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친구에게 보냈던 내용을 그대로 보냅니다. 반말로 내용을 전달하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부디 기분 나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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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거의 2년 전의 일이야. 처음엔 성당에서 그녈 봤지. 그녀는 독서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았고, 난 평범한 중2라 지정좌석에 앉았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그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 예뻤어. 그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었어. 그냥 예뻐서 자꾸 보고 싶었던 거지. 그런 거 있잖아, 예쁜 여자는 계속 보고 싶은 거. 그래서 난 매번 그녀를 쳐다보면서 미사를 드렸어.
그러다가 중2 시절이 지나가고, 몇 달이 더 지나서 중3이 되었어. 난 고등학생은 아니었지만 중3부터 고등학생 셀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들어갔어. 난 셀에 들어갔기 때문에 3월 둘째 주에 제 2독서를 해야 했지. 난 독서좌석, 그러니까 맨 앞줄에 앉아서 미사가 시작되길 기다렸어.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가 들어왔어. 그러곤 내 옆에 앉았어. 그 때문에 미사가 끝날 때까지 내 입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어.
미사가 시작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제1독서를 할 차례가 왔어. 그녀가 앞으로 나갔지. 독서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어. 그 순간 내 마음속엔 사랑이 움텄지. 그녀가 내려와서 내 옆에 앉자,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어. 화답송을 부르고 제2독서를 할 차례가 오자, 난 앞으로 올라갔어. 조금 떨렸지만 큰 목소리로 독서를 했지. 끝나고 내려와 앉은 뒤엔, 그녀 옆에서 계속 떨었어.
미사가 다 끝나고 지하 강당에서 파티를 했어. 그녀와 난 파티에 참석했지. 내가 앉을 자리를 고르는데 선생님께서 고3들 사이에 앉으라고 했어. 난 우물쭈물 거리며 앉았지. 근데 내 옆에 그녀가 앉은 거야. 난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과자만 천천히 깨물었어.
고3 형, 누나들은 내게 말을 걸었어. 전부 칭찬 일색이었지. 목소리가 좋다느니, 독서를 너무 잘한다느니. 그런데 난 그 사람들 말은 전부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오직 그녀가 했던 말, 독서 잘하더라, 하는 말만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지. 몇 분이 지나서 그녀가 친구랑 얘기하러 자리를 옮겼을 때 난 무척 아쉬웠어. 그리고 내가 바보 같았어. 바로 옆에 그녀를 두고도 말 한 마디 못 붙였으니까.
난 그 후로 매주 독서를 하게 되었어. 그것도 그녀와 같이. 그녀는 항상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난 매번 떨려 하면서도 그녀와 간간이 대화를 나눴지. 그러면서 친해졌고 난 고등 셀 총장 누나한테 그녀의 폰 번호를 물어봤어. 내가 먼저 그녀에게 문자를 했고 우린 더 친해졌지.
문자를 시작하고 나서 1달쯤 뒤였어. 4월 중반이었지. 그녀가 어느 날, 내게 먼저 문자를 보냈어. 넌 미사 마치면 어딜 그렇게 빨리 가냐. 선물 주려고 했는데. 난 무슨 선물이냐고 물었지. 그녀는 비밀이라며 날 궁금하게 했어. 한 번 더 물어봤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 난 무슨 선물일까 기대하면서 한 주를 지냈어.
한 주가 지났는데 그녀가 갑자기 어디 가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성당을 못 온대. 어디 가는지 물어봤지만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지. 그것도 비밀이랬어. 그러곤 원래 주려던 선물이 초콜릿인데 다음 주가 돼서 주긴 좀 그러니까 자기가 먹는다고, 미안하다고 했어. 난 괜찮다고는 했지만 가슴이 좀 저렸지.
한 주가 더 지났어.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가 내게 초콜릿을 주는 거야. 때마침 생일이라 난 더 기뻤지. 물론 그녀는 그걸 몰랐겠지만. 난 그녀가 준 초콜릿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셀 총장 누나가 주는 과자와 편지는 조금 무시했어. 내겐 그 선물보다 초콜릿이 더 소중했거든.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까 초콜릿은 밀봉이 뜯긴 상태였어. 그녀의 갈등이 소실하게 느껴졌지. 난 계속 실없이 웃으며 초콜릿을 쳐다봤어. 자그맣게 한 입을 베어 물곤 서랍 속에 넣어놨지. 두고두고 아껴 먹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난 초콜릿을 받고 몇 주 뒤에 그녀를 위해서 머리띠를 샀어. 난 감각이 부족하니 총장 누나에게 같이 가서 골라달라고 했지. 그렇게 고른 머리띠를 그녀에게 줬어. 그녀는 당연히 기뻐했고 그 모습에 내가 더 기뻤지. 그녀는 잘 어울리겠다, 하면서 좋아했지.
