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0일
로버트 W. 메리의 『모래의 제국』(김영사, 2005)을 읽다
2001년 9.11테러를 당한 직후, 미국에서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제국 논쟁’이 기승을 부렸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하버드대 교수가 2003년 1월 <뉴욕타임스>에 쓴 어느 기고문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대변해준다. 그는 거기서 “제국 이외에 어떤 단어가 현재 미국을 그토록 잘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라며 ‘미국이 제국’임을 반어적으로 확정했다. 이때 미국의 우익, 특히 극단적인 우익인 네오콘은 신이 났다.
9.11이 뒤늦은 계기가 되긴 했지만, 지구상의 유일한 초강국으로 미국이 ‘세계 경찰’이라는 짐을 져야 한다는 정세 조성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연이어 소비에트가 해체된 1990년부터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인들은 아무도 2003년 당시와 같은 장밋빛 제국 논쟁을 하지 않는다. 2007~2010년 사이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9.11을 기점으로 하면 겨우 6년, 소비에트가 무너진 때로 소급하더라도 채 20년이 되지 않아 제국의 위신을 뿌리째 망가트렸다. 전 세계인들은 오늘도 미국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그 이유는 미국이 국제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던 때와는 정반대다. 전 세계인은 초강대국인 ‘미국의 독선’이 아니라, 자신의 안녕을 위해 ‘미국의 파산’을 관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로버트 W. 메리의 『모래의 제국』은 조지 W. 부시와 네오콘 일당의 ‘제국의 꿈’이 아직 사그라지기 전인 2005년, 골수 공화당 지지자의 펜 끝에서 나온 제국 비판서이다. 지은이는 부시와 네오콘이 지향하는 제국주의가 미국인들이 수호해온 전통적 가치와 어긋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가 ⅰ) 역사철학적으로나 ⅱ) 외교 정책적으로나 미국이 추구해 온 가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ⅰ) 서구의 역사철학 내지 문명론은 크게 진보론과 순환론으로 구분된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게서 나온 진보론은 “정치체제와 법제도가 인간성과 도덕성도 바꿀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주장”(J.B. 베리)에 의해 추동되며, 진보의 끝에 유토피아가 성취된다. 프랑스에서 발원한 진보론은 그 후 온갖 계파로 퍼져 나가,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가와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를 낳았다. 하지만 변형이 어떻든 간에, 진보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진보론이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보론은 암암리에 유럽문화를 보편적인 문화로 전제하고 비유럽문화권은 유럽문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은근히 견지하고 있다. […]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모든 문화는 각각 자기가 설정한 가치의 눈금과 프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종교적·인종적 편견을 바탕에 깔고 다른 문화와 문명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만일 유럽중심적인 진보론이 여타 문화·문명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유럽인들은 진보론이 서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인류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주장해왔다. 만일 이 가치와 여타 문화·문명이 충돌한다면 진보론의 보편성이란 것도 설 자리가 없는 것 아닌가? 혹시 진보론은 사회과학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서구우월주의 또는 오만함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프랑스 사상가들이 발명한 진보론을 영불해협 건너편의 영국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의 지성인들은, 사회제도 개혁을 통해 인간 본성을 개혁하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유토피아를 구가할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논지를 ‘위험한 생각’ 또는 ‘난센스’로 간주했다. 존 로크나 에드먼드 버크 같은 영국의 사상가들은, 같은 나라의 역사가 J.B. 베리가 “영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제도와 안정에서 구원을 찾고 변화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라고 했던 것처럼, 프랑스 지식인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 없이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선함에 대한 낙관론’을 거부한 영국인들의 생각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역사의 진보’같은 프랑스의 지적 풍조에 대해서 거의 몰랐던 200여 년 전 미국 지식인들은, 관념적인 진보론 대신 극히 현실적인 전제 아래 정치를 운영했다.
