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5.
김영현의 『짜라투스트라의 사랑』(문학동네, 1996)을 읽다. 이 작품은 남성의 ‘여성 숭배’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철학도였던 주인공은 본시, 여성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니 여성 숭배란 천부당하다. 그가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회고하며 쓴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때
청춘은 마치 열병처럼
또는 꽃잎 속의 용광로처럼
내 피를 끓게 했고,
내 눈은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네.
‘진리는 나의 빛’이었다네!
어떤 아름다운 여자도
내겐 그 이상理想이 아니었다네.
어떤 소녀의 노래도 그 이상
나를 설레이게 하지는 못했다네.
나는 아무도 날아보지 못했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었다네.
불멸의 하늘, 신들의 세계로……
화자이자 주인공인 철학도는 ‘빛․진리․이상’을 추구할 뿐, “어떤 아름다운 여자”도 자신을 설레게 하지 못했다고 장담하고 있다. 하므로 그가 ‘여성’에게 미혹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빛이나 진리나 이상이 아닌, 전혀 반대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 폭우가 퍼붓는 날이었다. 하숙집은 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모두 내려가고 없어 텅 비어 있었다. 하숙집 주인인 그녀의 어머니--일수놀이를 하는 늙은 과부였다--도 마침 외출을 하고 없었다. 사방은 캄캄하였고, 장대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가끔 칼이 내리치듯 번개가 쳤다.
그때 혼자 이층 하숙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실까 하고 아래층 의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부엌으로 가는 길에 얼핏 열려 있는 안방 쪽을 보았는데, 그곳에 그 바보 같은 주인집 딸애가 낮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정말 태평하게, 약간 입을 벌린 채 무방비 상태로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이상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엷은 원피스의 자락은 아무렇게나 위로 걷어 올려져 하얀 허벅지가 다 드러나 있었고, 볼록한 가슴은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사방은 빗소리와 천둥소리뿐 아무것도 없었다. 거칠게 바람이 불 때마다 목련나무 잎새만 소리 내어 무너지곤 했다.
열린 문틈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동안 나는 내 속에서 격렬하게 일어나는 유혹을 느꼈다.
[...]
대지를 때리는 빗소리는 더욱 강하게 나의 귀를 때리고 나의 심장을 때렸다.
‘나는 저 애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어. 이건 착각이고 환상일 뿐이야.’
[...]
천둥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나는 마침내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은 여지없이 뛰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를 안았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놀라서 반항을 했다. 그녀가 반항을 했다! 소리까지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한 마리 발정한 짐승처럼, 성난 폭풍처럼 그녀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어두컴컴한 창 너머로 빗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일이 끝났을 때야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가를 깨달았다. 나는 그녀에게 털끝만큼의 관심도,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시궁창에라도 빠진 것 같은 기분으로 후회를 하면서 그 방을 나왔다.
*그림: Edgar Degas, Interior (The Rape), c. 1868-69, Oil on canvas
32 x 45 in. (81.28 x 114.3 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빛․진리․이상’을 추구했던 주인공은 그것과 전혀 다른 가치에 의해 손상되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어둠’(사방은 캄캄하였고), 찰나에 불과한 ‘환상’(이건 착각이고 환상일 뿐이야), 그리고 제어되지 않는 ‘정념’(한 마리 발정한 짐승처럼)에 의해서 말이다. 하지만 분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짜라투스트라의 사랑』을 쓴 작가의 무의식, 혹은 작가가 만든 주인공은 여성에게 ‘빛․진리․이상’의 이면을 투사한다.
하숙집의 딸은 주근깨투성이에다 약간 사팔뜨기였다. 하숙생 가운데 누구도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관심’을 주지 않았다. 철학도였던 주인공 역시, 그녀를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대했다. 그랬던 그를 하숙집 딸에게 이끈 것은, 다름 아닌, ‘폭우’요, ‘번개’요, ‘천둥’이요, ‘폭풍’이다. 변명 조의 저 긴 인용문 세심하게 읽어보면, ‘나’보다 더 중요한 행동 주체는 ‘나’ 따위가 어찌할 수 없는, ‘폭우․번개․천둥․폭풍’ 같은 자연 현상이다.
