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 중에 완두콩 한 알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는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완두콩 위에 매트리스를 스무 개 쌓고 그 위에다 또 오리털 요를 스무 채나 깔았는데도 공주는 아침에 일어나 “거의 한숨도 못 잤어요. 저 침대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아주 딱딱한 건데 그 바람에 온몸에 멍이 들었다고요. 정말 끔찍했어요.” 하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어릴 때 이 이야기를 듣고 배꼽 빠질 때까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누가 공주 아니랄까 봐 참 까탈스럽지만 그래도 공주라면 역시 저 정도는 돼야지,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한바탕 신나게 웃고는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콩 한 알 때문에 온몸에 멍이 든 그 공주를 말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어느덧 저는 생물학적으로는 더 클 게 없는 ‘어른’이 됐습니다. 집안의 우환이라 불릴 정도로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살았던 20대를 훌쩍 넘어, 먹고 사느라 손과 발이 바빠야 하는 30줄에 든 지도 오래됐습니다. 다 자란 몸만큼이나 머리도 가슴도 나잇값을 할 때가 됐다 이겁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는 외려 점점 ‘쫄아들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큰일에 닥쳐서, 중요한 선택 앞에서, 위기에 직면해서, 도전 앞에서, 어렵고 싫은 것 앞에서 한없이 ‘쫄아든’ 간이 이젠 정말 콩알만 해졌습니다. 괜한 일에 눈물바람할까 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피하게 됐고, 객관적이지만 가혹한 평가를 받는 게 두려워 무슨 일도 선뜻 못하겠고, 어떤 때는 세상만사 다 번거롭고 귀찮아서 며칠을 벌레마냥 집구석에 나자빠져 있기도 합니다.
요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저 공주 생각이 났습니다. 콩알 한쪽 때문에 온몸에 멍이 들고 잠을 설쳤다니 정말 웃기다 못해 기가 찬 노릇이긴 합니다만, 왠지 공주가 저와 닮은 것도 같아 보입니다. 콩 한 알이 남들이 볼 땐 별 것도 아닌 것이겠으나, 어쨌든 공주는 그것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콩 한 쪽 같은 별것 아닌 일에 간이 콩알만 해져서 겁먹고 울고 도망치기 일쑤입니다. 참으로 유약한 정신이지요. 어떤 분은 이런 저에게 ‘똥자갈’이라는 한방 특효제를 처방해주셨습니다만, 비위 강한 저도 그 약은 차마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박경철 의사께서 양방 특효제를 처방해주시면 어떨까요?
님의 고민을 읽으면서 제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면 님의 마음이 많이 상하시겠지요. 하지만 그랬습니다.
이유를 말하자면 님의 표현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에 적절한 비유,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쳐 써 내려간 님의 글을 읽으며 알려주신 것 외에 님의 이력이 궁금해 질 정도였습니다. 남의 글을 읽어보면 몇 번씩 가필 수정한 글과, 내쳐 쓴 글은 글맛이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는 화려한 필력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상당한 지식과 사유가 축척되고 숙성이 되어서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심각한 고민을 말하는데 상담자가 이 무슨 경우 없는 말이냐고 님이 서운해 하실 수 있음에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님의 글 안에서 해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님의 글을 읽자마자 떠오른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페이스 팝콘(Faith Popcorn)이 처음 사용한 ‘코쿠닝(Cocooning)’이라는 용어입니다. 누에고치처럼 집을 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지요.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혼용해서 ‘오타쿠’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덕후’라고도 하더군요. 이것은 일본사람 특유의 일종의 ‘변환능력’입니다. ‘코쿠닝’과 ‘오타쿠’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오타쿠’는 무엇인가 한 가지에 미쳐서 그것만 탐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코쿠닝’은 사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집안에 웅크리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어쨌건 님의 글을 읽어보면 님은 얼핏 ‘코쿠닝’을 하고 계신 셈이죠. 사회와 소통을 하기 싫거나, 소통이 안 되거나, 혹은 사회가 소외시킨 사람들의 존재양식인데, 이것은 현대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점점 빠르게 변화하고 인간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지만 대신 깊이는 얕아지는 것이죠. 부박(浮薄)하다고 할까요? 마치 느리게 걷기와 자동차로 달리기의 차이와 같은 것이죠.