난 그날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문자를 주고받으며 그녀와 친해졌지. 난 그녀에게 두 개의 초콜릿을 선물해줬어.
7월이 접어들 때였어. 부모님께서 갑자기 8월에 이사를 한다고 하셨지. 사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야. 그전부터 간다고 했고 난 가지 말자고 막았지. 그런데 결국 가기로 결정된 거야. 내가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했어. 그녀는 그럼 이제 못 보는 거야? 엉엉~ 하면서 슬픈 감정을 표했어. 난 그 문자에 미소 지었지. 덕분에 8월이 되어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를 했어. 격주마다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근데 그 약속은 잘 지키질 못했어. 많이 바빴고, 더군다나 엄마가 자꾸 못 가게 했어. 가까운 데 가면 되지, 뭣 하러 거기까지 가냐며 구박을 했지. 분명 오기 전에는 격주마다 가도 된다고 했는데, 몰라,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지. 그 때문에 나는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했고, 엄마를 수도 없이 원망했지.
그녀와 만난 지도 어느덧 9개월. 크리스마스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지. 그러니까 한 주 전이었어. 난 크리스마스엔 성당에 가지 못할 듯했기 때문에 그날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지. 그녀가 예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가수의 음반이었어. 내가 그 선물을 주자 그녀는 또 뛸 듯이 기뻐했지. 나도 기뻤어. 그러곤 다시 한 달이 지났지.
1월 초, 난 성당에 나갔어. 근데 11월에 그녀도 이사를 한 상태였거든. 이쪽 성당엔 12월 말까지만 나왔고. 당연히 그녀는 성당에 오지 못했지. 근데 그날이 그녀의 생일이었어. 난 생일이라 선물과 편지를 준비했는데 만나주면 안 되느냐며 졸랐지. 그녀는 미사가 끝나면 ○○역으로 오라고 했어. 난 미사가 끝나자마자 미칠 듯이 뛰어서 지하철을 탔고, ○○역으로 갔지.
1번 출구에서 그녀를 만났어. 난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정말 말 그대로, 숨이 막혔어. 이런 기분 때문에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걸까. 어쨌거나 다행히도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줬고, 난 대답을 하고 다시 질문을 이끌어내며 대화를 진행해나갔지. 아, 그전에 선물을 주고받았어. 그녀는 나에게 휴대폰 고리를 줬지. 자그마한 나무에 푸르고 무성한 잎. 그리고 그 잎 중간에 새겨진 하트. 나는 날 향해서 그 하트를 날렸다고 생각했지. 난 그녀에게 선물을 줬어. 생일 축하해요,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귀걸이와 편지였지. 편지는 고백편지였어. 그리고 우린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나서 헤어졌지.
지하철 안에서 그녀가 문자를 했어. 귀걸이 고맙다고, 평소에 갖고 싶었다고 했지. 그러면서 왜 이렇게 잘해 주느냐고 나한테 물었어. 난, 누나는 왜 잘해줘요? 라고 문자를 보내려 했는데 그 순간 문자가 온 거야. 누나 남자친구한테 들키면 혼나려고? 난 한동안 멍해서 아무것도 못 했어. 옆에 앉은 아줌마가 날 툭 칠 때까지 멍하니 창만 바라봤지. 정신을 차린 나는, 남자친구도 있느냐고 물었어. 혹시나 해서 말이야. 그녀는 있다고 했어. 난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냈지. 정말 미안하다고. 그녀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미안해하지 말라며, 왜 미안해하냐며 물었어. 난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했고 그녀에게 물어봤지, 혹시 편지 읽었어요? 라고. 그녀는 수상쩍어서 읽었다고 말했어. 난 또 미안하단 말을 했지. 뭔지는 몰라도 자꾸 미안했어. 그녀는 뭐가 미안하냐며, 괜찮다며 날 달랬어. 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타지 않았어. 그냥 집까지, 그 15분 거리를 걸었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말이야. 별이 하나, 둘, 셋… 갑자기 발에 돌이 걸렸어. 난 그 돌을 저 멀리 던져 버렸지. 다른 돌들도 보였어. 난 그 돌을 바닥에 던졌어. 돌은 조금 튀어 오르다가 말았어. 그러니까 난 돌과 가까워지려다가 말았지. 마치 그녀와 나처럼.
