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사진 출처: 블로그 Dr. Cho의 우아하게 나이들기
책 정리를 하다가,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이 두 권이나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일찍이 내가 읽은 것은 디자인하우스(2002)에서 나온 것인데, 언제 현대문학(2009)에서 나온 것까지 구했는지 모르겠다. 디자인하우스 판의 뒤표지 안에는 ‘2006. 2. 28. 온고당. 雨’라고 연필로 적어 놓았는데, 현대문학 판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내가 돈 주고 샀던 책에만 구매 일자와 구입처를 명기해 두는 버릇으로 보아, 이 책은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인 듯하다. 증정본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내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독후감은 2006년 3월 1일 자 독서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이 반가운 책을 사흘 전에 헌책방에서 찾아냈다. 원래 이 책은 1994년, 같은 출판 사에서 같은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으나, 이번에는 번역자를 바꾸고 여섯 편의 산문을 더 했다. 나는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서점에 들를 때마다 마치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인 듯 편편이 아껴가며 읽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이번 판본의 번역자는 ‘옮긴이의 말’에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기를 쓰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들”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책이 보이지 않더니, 증보에 새 번역이 나왔다. 그런데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한 4년간 서점 출입을 건성으로 한 탓에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화가의 산문을 읽을 때는 나쁜 버릇이 발동한다. 글에서 화가의 예술관이나 논리․방법론 등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종환鐘幻」이나 「아크로폴리스와 돌멩이」같은 글을 읽게 되면 저절로 이우환의 그림을 떠올리고, 글과 그림 사이에 나 있는 가느다란 점선을 긋게 된다. 이런 식으로 글을 읽으면서, ‘과연 화가는 이런 독법을 원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들여 쓴 글이, 한 편의 독립된 글로 읽히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읽힌다는 것은 기분 상할 일이다.
글을 쓴 화가의 기분과 상관없이, 나는 「파리」나 「술의 주변」「K양과 T씨의 경우」같은 글이 부담 없이 읽힌다. 손바닥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런 글들은, 화가의 글에서 화가의 논리를 애써 발견하려드는 나의 선입견과 수고를 없애준다.
그러니까 이우환의 이 책은, 똑같은 제목으로 편수를 늘려가며, 세 번째 나온 책이다.
서이태 역, 디자인하우스, 1994(70편)
남지현 역, 디자인하우스, 2009(76편)
남지현 역, 현대문학, 2009(81편)
남지현은 현대문학판 ‘옮긴이의 말’에 “뒤늦게 맘에 걸리던 표현들을 약간씩 손”보았다고 써놓았다. 아쉽게도 그걸 비교해 가며 음미해 볼 시간이 없어서, 새로 추가된 다섯 편을 찾아 읽었다(현대문학 판은 차례를 새로 배열한 때문에, 추가된 다섯 편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가운데 「가영이」와 「4분 43초 - 존 케이지에게」는 이우환의 에세이에서 그의 화론畵論을 읽으려는 나의 무의식적인 시도에 맞춤한 글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놓은 150호짜리 커다란 하얀 캔버스를 향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통탕통탕 어린아이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영이가 2층으로 뛰어올라왔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오너라.“
“뭐 보고 있어요?” “캔버스의…….” “하얀 캔버스, 아무것도 없잖아요.” “글쎄다.”
“뭐가 보여요?” “글쎄다.”
“요전번에도 캔버스 보고 있었는데, 재미있어요?” “그래.”
“할아버지, 가르쳐줘요. 뭐가 재미있어요?” “크거든 알게 돼.”
“가영이한테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가영이한테는 안 보여도 할아버지한테는 그림이 보인단다.”
“우와, 어떤 그림인데요?” “으음, 그건 말할 수 없구나.”
“비밀이예요?” “그래.”
“뭘까? 가르쳐줘요.” “이것 참 야단났네.”
“왜 안가르쳐주는 거예요?” “가영아, 사실은 할아버지도 잘 몰라.”
“정말?” “응, 그렇단다.”
“흐응.”
상대하기가 곤란했던 나는 문듯 초콜릿을 생각해내고, “가영아, 좋은 거 줄게” 하고는 일어섰다. 바로 며칠 전, 파리에서 가지고 돌아온 트뤼프 초콜릿을 가까운 선반에서 내려 한 개를 가영이의 입에, 또 한 개를 내 입에 넣었다. 살살 녹는 맛이다. 가영이도 나도 입을 우물거리며 즐겁게 웃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고 점차 언성이 높아지자, 가영이는 거실로 내려갔다.
시화[사촌 여동생]와 가영이는 집에서 묵었다. 이틑날 오후, 나는 아틀리에 옆방에서 전시회 스케줄 메모를 검토하면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화가 “가영아, 가영아, 어디 있니?”라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고 방문 너머를 보니 어느 틈엔지 하얀 캔버스 앞에 가영이가 동그마니 앉아 있고, 시화가 들어왔다.
“어머, 가영아, 여기서 뭐 하니?” “캔버스 바라보고 있어요.”
“뭐라고?” “그림을 보고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엄마한텐 안 보여요?”
“가영이한테는 보이니?” “비밀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니?” “가영이는 말이죠, 할아버지처럼 하얀 캔버스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신 게로구나.” “가영이한테도 보인다구요.”
“흐응.”
마침 그대 전화가 울려, 내가 전화를 받고 성난 목소리로 이야기에 열중에 있는 동안 시화도 가영이도 밑으로 내려갔다.
*이우환, 점이 선이 되고, 그림이 되고 ‘선에서(From Line)’, 1977
인용을 하며 앞과 뒤를 생략한 이 글은, ‘해석 가능한 공空’(존 케이지의 ‘침묵’의 연주처럼!)이나, ‘어린아이가 더 잘 본다’ 같은 드러난 주제보다, 숨은 주제가 더 재미있다. 할아버지가 펴 놓은 하얀 캔버스에서 자신만의 ‘그림’을 발견하는 네 살짜리 아이와, “점차 언성을 높”이고 “성난 목소리”로 설전을 벌여야만 하는 전문가들의 세계를 보라!
2006년에 읽었던 디자인하우스 판의 목차에 연필로 「아크로폴리스와 돌멩이」와 「뱀」에 밑줄을 그어 놓았길래, 두 편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 두 편의 글에 따르면, 이우환에게 물질이나 대상은 마음의 환幻이요, 조작이다.
1996년에, 대구의 어느 화랑에 크기가 40×60이 되지 못하는 이우환의 판화가 나온 적이 있었다. 2백만 원 정도였는데, 다른 그림을 사서 모으느라고 그걸 사지 못했다. 안 그래도 잘 나가는 사람의 그림을, 나까지 살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