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스톤의 <도어스The Doors>(1991)는 제리 홉킨스와 대니 슈거맨이 함께 쓴 『여기서는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한다』(청담사, 1992)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짐 모리슨에 관한 가장 정평 있는 전기인 저 책은, 짐이 아르튀르 랭보의 생애와 시에 심취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열다섯 살 때부터 짤막한 시작 메모를 했던 짐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록 스타가 된 이십 대 후반에, 모든 시를 열아홉 살에 완성하고 나서 북아프리카로 사라진 랭보에게 매혹되었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짐이 랭보나 니체에 반했던 사실보다, 죽은 인디언의 혼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인디언 샤먼’이 되었다는 짐의 환각에 더 이끌렸다.
월리스 파울리의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사람들, 2011)은 제목에 나온 그대로, 랭보와 짐 모리슨의 삶과 예술을 동가에 놓고 비교한 평전이다. 지은이는 미국 듀크 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프루스트·랭보·말라르메·지드·클로델·스탕달·생 종 페르스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랭보의 전집을 번역했다. 평생 프랑스 문학을 연구한 학자이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그가, 짐을 알게 된 계기는 무척 흥미롭다.
지은이가 번역을 마친 랭보 전집이 나온 해는 1966년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책을 읽은 사람들로부터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현재 듀크 대학교 도서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윌리스 파올리 씨께. 랭보 번역집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불어 실력이 신통찮은 관계로 이런 게 꼭 필요했거든요. 저는 록 가수입니다.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은 언제나 저와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지은이는 짐의 존재를 몰랐고, 학생들에게 “짐 모리슨이 누구지?”라고 묻는 바람에 창피를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지은이의 나이는 예순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서도 지은이는 짐의 음악을 들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가 도어스의 앨범을 듣게 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자신의 강의를 듣는 유명 농구 선수가 매번 매표소에 그의 표를 맡겨 놓았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농구 선수가 읽어보기를 권한 『여기서는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한다』를 읽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 책에는 짐이 랭보의 작품을 자주 읽었다는 얘기가 여러 군데 나왔고, 지은이는 자신이 번역한 랭보 전집에 대해 짐이 편지를 보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예순이 넘은 노학자가 도어스의 앨범을 듣고, 짐의 가사를 평가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도어스의 음악을 들어보니 짐 모리슨의 노랫말은 랭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감지”한 그는, 이후 랭보와 짐 모리슨 또는 시와 로큰롤 음악에 대한 세미나와 강좌를 여러 차례 했다.
1854년생인 랭보는 신앙심 깊고 고지식한 어머니 밑에서 끊임없는 질책을 받으며 자랐다. 육군 대위였던 남편이 종적을 감추자, 랭보의 어머니는 사라진 남편에 대한 원망을 아들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조숙한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랭보는 어린 나이에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천성을 상실했고, 일찌감치 자신의 초상을 ‘지상에 유배된 천사’로 설정했다. 그가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저녁의 기도」에는 “나는 이발사에게 맡겨진 천사처럼 앉아 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천사가 주로 흰옷을 입는 것으로 표현되듯이, 랭보는 이발소의자에 앉아 흰 가운을 둘러쓴 자신을 천사로 여기고 있다. 이 ‘천사 이미지’는 스스로가 용인한 소외와 반항의 낙인이면서, 자신의 타락에 대한 도덕적 비난마저 덜어준다. 지은이는 1970년대의 히피들과 록 싱어들이 랭보가 사용한 천사 이미지에 매료되었으며, ‘플라워 칠드런Flower Children’을 그것의 변용으로 본다.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
랭보가 ‘지상에 유배된 천사’를 자처하고, 말라르메가 “주목해 보아야 할 통행자”라고 일컬었던 랭보의 삶은 반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랭보는 일상에 반항했다. 철이 들면서 그는 가족(정확하게는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반항했고 샤를르빌 중학교의 교사들에게 반항했고 노트르담 교구 소속 마을 성당의 사제들에게 반항했고 샤를르빌이라는 지역 사회에 반항했고, 열너댓 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급기야 19세기 프랑스 시단에 반기를 들었다.”
1943년생인 짐 모리슨의 유년은 랭보와 흡사하다. 미 해군 역사상 최연소 제독이었던 짐의 아버지는 아들을 낳자마자 임지로 배치되어 가족을 보살피지 못했다. 어머니 밑에서 기지촌을 전전하면서 자란 유년이 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어떻게 지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에서 짐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선생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고 이해했던 유일한 학생으로 짐 모리슨을 기억한다. 랭보와 거의 같은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LA 영화학부에 입학했는데, 그때 캘리포니아에는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철학과 히피들이 그득했다. 짐은 거기서 삐딱하기로 소문난 일당과 어울려 다녔고, 훗날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조수가 된 데니스 제이콥과 랭보의 생애에 대한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도어스의 리드 싱어였던 짐 모리슨 |
도어스가 음악 활동을 했을 때, 많은 밴드는 사랑과 평화를 노래했다. 반면 도어스는 성과 죽음에 대해 노래했다. 폭력과 정념을 시의 주제로 삼았던 랭보와 짐의 가사에서 유사점을 찾기도 한 지은이는, 랭보와 짐이 추구했던 ‘추醜의 시학’을 이렇게 평가한다. “예술은 추한 존재에게도 매력을 부여하고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그것이 예술이 지닌 힘이며 자랑거리다.” 그리고 예술가가 추를 미로 변환시킨 예술 작품은 길이 남지만, 그런 질곡에 봉사한 예술가는 인간으로서의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른 나이에 절필을 선언하고 아프리카행을 택한 랭보와, 인기의 절정에서 밴드를 방치한 채 파리행을 택했던 짐은 그런 가혹함에 대한 도피였을까?
자신이 만든 노래를 여러 사람 앞에 들려주는 고대의 전통은 12세기 남프랑스의 트루바르드(troubadours; 음유시인)라고 불리운 음유시인에게까지 전승되었다. 랭보가 노래를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다행히도 짐은 자신이 쓴 시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지은이는 짐을 트루바르드의 후예로 자리매김하는 한편, 기성의 사회에 안주하지 못했던 랭보와 짐을 바이유voyou로 명명한다. 악당․깡패․건달을 지칭하는 바이유라는 단어에는, 범죄행위가 짙은 나쁜 행동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어릿광대이자 떠돌이이기도 한 바이유 가운데 12세기에 출간된 작자미상의 「노트르담의 곡예사」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바이유 시인은, 프랑스와 비용과 아르튀르 랭보로 이어졌다. 미국 중산층의 규범을 거부하고 섹스·마약·록 음악을 결합한 새로운 반항을 시도한 짐 모리슨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바이유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