그 뒤에도 계속 연락은 했어. 그러다가 1월이 지나고 2월이 왔어. 여전히 문자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겼어.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그랬거든. 나랑 연락하지 말라고. 그녀는 그랬다는 말만 남기고 연락을 끊었어. 그녀와 연락하지 않는 건 마치 물고기가 없는 수족관을 보는 듯 했어. 수없이 공허했고 수없이 슬펐지. 단 하나의 생명도 느껴지지 않았어.
2월이 끝나고 3월까지 막바지에 이르자, 난 괴로움에 못 이겨 그녀에게 문자를 했어. 뜻밖에 그녀는 답장해 줬지. 간결한 답장이었지만 난 그 답장을 보며 쉼 없이 미소를 지었어. 드디어 수족관에 물고기가 들어온 거야.
4월이 왔고 난 그녀에게 노래를 선물했어. 그녀는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지. 난 그녀와의 문자가 영원히 이어질 거라 생각하며 문자를 보냈지만 두 통이 오고 그다음엔 오지 않았어. 어느 날 문득 4월 17일이 왔어. 내 생일 이틀 전이었지. 내가 자꾸 문자를 보내자 그녀는 이런 말까지 했어. 너 나 스토커냐. 난 억울했어. 그런 게 아닌데. 단지 문자를 하고 싶을 뿐인데, 연락을 하고 싶을 뿐인데. 난 내 진심을 표현하지 못해서, 내 진심을 몰라주거나 혹은 무시하는 그녀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밤새 울었어. 별거 아닌 문자 한 통에 말이야. 난 눈물을 삼키고 그녀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지.
그래도 자꾸 그녀 생각이 났어. 밥을 먹을 때도, 잠자기 전에도, 공부를 할 때도, 운동을 할 때도,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씻을 때도… 혼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땐 특히 그녀 생각이 더 많이 났지. 그 순간마다 난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벽만 바라봤어. 친구들은 내게 물었지. 무슨 일 생겼느냐고, 영혼이 빠져나간 거 같다고. 난 별일 아니라고 하면서도 집에 와선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어.
5월이 되자 난 그녀가 사는 동네를 찾아갔지. 난 문자로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어. 지금 동네에 나왔는데 만나주면 안 되느냐고. 그녀는 집인데 어떻게 날 만나러 여기까지 오느냐며 거절했어. 난 한숨을 내쉬며 지하철을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 1시간이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어. 지금 어디니. 난 이젠 나도 집이라고, 대답했지. 정말 엇갈리는 사이였어.
그녀는 그 후로 문자 한 통 하지 않았어. 난 그녀에게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답장하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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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계속해서 연락해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집착하면 더 싫어한다는 거 뻔히 아는데도, 예전의 추억 때문에 쉽게 포기를 못 하겠네요. 해결 좀 해주세요. 다른 사랑을 찾으라는 말은 말고요…
이 글에 대답을 하기 위해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게 있어서 그 시기는 이미 거쳐 온 과정에 불과하지만, 친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일 테니 말입니다.
그 때문에 기성세대의 조언은 자칫 상투적인 ‘지침’에 불과하거나, 답을 알지만 짐짓 모른 체하는 가식적인 ‘이해’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제 스스로 친구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의 입장을 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적절한 ‘거리두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한데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에는 즉각적인 ‘정답’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쉽지 않더군요.
먼저 저는 친구의 고민을 이해한다고 전제합니다. 친구는 지금 정신적인 지옥을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열정’과 ‘이성’ 정도 되겠군요.
이중에서 가슴으로 사랑하는 방식을 우리는 흔히 ‘반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녀( 혹은 그)를 사랑하는 거야?’라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답을 할 수 없어야 반한 것이니까요. 사람은 이성뿐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도 이런 감정을 느낍니다. ‘첫눈에 반했어’ 라고 하는 거죠. 하지만 그 ‘첫눈에 반했어’ 라는 감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싫증’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흔히 합니다. 심지어 쇼핑을 하거나 예쁜 공책을 하나 사더라도 첫눈에 반했던 상품을 다음에도 계속 사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람도 그런 셈이지요. ‘반함’의 감정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꼭 필요한 열 가지 항목 중에서 단지 한 개의 항목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요? 반면 수십 년을 이어온 깊은 우정들은 첫눈에 마음에 들어서 생기는 경우와 다릅니다. 우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만큼 변하기 어렵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영화 감독의 스튜디오가 ‘지브리’라는 곳인데 거기서 만든 <바다가 들린다>라는 애니메이션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혹시 보셨을지 모르겠군요.
