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9일
제니퍼 올드스톤무어의 『처음 만나는 도교』(사단법인 한국출판인회의 부설 서울출판예비학교, 2009)를 읽다
도교道敎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요한 종교이자 사상체계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전문 연구자들이나 일반 독자 모두에게 홀대받아 왔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 ‘Understanding Taoism'을 『처음 만나는 도교』로 바꾼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도교는 귀신과 조상신을 숭배하는 소박한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신선사상神仙思想 · 역易 ·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같은 이론과 점술占術 ·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 같은 종교 행위가 더해져서 완성되었다. 이 단계가 원시 도교다. 이후 원시 도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의 도가道家 철학을 적극 수용하고(특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마지막에는 노자가 다신론적인 도교 안에서 최고의 신으로 승격되면서 종교가 되었다. 종교로서의 도교와 철학 사상으로서의 도가는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둘은 똑같이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를 경전으로 삼으며, “명상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도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15쪽)는 큰 줄기에서 하나다.
토속 신앙이자 자연 종교로 시작한 도교는 도교를 국교로 삼았던 당대唐代를 거치면서 교단으로서의 체제와 조직을 갖춘 교단도교敎團道敎(=성립도교成立道敎)가 되었고, 교단에 속하지 않는 자생적인 도교 신자의 무리는 민중도교民衆道敎라고 부른다.
중국의 종교적 생활이나 사회적 윤리는 오랜 세월 동안 유儒 · 불佛 · 도道(=선仙)가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었다. 먼저 도교와 유교 간의 사이를 살펴보자. 둘은 서로 반목했을 것 같지만, 도교와 유교는 윤리적 행위와 이상주의적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도교도들은 무위無爲를 실천하여 자연에 순응하고자 라며 여성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또한 겸손한 태도로 만족과 무욕無慾을 추구한다. 효도, 충성, 인자함 등 유교에서도 강조하는 덕목을 주창하는 문헌들은 저주, 모욕, 약속 파기, 도둑질, 간음, 과욕, 몰인정, 호기심, 험담, 분노를 금지하기도 한다. (62쪽)
다시 말해, “윤리적 행위는 건강을 위해 중요하며 제의祭儀와 자기 수양을 유효”하게 할 뿐 아니라, “개인과 그의 선조들이 범한 죄 때문에 질병과 단명의 대가”(62~63쪽)를 받게 된다는 도교의 교리는,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 윤리를 강조했던 유교와 잘 어울렸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유교 문인들은 도교의 여러 가지 실천 방법을 실행”(10쪽)하는 데 장애를 느끼지 않았다. 도교를 국교의 지위에 올려놓았던 당나라의 예가 잘 보여 주듯이, 황실 내에서 도교의 영향력이 커지면 아무래도 유가의 자리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권력을 놓고 사대부와 도사들의 다툼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유교와 도교의 밀접한 공존은 오히려 “중국 종교에서 음양의 상보성相補性을 보여주는 좋은 예”(11쪽)에 속한다.
현세적인 유교는 인간사로부터 도피를 추구하는 은둔적인 도교와 대조적이다. 유교도들이 사려 깊게 예절을 준수하는 반면, 도교도들은 사회 관습을 드러내놓고 무시한다. 이 같은 차이는 오늘날에서는 유교 덕목을 내세우지만, 은퇴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낼 때에는 도교적인 성격을 보인다. 상황에 따라 적합한 생활 태도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11쪽)
이래서 옛 중국인들을 평할 때 ‘공직에 있을 때는 유교, 은퇴하면 도교’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도교와 불교의 관계는 또 어떨까? 흔히 도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가 중국에 소개될 때, 불교 이론을 쉽게 알리기 위한 격의格義 역할을 한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도인의 사고방식을, 중국인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해 준 것이 바로 도교였다는 것이다. 아서 라이트의 『중국사와 불교』(신서원, 1994)가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거기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이 책에 대해서는 2002년 1월 7일 자로 작성된 8쪽의 독후감이 『독서일기』 6권에 실려 있다).
