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3일
허경진의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웅진북스, 2002)를 읽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어렸을 때 한자로 지은 시를 뽑아 싣고, 거기에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선비들이 어릴 때 지은 한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만들면서 편역자가 가장 고심했던 것은 “몇 살까지를 어린아이로 볼 것인가?”였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지금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고, 열다섯 살이면 관례를 치르고 시집 장가도 갔다. 다산 정약용은 열 살 이전에 지은 글들만 모아서 문집을 냈고, 아홉 살에 요절한 조갑동 또한 그때까지 지은 시들을 모아 유고집을 냈다. 이처럼 뛰어난 아이들은 열두어 살부터 생원 진사시에 응시해 합격했으며, 공자가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던 나이에 벌써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열 살이 지나 지은 시들은 너무 많아, 편역자는 열 살 이전에 지은 시로 한정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편지와 일기를 모두 한자로 썼으니, 시도 한자로 지었다. 아이들의 한자 습득은 다섯 살 때 『천자문』으로 시작해서, 『추구』·『동몽선습』·『소학』을 차례대로 배우며 시와 문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서 『천자문』이 글자를 배우기 위한 교재였다면, ‘뽑아서 엮었다’는 뜻의 『추구推句』는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위해 엮은 책이다. 오언五言으로 이루어진 두 구절 또는 네 구절로 된 대구對句를 모아 놓은 이 책은, 외워서 정서를 함양하고 사고력을 발달시킬 뿐만 아니라 대구를 통해 저절로 시 짓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이를테면,
東西日月門 南北鴻雁路
동과 서는 해와 달의 문이요,
남과 북은 기러기의 길이네.
같은 구절을 외우면 동서남북의 방위와 아울러 한시 작법의 기본 원리인 대구를 익힐 수 있다. 오언으로 된 위의 두 구절 가운데, 1절의 ‘동서’와 2절의 ‘남북’, 1절의 ‘일월’과 2절의 ‘홍안’, 1절의 ‘문’과 2절의 ‘로’는 짝이다. 이런 오언 문장을 외워두면 적당할 때 그대로 외워서 쓰거나, 필요에 따라 몇 글자를 바꾸어 자신의 시로 삼을 수 있다.
자, 그러면 실습. 다섯 살 난 김시습이 시를 잘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세종대왕이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궁궐로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이 시 한 구절을 던졌다.
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소나무 위에서 춤추는 듯하구나.
위의 일절을 완성시키는 원칙은, 이미 말한 것처럼 앞서 나온 단어들의 짝을 일일이 맞추는 것이다. 김시습이 곧바로 읊은 대구는 이렇다.
城主之德 黃龍?碧海之中
임금님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에서 뒤척이는 것 같네요.
김시습은 말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인 두 살 때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추구』의 일종인 『초구抄句』를 익혔다. 그런 연마가 있었기에 ‘동자’와 ‘성주’, ‘학’과 ‘덕’, ‘백학’과 ‘황룡’, ‘청송’과 ‘벽해’ 같은 명사뿐만 아니라, ‘춤추다’와 ‘뒤척이다’ 같은 동사와 ‘위’와 ‘속’이라는 부사까지 완벽하게 짝을 맞출 수 있었다.
한시 작법의 기본적인 원리인 대구의 비밀을 알고 나면, 직제학直提學 김천령이 어릴 때 보여준 시재詩才도 이해할 수 있다. 어린 김천령이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겨 있는데, 손님이 시 한 구절을 짓고서, 할아버지에게 대구를 채우라고 했다.
雲收天際高輪月
구름 걷힌 하늘가에 둥근 달이 높은데,
할아버지가 얼른 답하지 못하자, 천령이 할아버지 어깨를 두드리며 “할아버지! 왜 이렇게 짓지 않으세요?”라고 졸랐다.
風定江心一葉舟
바람 멈춘 강 가운데 조각배 하나.
‘구름’과 ‘바람’, ‘거두다’와 ‘멈추다’, ‘하늘’과 ‘강’, ‘가’와 ‘가운데’, ‘고륜’과 ‘일엽’, ‘달’과 ‘배’가 모두 짝이다.
지은이는 이름난 선비들이 어렸을 때 지은 시들을 소개한다는 단순한 목적보다 더 큰 포부를 갖고서 이 책을 엮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시제(첫 구절)를 주고 아이가 대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짐은 물론, 아이 스스로 적절한 대구를 찾으며 우주나 사회 질서를 관찰하고 깨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