이 애니메이션에는 전학 온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한 남학생과, 그 남학생에게 첫 눈에 반해 깊은 우정을 맺은 또 다른 친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 전학 온 여학생과 남학생의 친구가 맺어지게 됩니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거나 나쁜 이야기처럼 들리죠. 하지만 다소 지루한 듯한 이 만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의 여운을 남기고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그 영화가 바로 ‘반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조화롭게 들려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잠깐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시(詩)를 한 편 감상해 볼까요?
거리는 내 주위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귀청도 째어질듯이.
상복을 입고, 장중한 고통에 싸여,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로운 한쪽 손 뻗쳐,
꽃무늬로 가를 두른 치맛자락을 치켜 흔들고,
사뿐사뿐, 의젓하게, 조상(彫像) 같은 다리를 보이면서.
나는 마셨다, 실성한 사람 모양 몸을 뒤틀며,
태풍 머금은 납빛 하늘, 그녀 눈 속에,
마음 호리는 다정스러움과 목숨 빼앗는 즐거움을.
번갯불 한 줄기 반짝… 그런 뒤에는 어둠!
-- 그 눈길로 순식간에 나를 되살리고 사라져버린 미인이여,
영원 속에서 밖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인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저승에서 밖에는! 너무 늦었다! 영영 못 만나리!
그대 사라진 곳 내가 모르고, 내가 가는 곳을 그대 모르니,
오, 나는 그대를 사랑했을 터인데! 오, 그런 줄 알고 있었을 그대여!
이 시는 ‘악마주의’ 시인이라 불리는 보들레르의 「지나간 여인에게」라는 시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사실 예술이란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죠, 스스로 자신이 느끼는 것이니까요) 어떤 감정을 담은 시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번갯불 한 줄기 반짝… 그런 뒤에는 어둠!’ 이 구절 안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한때 유럽에서는 이런 찰나에 느끼는 감정들에 충실한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대개 이런 시기들을 가리켜 후세사람들은 ‘퇴폐적’이라고 부르거나 ‘세기말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럴까요? 머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머리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동물들은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움직이므로 서로 짝짓기만 하면 암수가 더 이상 서로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부 조류와 같은 동물 중에 그런 동물이 간혹 있다지만, 그 역시 종족을 보존하거나 새끼를 키우기 위한 일종의 본능에 불과합니다.
한데 사람은 다릅니다. 머리로 생각하죠.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한데 이 머리가 가슴과 충돌하면 참 힘이 듭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청소년기에 반항을 하고, 우울하고, 화가 나고, 때로는 공상이나 원대한 꿈을 꾸기도 할까요?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어떤 이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단지 욕망으로 행동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입속에 있는 먹을 것을 빼앗아 먹는 행동’과 같은 단지 자기만을 위하는 아이들의 욕망을 가리키며 ‘맹자’와 ‘순자’ 같은 분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인간은 날 때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차차 눈을 뜨고 귀가 열리면 엄마가 말하는 ‘지지’, ‘안돼’와 같은 ‘금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유는 아이가 위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불에 다가가거나 칼을 만지고 놀려고 하죠. 그러니 ‘안돼’를 먼저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출발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아 그림책 중에 『안돼 데이빗』이라는 책이 생각나는군요. 어쨌건 이 시기의 교육은 대개 원초적인 ‘위험’을 자각하게 하고, 몸에 습관으로 붙이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영어도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치지만 ‘위험’ 교육의 일 순위가 아니라면 아이에게 다른 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전통적으로 7세 내외부터 정규교육을 받습니다. ‘학교’라는 울타리에 들어가는 것이죠. 이 시기에 우리는 작은 ‘사회’를 배웁니다. 친구라는 수평적 개념, 스승과 제자라는 상위와 하위개념, 공동체 훈련, 윤리와 정의에 대한 인식 등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제도들을 습득하는 것이죠. 그 이전까지는 가정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무한의 배려만 받다가 비로소 좀 더 큰 사회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도 역시 각종 전문과목을 배우기 위한 기초교육을 받게 되지만 사회적 의미에서 볼 때 역시 학교는 공동체 훈련기관입니다.
