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일
하나무라 만게츠의 『울鬱』을 읽다
소설의 주인공 마이하마 히비키는 서른 살을 목전에 둔 미혼 남성으로, 빵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며 소설을 습작하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주인공은 고양이 새끼를 패대기쳐 죽이고, 유모차 안에 든 아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죽일 뿐 아니라, 여고생을 성폭행하고 나서 시리키리마(작가가 이 소설을 창작하기 직전, 도쿄에서 빈발했던 엽기적 사건. 골목길에서 지나가는 여자의 엉덩이를 칼로 긋는 치한을 뜻한다)를 흉내 낸다.
일본의 사소설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아직 소설가가 아니라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나이”에 불과한 주인공이 왜 이런 악행에 몰두하는지를 짐작할 것이다. 이토 세이의 익히 알려진 사소설론에 따르면, 현실을 회피한 대가로 자신의 생을 예술품으로 조탁하게 된 것이 일본의 사소설이다
일본 근대소설의 수필적 자전적 특성, 이야기식 조형에 대한 반발은, 소설 기법의 후진성 탓이 아니라 현세의 조형은 현세에서의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 작가들의 본능적인 회피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도 또한 그것이 예속을 강요하는 현세의 힘이었기에 회피되었던 것이다. 도망쳐서 현세의 자기 입장을 무無에 가까운 것으로 둠으로써 행하는 생의 비판은, 지극히 강력한 일본적 방법이다.(이토 세이, 「도망 노예와 가면 신사」, 『일본 私小說의 이해』, 소화, 1977,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4, 18쪽)
주인공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동인지의 동료인 S를 가리켜 그에게 소설이란 “자신의 생활을 멋지게 채색해줄, 그러나 손에 넣기 위한 악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에게는 세계와 현상을 조감하고 사색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주체하는 것만 해도 힘에 겨웠다”(이상 17쪽)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소설을 써보겠노라고 인육을 먹기까지 했던 S는, 소설을 써보겠노라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히비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동류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S를 조롱할 수 있는 까닭은,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단순한 시식 체험으로밖에 여기지 못하는 S의 한계 때문이다. 작중에 나오는 히비키의 소설가관을 종합해서 유추하자면, 이를테면 S는 인육을 먹고 ‘짜다’느니, ‘냄새가 난다’느니 하는 체험에 머무를 뿐,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가로서는 실격인 것이다.
[S는 체험에 매몰된 탓에] 자기와 세계, 그리고 현상을 상대화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상대화할 능력도 없는 사나이가 소설가를 지칭하다니. 모랄, 도덕, 윤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설에서 선과 악의 규정은, 사회 통념이라는 이름의 도덕이나 윤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17~18쪽)
자신만의 모랄moral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허락된다? 이것은 ‘신이 없으면 무엇이든 허용된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변종처럼 보이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사소설의 원리이자 동력이다.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현실(정치)의 힘’에 대항하겠다는 원리에서 시작한 사소설은 아주 역설적이게도, 여제자에 대한 애욕(다야마 가타이의 『이불蒲團』)과 조카딸과의 불륜(시마자키 도손의 『신생新生』)을 가리지 않고 윤리화(?) 해버린다. 다시 말해, 모든 윤리가 개성화(사유화私有化)될 수 있는 사소설에는 애초부터 윤리가 없는 형국이다.
이 작품에는 ‘짝패’로 간주될 수 있는 숱한 인물들이 나온다. 주인공 히비키와 빵 공장의 아오이, 히비키에게 강간을 당한 유미에와 같은 반에 다니는 요코 등등. 그런데 이 모든 짝패는 ‘강자(가해자)/약자(피해자)’라는 사도 메저키즘적Sado-masochism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 이런 설정은 작가가 현대 사회 전체를 “사디즘이 발산되는 공간”(163쪽)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런 신념은 ‘막히다, 막혀서 통하지 않다, 우거지다, 수풀이 무성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목에 과시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더욱 흥미롭게는 문학 역시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디즘과 열등감 해소의 정당화”(62쪽)에 지나지 않는다는 언명에 드러나 있다.
