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2일
이남종이 선역한 『맹호연시선』(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1[당대편])을 읽다
맹호연孟浩然(689~740)은 당대唐代는 물론이고 중국 고전문학 전체를 대표하는 성당 시절을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263수의 시를 남긴 그는 이백·두보 다음의 대가로 인정받는 한편, 왕유와 함께 산수전원파의 대표로 평가받는다. 『맹호연시선』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북쪽 시내에 배 띄우고北澗泛舟」부터 읽어보자.
넉넉히 흐르는 북쪽 시냇물.
배 띄우면 어디고 갈 수 있다네.
물 따라 오르내리면 절로 흥취가 나.
멀리 오호[五湖 : 범려가 숨었던 호수]까지 갈 것도 없지.
맹호연에 대한 전기적 사실이 전무한 채로 위의 시를 보면, 시인은 그저 팔자 좋고 무욕한 인물로 보인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절에 인용된 범려范?의 고사는, 출세 따위는 안중에 없는 시인의 절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맹호연의 삶을 보면 「북쪽 시내에 배 띄우고」에 나오는 범려의 고사가 자기 희화나 비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임금을 도와 큰일을 맡았던 적도 없는 못난 놈이니, 토사구팽을 피해 숨을 이유도 없지!’
울분과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노래한 대자연의 아름다움
시인 이하의 일생을 절망에 빠트린 것은 가휘에 걸려 진사시를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마찬가지로 맹호연은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다. 10세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문장에 매진했으며, 그 이후에는 장안長安으로 올라가 저광희儲光羲·포융包融·기모잠?毋潛 등과 어울렸던 결과가 그렇게 참담했던 것이다. 진사시에 떨어진 맹호연은 장안에 머물며 장구령張九齡·왕유 등의 조정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황제에게 글을 바치는 방법으로 출사를 꾀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현종玄宗의 노여움을 사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이 일화가 궁금하신 분은 김원중 평역 『당시감상대관』 415~416쪽을 보면 된다).
중국과 조선의 독서인(선비)들이 과거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자아성취도 있지만,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실질적 이유도 크다. 과거에 낙방하거나 벼슬을 얻지 못한 독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훈장질을 하는 것밖에 없다. 맹호연은 훈장이 되는 대신 전국을 방랑하고 방외거사들을 사귀면서 출사에 실패한 비분을 달랬다. 맹호연의 많은 작품이 여행과 교우를 소재로 하고 있고, 또 벗과 술 마시는 즐거움이 자주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맹호연은 생전부터 줄곧 산수전원파의 대표로 추앙되어 왔으나, 거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산수전원시란 농촌과 대자연에 은거하면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작가의 염담[恬淡·恬澹 :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한 심경을 나타내는 시다. 그런데 맹호연의 시에는 노여움과 슬픔이 너무 많은데다가, 그의 시가 거의 일관되게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낸다. 「전원에서 지음田園作」이란 시를 보자.
낡은 오두막은 속세의 시끄러움과 사이를 두고 있으니,
선조께선 고요함과 소박함을 숭상하셨다.
살기 좋은 곳을 가려 은거처로 삼으시곤,
과일나무 가꾸어 천 그루 채울 정도이셨다.
나의 세대에 이르러선 그저 흐르는 세월에 맡겨두고 있을 뿐,
서른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알아주는 사람 만나지 못하고 있다.
책 읽고 벼슬하고 칼 들어 공 세울 시기 늦어져가건만,
산야의 전원에서는 하루해는 또 하릴없이 저물어간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절로 생각이 많고,
한낮에 정좌를 해봐도 깨달음은 늘 적었다.
하늘까지 날아오르는 큰기러기를 부러워하고,
모이 다투는 닭과 오리를 부끄러이 여긴다.
황제를 알현하는 금마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무하러 오가는 길에서 괴로움의 노래를 부른다.
궁벽한 시골마을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조정에도 친지가 드무니,
그 누가 양웅揚雄 정도의 인물인 나를 위해,
한번 그의 감천부甘泉賦 같은 내 작품을 추천해줄 것인가?