한데 여기서도 우선되는 것은 ‘금기’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것보다는 ‘무엇을 하면 안 된다’라는 금기가 우선인 셈입니다. 예를 들면 지각을 하면 안 됩니다. 또 공부시간에 졸아도 안 되죠. 선생님께 버릇없이 굴면 큰일 납니다.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해서도 안 되고, 친구들과 싸워도 안 됩니다. 더 열거하자면 하나 둘이 아니겠죠. 요즘 우리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진취성을 기른다는 이유로 이런 ‘금기 교육’에 둔해져 버린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금기 교육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다듬어진 체험들이 결국 졸업 후 ‘사회’라는 더 큰 광장으로 나아갈 때 ‘공존’의 지혜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러분들은 고통스럽고 답답합니다. ‘금기’를 ‘억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금기’를 배우게 해야 할 기성세대의 잘못이 있지만 사실 어떤 표정을 짓든지 금지는 금지이기 때문에 여러분 입장에서는 갑갑하고 힘들어집니다. 원래 인간도 동물처럼 새처럼 자유롭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사회’라 불리는 성인의 세계로 진입하면 이런 ‘금기’가 사라질까요? 자유롭게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자율이라는 이름의 더 무거운 금기가 주어집니다. 당장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은 하루 종일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분입니다. 어머니를 보십시오, 그분은 가족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신을 달콤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이렇듯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이상 여러분이 지금 거치는 과정은 과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응당 지나가야 할 고통이란 뜻이죠.
그럼 본질로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친구가 만난 여자친구는 예쁘고 현명하지만 좀 섭섭하군요. 그동안 친구의 본심을 알아주지 못한 것 같으니까요. 한데 제 눈에는 그 여학생이 당연해 보인다면 더 서운할 것 같네요. 그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새 남자친구가 더 멋져 보였거나,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여학생에게는 친구에 대한 의리나 우정(사랑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네요)보다 더 중요한 것일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의리 없는 행동이 당연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작은 동굴에서 출발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열어젖히면서 점점 더 넓은 광장으로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동굴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앞에 있는 문을 힘차게 열어젖힐 때마다 점점 더 큰 광장이 나오고, 그 마지막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세상’, 혹은 ‘사회’라 부르는 마지막 광장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그 문은 애써 열어젖히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열립니다. 한데 여러분들은 각자 그 문을 열기 위해 애써 어깨를 부딪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결국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쓴 친구나 저절로 열린 문을 열고 한 단계 한 단계 세상으로 나아간 친구나 만나는 세상은 마찬가지지만, 스스로 문을 열려고 애쓴 친구들의 어깨에는 어느새 굳은살이 박혀있고, 어지간한 시련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힘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니 친구의 지금 시련도 일종의 문을 통과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친구가 더 현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은 아직 좁은 광장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 겨우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관문 정도를 거친 셈이고,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광장은 고작 작은 쉼터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광장은 더 넓어지고 만나는 사람도 늘어나며, 그 속에서 처음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음 광장에서 더 나은 사람과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작은 동네 슈퍼에 다니다가 큰 마트나 백화점에 갔을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더 나은 선택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만남을 두고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함’입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반해야 합니다. 세상에 반하고, 문학에 반하고, 친구에 반하고, 이성에 반하고 자연에 반하고 꿈에 반해야 하죠. 그렇게 ‘반함’을 혹은 ‘뜨거움’을 충분히 발산하고 만끽함으로써 여러분을 억압하는 ‘규제’ 혹은 ‘금기’로부터의 곤혹스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것은 이렇듯 억압과 분출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고민도 그냥 두십시오. 그렇게 스스로 가슴을 태우고, 머지않아 다음 광장으로 가는 문이 열리면 그곳에는 그 상처를 씻어주고 샘물과 새로운 상처를 내는 날카로운 칼날이 다시 기다리고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뜨거움은 여러분의 ‘자유’이자 ‘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활활 태울 만큼 충분히 뜨거워도 됩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만큼 머리로 생각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다음 광장에서 기다리는 스핑크스는 점점 까다로운 문제를 낼 것이고, 그 문제들을 모두 풀고 진짜 마지막 광장에 도달했을 때, 여러분이 각자 꾸었던 꿈이 담긴 보물상자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머리로 생각하는 습관’, 이것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가리켜 ‘조화’라 부릅니다. 또 머리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활활 태울 수 있는 자신감을 가리켜 ‘호연지기’라고 부릅니다. 기실 여러분은 줄기세포와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사회의 머리가 될지 다리가 될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무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나라를 이끌고 갈 리더도 나오고, 여러분 중에 세상을 바꿀 혁명가도 나올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스스로 꾼 그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정과 그 열정을 길들일 수 있는 이성적 태도를 같이 키워나갈 때 비로소 여러분이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당신들은 줄기세포입니다. (*)
시골의사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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