초기불교는 일반적으로 도교의 한 종파로서 간주되었다. 매스페로의 견해처럼 도교의 결사조직은 로마사회의 초기기독교 전파에 도움을 준 유대교 공동체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불교의 상징과 의식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듯하다. (60쪽)
『처음 만나는 도교』에서 아서 라이트의 말은 이렇게 반복 · 변주되고 있다.
도교는 불교와 서로 대립관계일 때가 많았지만, 비단길을 따라 중국에 전래되었을 무렵만 해도 불교를 중국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불교가 전래되었을 당시 대중들은 불교를 ‘외국의 도교’로 여겼고, 많은 불교 개념을 도교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불교가 중국 사회에 보다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도교 또한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철학적 정교함을 갖추게 되어 두 종교가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적 요인 때문에 중국의 불교는 인도와는 다른 특수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도교와 불교가 결합하여 하나의 종파가 된 선불교로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113쪽)
위의 인용은, 도교가 자신의 용어로 불교를 번역해서 중국인에게 소개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도교 자체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한 대목을 더 보자.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자 종교적 도교는 불교의 정교한 사원 양식과 고도로 조직화한 종교 의례는 물론 윤회사상까지 받아들였다. 그리고 중국 정신세계의 중요한 발전을 이룬 후한後漢 말, 종교적 성격을 지닌 도교 유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17쪽)
지은이는 원시 도교가 종교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도교가 불교의 교리 · 조직 · 의례를 받아들이면서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시 도교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며, 그 사이에 차이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의 관습적인 윤리와 선악 개념도 함께 수용했다.
각기 다른 특성과 교리를 갖고 있는 유․불․도는 모든 것을 종합하고 일원화하는 중국인들의 융합 능력에 고유의 경계를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사회보다 앞세우는 도가는 정치와 사회 문제에 집중하는 유가와 변별되며 불로장생과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도교는 깨달음을 통해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구별된다.
도교에 따르면, 만물은 도라는 신성함이 드러난 것이며 모든 것은 도에서 나와 도로 되돌아간다. 이때 도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지고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 만물에 깃들어 있으면서 그것을 포괄하는 우주의 원리를 뜻한다. 이런 도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도보다는 약하지만 도에서 파생된 기氣를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기는 잠시 생명과 함께하다가 흩어져서 도로 되돌아가는데, 그것이 죽음이다. 도교는 여러 가지 방법의 신심 단련을 통해 기를 보존하고, 기와 자연의 도를 조화시키면 불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도교의 도사道士들은 바로 이런 이치와 방법을 깨달은 종교인이다.
1949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지만, 미신은 제거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미신으로 치부된 도사의 종교적 활동이 제한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였던 1966~1976년 사이에 많은 도교 사원과 경전이 파괴되었다. 1910년경만 해도 140여 개에 이르던 도교 종파가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다양한 조교 종파 가운데 출가한 수행자들로 이루어진 사원 체계를 갖춘 전진교全眞敎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금지시켰다.
하지만 대니 셰쳐가 쓴 『파룬궁法輪功, 중국의 충격』(영림카디널, 2001)은, 중국인민공화국의 금지가 완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파룬궁 미국지부 대변인 장얼핑의 말을 들어 보면, 기라는 필수 에너지(생명력)를 수련함으로써 건강과 자기수양은 물론 불사를 얻는다는 파룬궁의 도교적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공은 강인한 끈기, 무사정신을 고양시킵니다. 기공 의술은 질병 치유에도 이용됩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기공은 자기수양, 도덕적 발견, 개인적 품성의 순화를 목표로 합니다. 도교의 기공은 자연과 장수, 불멸을 한데 녹여 연금술적인 변성을 지향하지요. 불교의 기공은 심성의 순화, 망상의 세계 초월 및 중생의 구원을 추구합니다. (54~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