「전원에서 지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위의 시는, 산수전원시의 풍격을 기대했던 독자들의 기대를 참람하게 배반한다. 산수전원시의 대표 시인이 지었다는 이 시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속세를 떠난 은일군자의 여유자적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서른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알아주는 사람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울분과, “황제를 알현하는 금마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출사의 욕망을 키우고 있는 흉한 괴물(?)의 모습만 보인다. 특히 맹호연 자신을, 「감천부」라는 뛰어난 시로 성제成帝에게 발탁되었던 서한西漢의 문학가 양웅과 비교하는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이 시인이 과연 산수전원시를 쓸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이를테면 맹호연의 이런 태도는 한·중·일로 대표되는 한자문화권에 ‘귀거래歸去來’라는 불후의 문학적 토포스topos를 제공한 동진東晉시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풍격이나 정신과 커다란 차이가 난다. 남윤수의 『한국의 「화도사和陶辭」 연구』(역락, 2004)에서 「귀거래사」의 요체라고 할 만한 3단을 인용한다.
돌아왔음이여!
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도 끊으리라.
세상은 나와 어긋나 있으니,
다시 수레를 타고 나선다 한들 무엇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겨운 대화에 희열을 느끼고
소금素琴과 서적을 즐기니 근심 걱정 사라지네.
농부가 나에게 ‘봄이 되었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이랑에서 봄갈이 하리라.
때로는 포장을 씌운 수레를 타기도 하고,
더러는 작은 배를 노 저어가며,
깊고 멀리 배 띄워 골짜기 찾고,
수레 타고 험한 언덕도 넘어,
나무는 싱싱하게 물올라 잘도 자라고,
샘물은 끊임없이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네.
만물이 때를 얻어 피어오름을 부러워하면서,
내 생이 휴식에 다가감을 느끼노라.
41세에 벼슬을 걷어찬 도연명이 낙향을 결심하며 쓴 「귀거래사」와, 출사에 실패한 맹호연이 쫓기듯이 고향으로 돌아가 쓴 「전원에서 지음」은 똑같은 전원산수시가 아니다(같지 않기 때문에, ‘귀거래’의 정신은 흔한 전원산수시와 다른 명칭을 얻게 됐다). 도연명에게서 느껴지는 도저한 탈속이 맹호연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은일, 독서인들이 자신을 비싸게 파는 방법
『맹호연시선』을 선역한 이남종은 이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에게 석·박사 학위를 얻게 해준 맹호연을 옹호한다. 현대 문명(도시화)과 자기 계발(출세욕)에 찌든 “오늘날의 독자로서 옛 시문을 통하여 세상일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는 잘 알겠지만,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은일은 단순히 ‘자신의 욕심을 모두 비운 채, 대자연에 숨는다’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대목을 인용한다.
기실 은일과 출사는 ‘숨어살면서 자신의 뜻을 보전하고, 의로움을 행하여 도를 관철하는’ 사인계층士人階層의 행동방식으로서 이미 유가사상의 범위 안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은일이 출사의 관문으로 채용되어 있었던 그의 시대에서 은일 행위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출사의 생각을 접어둔 채 그저 전원의 한적을 노래한 중국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세상에 욕심을 갖지 않고 은둔으로 일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은자이다.
독서인들의 은일은 때를 얻지 못해 잠시 물러나 있는 것을 뜻하지, 스님이나 도인들처럼 속세를 떠나거나 등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서인들의 은일이 자신을 비싸게 파는 방법이었다는 것은 남송南宋의 대유학자였던 주희朱憙나, 그를 따라 했던 조선의 노론老論 영수 송시열의 행적이 잘 입증하고 있다.
한자문화권 속에서 은일과 출사는 도가와 유가의 관계처럼 시차적이며, 구심력과 원심력처럼, 한 편이 다른 편을 이상화하면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맹호연의 많은 시들은 산수전원시에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은일과 출사가 서로 배척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한 해가 저무는 세모에 세상을 잊고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시인이 망망대해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바다 저편에 있다는 전설 속의 선경仙境을 묻는 「세모에 바다 위에서歲暮海上作」를 읽어본다.
공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 또한 배타고 바다로 나왔다.
저녁에 북두성 자루가 돌아간 것을 보고,
그제야 한 해가 다 가버렸음을 알았다.
빈배는 제가는 대로 맡겨두었고,
낚시 드리웠지만 달리 바램은 없다.
떼를 탄 사람에게 물어보나니,
창주[滄洲 : 바다 저편에 있다는 선경]는 또 어디에 있는가?
맹호연은, 안절부절,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고, 어디에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