소설은 히비키가 강간을 했던 유미에를 다시 찾아가는 것에서 새롭게 발전한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역전되어, 강간을 당한 여고생이 가해자인 삼십 대 직전의 남성을 노예처럼 조종하게 된다. 이런 역전은, 겉으로는 모범생이지만 이미 상당한 성 편력을 거쳤던 유미에의 개인적 이력보다, ‘성욕이 강한 사람은 그보다 약한 사람에게 휘둘리게’ 되는 일반적인 성 형태에 더 부합한다. 게다가 이런 역전은 사도 메저키즘적 관계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위트wit에 해당한다. 굉장히 뻔한 이런 역전이 이 소설의 변환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주종 관계가 바뀌면서, 히비키가 독서광인 유미에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각자 소설로 써보자고 제의할 수 있게 된 점에 있다. 히비키와 유미에 사이의 관계의 역전이 없었다면, 히비키는 자신의 특권(소설 쓰기)을 유미에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무라 만게츠 |
이 책 말미에 붙어있는 인터뷰에서 하나무라 만게츠가 “자신의 체험을 쓴 적은 없다”(409쪽)라고 강조하는 것과 달리, 『울』의 주인공인 소설가 지망생은 결코 사소설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은, 이 소설을 하나무라 만게츠의 사소설론으로 읽게 만든다. 그렇지 않은가? 사소설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작가가 사소설을 쓰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면, 거기에는 사소설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인 표명이 섞여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히비키와 유미에의 역전은 그래서 이 소설의 변환점이 된다. 즉 이 변환을 지렛대로 작가는 사소설에 대한 메타meta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비키는 유미에와의 경험을 번안한 단편 소설로 이름난 문예지에 각광을 받는 신예 작가가 된다. 유미에는 문예지에 실린 히비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고작 치한에 불과하리라고 여겼던 그가 기대 이상의 작품을 쓴 것에 놀라는 한편 “명백한 질투심”(375쪽)을 느낀다. 그러면서 “이 페이지에 실려 있는 것은 나다”(376쪽)라는 억울함과 진척이 되지 않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초조감을 느낀다. 하나무라 만게츠는 유미에의 질투와 초조를 묘사한 다음, 곧바로 실제 상황처럼 잘 꾸며진 유미에의 환각을 4쪽에 걸쳐 묘사해 놓았다. 환각의 내용은, 연하의 직장 신입 사원과 바람이 난 어머니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는 아버지와 유미에의 성교다.
느닷없이 삽입된 이 대목이 가리키는 바는 꽤 명료하다. 유미에는 직감적으로 사소설의 성공 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유미에는 히키비가 각자 써보자고 권한 것이 “사소설 같은 것”(237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히키비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 극적인 사생활(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소설을 쓰기 위한 동력으로 아버지와의 근친상간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편, 한 편의 단편 소설로 주목을 받으며 문예지의 연재를 따낸 히비키는 마감이 되도록 새로운 작품의 결론을 맺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사소설이야. 나의 사소설. 조금만 쓰면 돼. 그런데, 마지막 한 걸음에서 안 써져.”(387쪽) 새로 집필하고 있는 작품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지게 된 것은,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기 직전에, 히비키의 생계를 도맡아줄 유키코라는 여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안정된 생활은 모든 예술가들이 이 꿈꾸는 바이지만, 사소설 작가에게는 창작의 근원을 파괴하는 독이 된다.
생의 위기의식을 창작의 유일한 모티브로 삼고, 그 위기감을 실생활에서 추구한다고 하면, 점차 실생활 그 자체에 위기를 설정하는 경향을 낳고, 급기야는 생 그 자체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생의 위기를 경계하고 극복하는 데서 실생활의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내발적인 창작 의욕은 점차 침체되고, 결국 과묵해질 수밖에 없다.(히라노 겐, 「사소설의 이율배반」, 『일본 私小說의 이해』, 208쪽)
히비키의 돌파구는 “어이, 사소설은 실천이 필요한 거야. 목걸이를 한 충견 하치코에서 광야의 들개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한 거야”(388)라고 소리치며, 동거녀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개수대에서 비누로 손을 씻어내고 만년필을 잡는다. “최후의 절정이 필요했어. 최후의 절정. 덕분에, 멋진 장면을 쓸 수 있게 될 것 같아. 현실감 있는 장면을 쓸 수 있을 것 같아.(391쪽) 아주 일반적인 규정에 따르면, 사소설이란 작가가 배우가 되어 생활을 연기하고 그것을 받아 적은 것이다. 이때 배우로서의 작가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항상 위기에 몰아넣어야 하며, 그 강도를 점점 높여가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히비키가 말하는 ‘(사)소설의 윤리’이다.
앞서 말했듯이, 『울』은 사소설에 대한 하나무라 만게츠의 논평이자, 일종의 희화화라고 할 수 있다. “사소설. 정말 별 볼 일 없는 거야.”(387쪽)
사족이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것은, 이 작품이 번역되었던 해다. 하지만 『독서일기』 5권에는, “하나무라 만게츠의 짜증나는 소설 『울』”이라고만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