물론 고치 집을 짓는 이유를 모두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각각의 이유는 모두 다르지요. 하지만 대개의 많은 고치들은 경박단소한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개 진지한 분들이죠. 이 분들은 내적 ‘응축’이 만만치 않습니다. 삶의 호흡이 조금 느리고, 근육보다는 뇌로 반응하는 분들이죠. 요사이는 이런 분들이 숨을 데가 없습니다. 다들 자동차를 타고 쉽게 가는데 굳이 혼자서 맨발로 걷는 분들이라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분들은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를 고집하기도 하고, 남들 다하는 재테크에 대해서도 젬병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소주 한 잔 마시고 세상의 고민을 혼자 안고 있는 양하는 소위 ‘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태생적 알레르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한데 그분들과 만나 얘기해보면 사회적 모순들에 정통합니다. 놀라울 정도의 안목을 가지고 있죠. 통찰이랄까, 심지어는 일종의 예지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은둔합니다. 일종의 현대판 은자(隱者)인 셈이죠. 은둔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내 눈에 보이는데 세상은 그 반대로 돌아가니 내가 할 일이, 혹은 내가 던질 말이 사라지고 언어는 점점 침묵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예민한 내 촉수를 서서히 거두게 되고 나중에는 실어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칫 룸펜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지금 우리시대가 과도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추격성장, 소위 ‘2nd follower’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미국, 일본 같은 나라들이 앞서가며 낸 길을 따라잡는 데 주력한 시대 말입니다. 그 길을 따라잡기 위해서 우리는 늘 그들과 비교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야구에서 일본을 이기면 일본사람들 반응을 더 중시하고 김연아가 우승을 하면 미국 언론이 뭐라고 했나, 귀를 기울였죠. 그만큼 남을 의식하고 남이 하는 평가에 민감한 시대였습니다. 자신만만하면 남이 뭐라던 상관없겠지만, 우리가 따라가는 처지다 보니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해 주는가가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아마 님처럼 촉수가 민감한 분들께는 그런 것들도 좀 창피하고 한심한 일로 보였을 것 같습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그 시대에는 달리기에 능한 사람만이 존중받았습니다. 모두가 앞만 보며 죽자고 달리던 시대였죠. 친구와 동료가 넘어지건 밟히건 상관 않았습니다. 아니 상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서 선두를 따라잡아야 하니까요. 달리기 능력 하나만이 중요했던 것이죠. 그러니 교육은 획일화, 기업은 모방, 학자는 표절을 일상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추격성장을 하는 자의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추격자에게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거든요.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누우 떼가 저 강 건너 푸른 풀냄새에 미쳐 내달리듯 그렇게 내쳐 달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다리가 걸려 넘어지고, 누군가 내 앞에 선 자의 뒷덜미를 낚아채고도 달립니다. 그러다 들키면 ‘미안해’ 하고 다시 달리면 됩니다. 심판이 휘슬도 불지 않았습니다. 누가 하건 일등만 하면 되니까요. 혹여 반칙이 너무 심해서 심판이 휘슬이라도 불게 되면 ‘레드카드’가 나오기 전에 얼른 ‘노랑봉투’를 뒷주머니에 찔러주고 ‘우리가 남이가’, ‘에이 왜 이래’ 하며 한번 눙쳐버리면 그만이던 시기였습니다. 넘어진 자는 뒤에서 달려오는 자에 밟히고, 뛰기 싫은 자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불필요한 것으로 배제되고 소외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대 청계천에서 ‘누나’들이 구부러진 허리로 미싱을 돌리고, 원진 레이온 근로자들이 암에 걸려 쓰려지고, 석면에 수은에 카드뮴에 망간에, 혹은 선반에 밀링에 폐와 허파, 콩팥이 망가지거나, 손가락과 손목이 잘려나간 희생들이 바로 그 달리기의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선두를 거의 따라잡은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도 2만 불이 눈앞이고, 과학기술이나, 대중문화까지도 그렇습니다. 이젠 우리도 선도성장 소위 ‘1st mover’의 위치에 도달해 버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남들이 낸 길을 무작정 달리면 되었지만 이젠 우리 스스로 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과거처럼 논문을 베끼고, 적당히 위장하고, 탈법하고, 남을 짓밟고 달리던 방식으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넓은 길 위를 달릴 때는 그게 통했지만, 이젠 울창한 숲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달리기뿐 아니라, 지도를 볼 줄 아는 자와, 나무를 벨 수 있는 자, 뱀이나 벌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이 모두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상의하며 바른길을 찾아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이제야 남 의식하지 않고 진짜 우리가 낸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이런 걸 좀 확장하면 ‘글로벌 거버넌스’, 혹은 ‘뉴 거버넌스’라고 하죠. 한데 우리는 이런 ‘거버넌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젠 정말 모든 이들이 정의로워야 할 때입니다. 정의로운 게 별것이겠습니까? 과거에는 빨리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잘 달리는 사람 위주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걷고 싶은 이, 쉬고 싶은 이, 왜 달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버려두고 달렸지만, 이제는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거의 관성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여전히 ‘추격성장’의 논리에 사로잡혀 달리기만 하려는 이들은 ‘아직도 길은 그것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에 그렇게 같이 달려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 말이 맞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세 숲에서 길을 잃게 될 텐데도 말입니다.
