죄를 저질러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인간의 지성과 이성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또 하나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긍정적 희망을 바탕으로 기다리면 성숙하는 것이 인간인 셈입니다. 한데 중요한 것은 기다려주는 것만큼이나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시절 못난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죠. 그 아이를 두고 선생님과 부모가 긍정적인 희망을 꺾지 않고 끝까지 기다린다고 가정합니다. 그 아이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그것이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세속적인 문제와는 달리 그 아이의 인격적 성숙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한데 반대로 한 아이의 미래를 모두가 부정하고 손가락질한다고 가정하죠, 그 아이는 절대로 긍정적 자기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사회에 부담이 되는 가치관을 형성하겠죠.
우리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들 학교에 다녔으니, 사회적 성공과 학교교육과 건강한 인격이 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 의해, 혹은 사회적 역학관계에 의해 우선 관계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규정된 관계의 바탕 위에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이어갑니다. 예를 들어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면 긍정적인 기대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까다로운 직장 동료를 만나면, 한 번 등을 돌리면 그다음부터는 절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서로 위선적인 웃음을 흘리며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화해하거나 생각을 바꾸는 경우들을 만납니다. 수십 년 앙숙으로 지내온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든지, 평생을 함께한 친구에게서 어느 순간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든지 이렇게 시간의 마술은 특별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교육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사람은, 그리고 관계는 ‘시간이 숙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시간의 마법을 믿지 않고, 그 외의 것들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지금 님이 고민하고 계시는 지점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님은 남편과의 사랑을 머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라는 존재로 인해 연결되는 관계들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성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카운슬러를 만나서 ‘서로 가슴을 열고 대화하세요’ 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쳐도, 그 가슴을 연 대화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흐트러진 관계의 원인이 존재하는 한 그 허심탄회한 대화는 허심탄회하지 않고 서로의 약점만 건드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대화는 시간이 흘러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수도, 아니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런 관계들이 어디서 온 것이냐에 대한 논점입니다. 모든 것은 님의 남편이라는 존재 때문이죠. 즉 님은 이성으로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외 관계에 따른 부수적인 불편함이 고통스럽습니다. 시간을 믿어보면 어떨까요. 절망적이고 어두운 결과가 아닌 희망적이고 건강한 마음으로, 마치 한 달에 일주일은 결석하고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는 어떤 아이를 희망의 눈빛으로 감싸는 노교사의 ‘혜안과 인내’ 같은 그런 것 말입니다.
뜻밖에도 시간의 힘은 큽니다, 다만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과 긍정이라는 효모입니다. 이 효모가 없이 무작정 시간이 흐르면 그저 모든 것이 스러져 갈 뿐이죠. ‘시간이 지나니 허무만 남더라’ 라는 말은 결국 긍정이라는 효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남편과 ‘나 얘기 좀 해’ 하며 불편하게 마주하는 것보다, ‘저 할 말 있어요’ 하고 시어머니와 거북하게 마주앉는 일보다, ‘시간이 지나면 느껴지겠지’ 라고 믿고 묵묵히 기다려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당한 대우를 견디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님의 지금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만큼 말입니다. 무조건 순명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님의 이성으로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관계의 거리를 정하고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체념이건 익숙함이건 이해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서로가 타협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니까요, 다만 초조해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긍정적이어야지, 부정적이면 안 됩니다.
‘와이너리’에서는 포도를 압착해서 일단 통속에 들어가면 개봉순간까지 최고의 와인이 만들어질 것을 믿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사람이 할 일을 다하면 그다음은 세월이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
시골의사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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