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4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外 4인의
『손수건 外』(삼성미술문화재단, 1987, 세계명단편선14, 일본어권Ⅰ)를 읽다
열다섯 권이나 되는 이 선집이 나왔던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책을 사 모을 때였다. 하지만 이 선집을 다 읽은 기억은 없다.
‘일본어권Ⅰ’로 묶인 이 책에는 표제작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손수건」을 비롯해,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 후가자와 시치로 「나라야마부시考」, 오에 겐자부로의 「죽은 자의 사치」, 오바 미나코의 「세 마리의 게」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서 「이즈의 무희」만 오래전에 다른 선집에서 읽은 적이 있고 나머지는 처음 읽는다.
‘작품을 선정’의 말을 보면, 이 선집의 일본어권 작품은 소설가 이호철이 맡았나 보다. 다른 사항은 모르겠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허다한 작품 가운데 「손수건」을 든 것은 뜻밖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 하나를 선정하면서 「손수건」을 꺼내놓을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었던 아쿠타가와의 대표작 선집 『월식』(하늘연못, 2005)에는 당연히 없고, 궁금해서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낸 몇 권의 선집에도 없다. 『지옥변』(시공사, 2011)·『라쇼몽』(문예출판사, 2008)·『거미줄』(현대문학, 2006)·『아쿠타가와 작품선』(범우사, 2000)이 그것들인데, 제이앤씨에서 출간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 1』(2009)에 유일하게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두 권짜리 전집에 든 것이니, 대표성이 없다고 할 밖에.
「손수건」의 선정은 무척 의외였지만, 읽고 나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수긍이 간다. 일본인들은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일본적 양식’과 ‘혼’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예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사도武士道다. 그런데 아쿠타가와는 무사도 연구가로 유명한 니토베 이나조를 모델로 한 이 작품에서, 무사도가 일본 고유의 양식이거나 혼이기는커녕, 어느 문명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연기술일 뿐이라고 논평한다. 아래는 이 작품을 선정한 이호철의 해설이다.
기독교 신자이며 무사도 연구가로서 유명한 니토베 박사의 무사도 고취를 비판한 소설인 「손수건」은, 이미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뿌리박혀서 인습으로 되어 있는 사상을 유연한, 자유적인 입장에서 비평한 것으로 우리는 문명 비평가로서의 아쿠타가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정大正 시대의 자유정신, 회의주의가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러한 사상 비판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작품 해설의 마지막 단락인 위 대목의 아쿠타가와에 대한 평가는, 늘 작가의 이름과 붙어 다니는 아쿠타가와 최대의 대표작 「라쇼몽」의 회의주의와 일치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의 역본이 나와 있는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는, 한때 할리우드 서부극이 한국의 어린 영화광들에게 미국 개척 시대의 ‘건맨’을 향한 판타지를 품게 했듯이, 미국 사람들에게 사무라이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 주었다.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1999)이 그런 경우였다.
『손수건 外』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죽은 자의 사치」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남녀 대학생이 의과대학의 해부용 시체 창고에서, 시체 옮기는 일을 하게 된다. 「죽은 자의 사치」는 죽음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허약성을 드러낸다. 먼저 삼십 년 동안 시체실을 지킨 관리인의 말이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땐 신기한 느낌이 들더구만.” 하고 관리인이 말했다. “날마다 죽은 사람을 수십 명씩 보며 돌아다니고 그중 새것을 수용하고 하는 게 내 일이거든. 그런 내가 새 인간을 하나 낳는다는 게 이상하더란 말야. 헛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는 시체를 늘 보며 지내기 때문에 온갖 일이 헛되다는 걸 잘 알지, 아이가 병이 나도 의사한테 가지 않았어. 그리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으니 난 가끔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말야.”
하지만 관리인과 달리, 낙태에 필요한 수술 비용을 벌기 위해 시체실을 찾아왔던 여학생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지금 말에요, 난 애기를 유산시키지 않고 낳을 생각을 하던 참예요. 그 알콜 욕조 속의 시체들을 보고 있으면 말예요. 어쩐지, 애기는 죽더라도 한번 태어나서 뚜렷한 피부를 가져보고 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죽음은 인간으로부터 의식을 빼앗아 물질로 환원시킨다. 아직 새내기 작가였던 오에 겐자부로는 이 작품을 통해 ‘의식으로부터 물질’로의 환원 과정 속에 감금된 인간 조건을 거듭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몇 종의 역본이 나와 있는 『개인적 체험』은 이 시기를 결산하는 작품인데, 이 장편 소설의 주인공 ‘버드’가 보여준 심리 변화는 「죽은 자의 사치」에 나오는 여학생의 심리 변화에 포개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