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3일
류성준이 선역한 『왕유시선』(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2[당대편])을 읽다
이백, 두보와 함께 성당의 3대 시인으로 받들어지는 왕유王維는, 이백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맹호연보다 12년 늦게 태어난 그는 맹호연과 함께, 동진 시대에 활약했던 도연명의 전원시田園詩와 사령운謝靈運의 산수시山水詩를 종합한 산수전원시山水田園詩의 대가로 평가된다. 전원시와 산수시라는 양대 흐름을 집대성한 까닭에 두 사람은 언제나 왕·맹(왕유와 맹호연)이라는 병칭竝稱으로 불린다. 하지만 맹호연이 평생 전국을 주유하거나 전원에 은거하면서도 출사의 욕망을 접지 못했던 반면, 왕유는 자연과 불도에 귀일하면서 완전한 탈속을 성취했다.
하급 관리를 아버지로 두고, 독실한 불교 신자를 어머니로 둔 왕유는 21세 때, 맹호연이 40세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던 진사시에 장원 급제했다. 하지만 그의 관운은 크게 피지 못했고, 실망한 그는 43세부터 반관반은半官半隱하는 생활에 들어갔다. 그런 왕유에게 사회와 격리된 완벽한 은둔생활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안록산의 변이다. 안록산의 군대가 장안에 쳐들어 왔을 때 미처 도망을 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던 왕유는, 난리가 평정되자 역적으로 몰려 옥에 갇히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유는 더는 관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장안 외곽의 종남산終南山(=망천輞川)에 집을 짓고 불도와 시작에 몰두했다.
이백, 두보와 함께 성당의 3대 시인으로 받들어지는 왕유(王維, 699년~759년)는, 동진 시대에 활약했던 도연명의 전원시와 사령운의 산수시를 종합한 산수전원시의 대가로 평가된다. |
중년이 되면서 불도를 좋아하게 되었더니
만년에는 종남산 기슭에 살게 되었다.
흥이 나면 매번 혼자 나서는데
즐거운 마음 그저 홀로 알뿐이네.
다니다가 물이 샘솟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때를 보노라.
우연히 산 속 노인을 만나게 되면
담소하다가 돌아갈 날 잊는구나.
「종남산 별장終南別業」이라는 제목을 가진 위의 시는, 관직에서 물러나 불교에 귀의했던 왕유의 만년을 보여준다. 불교는 도가道家와 함께 당 황실을 사로잡은 종교였으나, 많은 사대부들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유가 사상을 익혔다. 때문에 이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리지만 도가에 못지않게 유교 사상이 복합되어 있고,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에게서는 유가 정신이 지배적이다. 반면 왕유는 어머니의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데다가, 30세 무렵에 아내를 잃고 나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사대부들은 상처를 하고 혼자 사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는 재혼도 하지 않은 채 투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살생殺生·음주飮酒 등을 삼가는 거사[居士 : 출가하지 않은 재가신자]의 삶을 살았다. 늘 채식을 하며 육류는 물론 마늘과 생강 따위도 먹지 않았다는 왕유의 돈독한 불심을 보여주는 또 한 편의 시를 보자.
홀로 앉아 늙어감을 슬퍼하니
텅 빈 방에 이경二更이 되려 한다
비 속에 산 과일 떨어지고
등불 아래 풀벌레 우네
흰 머리는 끝내 검은 머리가 되기 어렵고
쇠는 황금이 될 수 없으니
늙음과 병을 없애는 법을 알고 싶어
무생無生을 배운다
김원중 평역 『당시감상대관』에서 찾은 「가을 밤에 홀로 앉다秋夜獨坐」의 마지막 줄에 ‘무생’이란 단어가 있다. 이 불교 용어는 ①모든 사물과 현상이 공空이므로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란 있을 수 없음 ②일체의 미로迷路에서 초월한 경지 ③다시는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계衆生界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 만한 법도가 없게 된 자리의 부처를 이르는 말이라고 하니, 왕유가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는지 가늠된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더 재미난 것은, “쇠는 황금이 될 수 없으니黃金不可成”라고 한 여섯 번째 줄이다. 이 시구를 통해 왕유는, 단약丹藥을 만들어 불로장생을 이룰 수 있다는 도가[=선가仙家]의 노력을 허망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왕유의 시는 유가를 기본 정신으로 했던 중국의 사대부가 “한 평생 마음 상한 일 얼마나 많았던가? / 불교에 귀의하지 아니하고 어디서 녹일 수 있으리!”(「백발을 탄식하며歎白髮」 중에서)라고 노골적으로 불심을 토로한 희귀한 경우에 든다.
불교의 영향으로 시와 선(禪=깨달음)을 불가분의 관계로 놓았던 시적 특질과 함께, 왕유를 왕유답게 한 또 다른 특질은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왕유의 시를 일컬어 했다는 저 말은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는 뜻으로, 붓으로 그린 듯한 풍경 속에 시인의 뜻을 숨겨 두는 시인의 작풍을 잘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시인이 자연이나 사물에 자신의 뜻을 의탁하는 것은, 중국시의 특질이 아닌가? 『당시감상대관』을 평역한 김원중은 대다수의 당시가 “정경융합情景融合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특히 왕유의 산수시는 경景을 위주로 순연한 서정시를 썼다는 것이 대서특필할 일로 주목”받았다고 말한다.
‘시중유화, 화중유시 작법’으로 쓰인 왕유의 산수전원시가 가진 의의는 아래와 같다.
그의 산수전원시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주관적인 색채를 배제한 왕유의 산수 묘사에는 무한한 여운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산수자연시는 은일한 낭만성과 도가와 불가 의식 및 사회적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탈속의식, 회화적인 시적의 운용이라는 다양한 특성을 표출하면서 중국 당시唐詩의 거작으로 대두되었다.(류성준)
그가 자연을 시의 소재로 취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실망으로 한적한 생활을 추구한 나머지 자연에 도피하여 그 속에서 염담과욕恬談寡慾으로 자락自樂하는 경지를 추구하였고, 거기에서 마음으로나마 위안을 얻고자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완숙한 정신의 자유로움이다.(김원중)
왕유의 자字 마힐摩詰은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마摩’로부터 빌려온 것으로, 그의 이름 ‘유維’와 자인 ‘마힐’을 합치면 ‘유마힐維摩詰’이 된다. 이를 통해 왕유의 돈독한 불심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불교와 함께 그의 삶과 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도연명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왕유가 19세에 쓴 「무릉도원의 노래桃源行」는 설명이 없어도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거해서 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도연명에 대한 왕유의 흠모는 종남산(=한산寒山)에 은거하면서도 식지 않았다. 「망천에서 배적에게 주며輞川閒居贈裵秀才迪」를 보자.
쌀쌀한 산에 푸른 기운 감돌아드는데
가을 물은 날마다 졸졸 흐른다.
지팡이 짚고 사립문 밖에 서서
바람맞으며 저녁 매미 소리 듣는다.
나루터엔 석양빛이 물들어 가는데
마을 위로 외로운 연기 한 줄기 피어오른다.
다시 접여 같은 그대 만나 취하면
오류[五柳 : 도연명]선생 앞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리라.
산수전원파에 속하거나 산수자연시에 전념한 중국의 시인들은, 도연명이 만든 귀거래와 무릉도원이라는 ‘문학적 토포스’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