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5일
미시마 유키오 外 4인의
『난릉왕 外』(삼성미술문화재단, 1987, 세계명단편선15, 일본어권Ⅱ)를 읽다
‘일본어권Ⅱ’로 묶인 이 책에도 ‘일본어권Ⅰ’과 같이 다섯 편의 작품이 묶여 있다. 표제작인 미시마 유키오의 「난릉왕蘭陵王」을 비롯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신」, 이노우에 야스시의 「투우」, 엔도 슈사쿠의 「백인」, 구로이치 센지의 「이층집 이웃사람」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신」 말고는 모두 처음 읽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집에서 흥미롭게 읽은 것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투우」와 엔도 슈사쿠의 「백인白い人」이다. 일반적인 단편 분량의 배나 되는 두 작품은 1950년과 1955년에 차례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참고로 ‘일본어권Ⅰ’에 실려있는 오바 미나코의 「세 마리의 게」도 1968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백인」과 「세 마리의 게」는 프랑스와 미국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최인호가 「깊고 푸른 밤」에서 한국 소설의 공간을 미국으로 넓혀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던 것이 1982년이니, 이에 비하면 일본의 이런 시도는 한참 일찍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노우에 야스시와 엔도 슈사쿠는 기질이 정반대인 작가다. 야스시의 경우 내가 읽어 본 작품은 『빙벽』(평화출판사, 1980)이 유일하고, 슈사쿠의 작품은 『빙벽』과 『모래꽃』(고려원, 1995)·『바다와 독약』(가톨릭출판사, 2001)을 읽어 봤다.
‘원점회귀형’ 작가 엔도 슈사쿠,
‘발전형’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
가톨릭 신자인 엔도 슈사쿠는 어느 작품에서나 신자의 입장에서 신과 죄의식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반면 이노우에 야스시는 역사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들로 이야기꾼의 솜씨를 뽐냈다. 그의 대표작인 『돈(둔)황敦煌』은 돈황 석굴의 신비를, 『풍도風濤』는 몽고의 고려 침략을 다루고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우리나라에 여러 역본이 나와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일찍이 작가를 ‘원점회귀형’과 ‘발전형’이라는 두 가지 기질로 나누었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심리적 외상trauma 주변을 맴도는 것이라는 심리학적 설명에 기댄 원점회귀형은, 강박처럼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원점회귀형 작가의 이런 고투에 우리는 ‘깊어진다’는 형용을 바치는바, 그의 모든 작품은 한 가지 주제의 변주이기 십상이다.
반면 글쓰기를 직업으로 여기는 태도가 두드러지는 발전형은 끊임없이 유동하며 성장해 가는 작가로, 자기 연민 따위를 돌보는 법이라고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자아를 보살피거나 뒤돌아보기보다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통해 자아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라든가 역사의 빛을 맞이하고자 앞으로 나아간다.
엔도 슈사쿠의 「백인」은 그의 여느 작품이 그랬듯이, 원죄原罪에 일그러진 인간의 자유의지가 끝 간 데를 탐구한다.
나는 여기서 얀센파 책을 읽으며 지냈다. 유년 시대부터 나를 형성한 이 사상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인간은 원죄로 인해서 일그러져 있다는 점뿐이었다. 인간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떠한 덕행이나 의지도 우리 인간을 순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은 없다. 얀센파의 이 사고방식이야말로 정말로 나의 인간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원죄에 일그러진 인간의 자유의지만큼 처치 곤란한 것은 없다. 작중의 주인공을 작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것을 작가는 얀선파Jansen派 교리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그런데 「백인」 뒤에 붙어 있는 짤막한 작품해설에는, 자못 진기한 작가의 약력 사항이 있어 흥미를 끈다. 게이오 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작가가 프랑스 유학을 가서 연구한 것은 사드였다. 이 작품 가운데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
문화라든가 기독교라든가 휴머니즘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오늘의 상황이다. 나찌에 한해서만 그런 것은 아닐 게다. 연합군이든 문명인이든 황색인이든 인간은 모두 그런 것이다. 오늘 학살당하는 자는, 내일은 학살하는 자, 고문을 하는 자로 바뀐다. 내일이란 리용 시민이 이를 갈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독일인과. 동족을 배신하며 나찌에 협력한 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날이다. 마르끼 드 사드는 기막힌 말을 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의 피는 붉게 물들고 그 눈은 고문의 쾌락으로 빛나며……”
이 대목의 흥미란 다름 아니라, 작가의 원죄론이 가톨릭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사드로부터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원점회귀형이 천재형 작가들의 습속이라면, 발전형은 기업형 작가랄까? 「투우」의 말미에 붙은 작품해설에는 이노우에 야스시에 대한 이런 평가가 있다.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일본문단에서 특이한 위치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의 독창성은 바로 그 발판이 되어 있다. 그것은 전후 일본문학계에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이 작가 이전의 소설은 사소설에 독점되어 있다시피 한 서정과 대중 문학에 맡겨졌던 이야기 중심의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새로운 소설의 유형을 만들어 낸 사람이 이 작가라고, 일본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의 많은 걸작을 낸 그는 이 특성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뚜렷한 발자취를 일본문단에 남겨 놓은 현역 원로작가 중의 하나이다.
위의 해설 가운데 눈여겨볼 사항은 ‘사소설과 대중 문학의 종합’이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다. 일본 전래의 소싸움 대회라는 독특한 소재를 빌어 전후 일본의 수상쩍은 활력(자본가의 득세)의 단면을 드러낸 「투우」는 등산을 소재로 한 『빙벽』과 함께, 작가의 기업가적 주제 편력을 입증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