아직은 여전히 호흡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2nd follower’들의 목소리가 큽니다. 하지만 조만간 달라질 것입니다. 님과 같은 분들은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워 보이고 갑갑하고 내가 내민 촉수에는 아직도 건조한 황사 바람만 느껴질 테니까요.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황사는 봄이 오는 전령이라는 것을요.
‘새로운 거버넌스’가 창출되는 세상에서는 ‘우리끼리 왜 이래? 다 알면서’, ‘에이 원래 다 그런 거잖아’, ‘너 따위는 필요 없어’와 같은 말이 사라지고, 각자의 개성과 다양한 안목들이 병렬로 이어지고,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연결되어 내가 인지하는 세상과 내가 관계하는 실지 세상의 차이가 점점 좁혀져 갈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한 이도, 지나치게 가벼운 이도, 비트켄슈타인과 소쉬르를 읽는 이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하루키를 사랑하는 이도, 아침마당을 보는 사람과 100분 토론을 보는 사람도, 서로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사회적 기회도 마찬가지일 테죠. 토익, 학벌과 같은 스펙보다 다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나만의 생각이 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천년에?’라고 하면서 급한 마음을 먹지는 말아야죠. 어떤 ‘와이너리’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시간이 숙성시킨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애써 당기고 싶어도 굳이 빨리 가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 아무리 급해도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 그것이 문화이고, 문화적 세상이죠. 그 문화적 세상에서는 누구나 공존을 중시하고, 내 생각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습니다. 낭만적인 생각이라 여겨지실지 모르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공적 정의(public justice)’가 중시되고, 수직보다 수평이, 직렬보다 병렬이 중요한 그런 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이죠. 그때쯤이면 아마 님도 누에고치를 벗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 거두어들인 더듬이를 바깥으로 조금만 다시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봄의 전령이 오는지, 아직 한겨울인지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나의 더듬이로 유쾌하지 않은 공기가 느껴질 때 그것을 경멸하거나 외면하지 마십시오. 소수자가 다수자에게 인정받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듯, 반대로 소수자가 다수자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정의에 해당합니다. 다수건 소수건, 대중적이건 컬트적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의 그 예민한 촉수가 부럽습니다. 그리고 느껴집니다. 님의 가슴속에 응축되고 숙성된 사유들 말입니다. 어쩌면 님이 이렇게 그것을 여기에 드러낸 것만 해도 님은 아직 더듬이를 거두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님의 글에서 이런 것을 읽었고, 그래서 이런 답을 드렸습니다. 너무 관념적이거나 이상적, 혹은 몽상적, 보기에 따라서는 주제를 너무 확장한 듯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님의 글을 얄팍한 ‘블루 코드’로 이해하거나, 혹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주장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 그리고 보니 김영하의 동명 소설도 있군요. 어쨌든 님의 고민은 ‘허무, 다다, 블루’ 따위의 코드가 아닌, 시대의 고민이라고 여겨집니다. ‘등에 콩알이 배기는 것’ 그건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감각지가 아니거든요.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넓은 들판에서 언젠가는 터져 나올 님의 천둥 같은 고함을 듣고 싶어지는군요… (*)
시골의사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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