바로 그런 탓에 하숙집 딸을 강간했던 화자(주인공)의 고백은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는 고백으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 범행의 진범으로 ‘불순한 일기’(자연)를 지목하는 듯하다. 인용문을 보면, 애초부터 그의 유혹을 끌어낸 것은 그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그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폭우’였으며, 폭우가 ‘폭풍’으로 강도 높게 점점 변해가는 세기는 그의 혼돈이나 욕망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는 가해자가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견제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자연’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여성을 변덕스러운 자연이나 불가해한 자연과 동일시해 온 것은, 무척 오래된 남성의 수사학이다.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면, 하숙집 딸은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하여금 강간하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가 된다. 주인공은 ‘비바람 치는 폭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듯이, 여성이 무방비를 가장하여(그녀는 정말 태평하게, 약간 입을 벌린 채 무방비 상태로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쳐놓은 ‘함정’(관능)에 실족한다. 다소 길게 인용된 이 소설의 한 대목은, 극히 폭력적인 남성의 수사학을 동원해서, 다소 백치 같은 하숙집 딸을 두 번씩이나 강간했다. 다음은 주인공이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썼던 시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또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공자 노자 맹자 묵자 칸트 헤겔 니체
퇴계 원효 레닌 마오 프로이트
닥치는 대로 읽어치웠다네.
밤에는 신학책과 철학책을 보고
낮에는 시집과 소설을 읽었다네.
백과사전을 보고,
정치평론과 경제학도 틈틈이 읽었다네.
주인공은 사건 직후, 하숙집에서 도망을 친다. 뒤늦게 하숙집 딸이 유산하고 자살을 한 것을 알게 된 그는, 속죄의 방법으로 짜라투스트라와 같은 구도 행각으로 젊음을 보낸다. 그런 연후에 철학과 교수가 된 주인공은, 머리가 새하얘진 나이에 그를 따르는 젊은 여자와 결혼을 한다. 주인공은 그 시절의 행복을 이렇게 시로 적었다.
어떤 지식도, 어떤 지혜도,
이보다는 달콤하지 않았으리!
어떤 제왕도, 어떤 부자도,
이보다는 행복하지 않았으리!
[...]
악마여, 내 영혼을 팔겠네.
내 간과 쓸개, 심장과 해골도 팔겠네, 기꺼이.
단 하루만이라도 빛나는 젊음을 다오.
단 하루만이라도 강력한 가슴을 다오.
단 하루만이라도 불타는 눈과 사자갈퀴 같은
검은 머리칼을 다오.
내 모든 지혜와 내 모든 지식을 다 주겠네.
내 명예와 내 생명을 다 주겠네.
일찍이 파우스트 박사를 유혹했던 악마여,
나에게도 주사위를 던지시게나.
젊어서 여성에게 한 눈 팔지 않고 평생 자신의 학문에 전력했던 사람이, 늙어서 젊은 여성에게 희망을 구하는 서사를 ‘파우스트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나는 그녀에게 온통 취해 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사랑 이외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전부이자 내 꿈의 전부였다. 서재의 문은 닫혔고, 대신 침실의 문은 열렸다.). 『짜라투스트라의 사랑』의 일부는 거기에 속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복도 잠시, 자기 또래의 젊은 남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던 아내는 집을 나가고, 주인공은 자살한다.
주인공의 자살이 여성 숭배의 한 형식인 ‘파우스트 콤플렉스’를 지워 버림으로써, 이 소설의 여성 혐오 색채는 더 짙어졌다. 여성은 변덕스럽거나 불가해한 자연과 같으며, 남성은 그것의 희생자다. 나는 손을 씻는다.(이 독후감과 텍스트의 우수성은 별개며, 나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