진보론의 반대편에 순환론이 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로 대표되는 이들의 역사철학은, ① 세계에는 유럽 문명 이외의 여러 문명권이 있으며(슈펭글러에게는 8개, 토인비에게는 21개), ② 모든 문명은 흥·망·성·쇠를 피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사람은 역사 진보론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으며, 특히 토인비는 역사가 어느 하나의 문명으로 수렴되는 ‘진보의 환상’을 거부했다. 그는 서구문명 또한 지구상에 명멸했던 수많은 문명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단 하나의 역사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그 역사의 지류가 되거나 모래 속에 흩어져버린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개념”이라고 본다.
지은이는 이 책의 첫머리에 개진된 진보론과 순환론이라는 역사철학의 잣대를 가지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 편의 문서를 명확하게 정리한다. 세 편의 문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1989)·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3)·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1999)이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역사의 종말』은 진보론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역사는 완료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논문은 자유민주주의의 결정체이자 수호자인 미국이 최종적인 승리자며, 세계는 미국의 전리물(?)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는 듯하다. 당연히 미국인들은 이 문서를 열렬히 환호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문명의 충돌』은 후쿠야마의 선배격이랄 수 있는 우파 이념가가 순환론의 입장에서 『역사의 종말』을 반박하고자 한 문서다. 새뮤얼 헌팅턴은 후쿠야마와 달리 서구의 쇠퇴와 냉전 종식 이후 더욱 다극화·다원화되는 세계상을 그린다. 슈펭글러와 토인비의 비전을 공유하는 그는 서구 문명의 보편성을 부정하며, 비서구 사회가 근대화될 때 “필연적으로 서구화될 것이라는 세계화 진영의 주장을 거부”한다. 오히려 근대화는 비서구문명을 강화시키면서 서구의 상대적인 힘을 감소시킨다고 말하는 그는 “기본적으로 세계는 점점 근대화되면서 덜 서구화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진보론과 순환론 논쟁에 뛰어들어, 진보론을 다시 한번 널리 퍼뜨린 문서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은 ‘3개의 민주적 엔진’이 세계화를 진행시킨다면서, 기술의 민주화·금융의 민주화·정보의 민주화를 들었다. 제목과 달리 매우 공격적이고 극우적인 이 책은, 미국이 세계화의 주역인 동시에 심판관이 되어야 한다면서 “미국이 국제사회의 헤게모니를 쥐지 못하면 아메리카 온라인도 없다”, “보이지 않는 손도 보이지 않는 주먹이 없으면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프리드먼에 대한 지은이의 반박은 이렇다(후쿠야마를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음).
프리드먼은 인간의 본성과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경제와 물질 상위에 존재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정신은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대로 무엇을 먹고, 입고, 구매하고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회에서 인간이 물질 또는 돈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을 ‘인간성 파괴’로 간주한다.
인간 내부에는 돈과 물질을 초월한 강력한 정신적 동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정신적 동기는 종교적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과 한 다발로 묶여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많은 비서구문화권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정신적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이와 같은 인간성을 ‘별것 아닌 것’ 또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돈이나 물질에 의해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프리드먼이 역사 진보론에 빠져 있음을 입증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간본성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한 그 가설 말이다.
겉보기에 프리드먼은 각국의 문화를 중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책 제목의 ‘올리브나무’가 각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로 하는 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전세계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핵심 메시지가 “미국 사람들처럼 되시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찬양하는 미국의 다인종문화와 함께 말이다. 결국 프리드먼도 역사 진보론이 안고 있는 커다란 모순점에 봉착한다. 다름 아닌 유럽중심주의다. 게다가 프리드먼은 그보다 더 심한 미국중심주의를 금과옥조처럼 껴안고 있다.
지은이는 역사철학적으로 볼 때, 미국은 진보론적 사유와 거리가 멀며, 역사나 인간에 대한 비낙관적인 사유가 미국의 외교 정책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본다.
ⅱ) 미국이 건국 이래로 고립주의를 선택해 왔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도 어폐가 없지는 않다. ‘미국 고립주의’를 강조하게 되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벌인 스페인과의 전쟁이나 멕시코와의 국경 전쟁을 은폐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미국의 정치나 외교에서 ‘팽창주의/ 국제주의/ 개입주의’에 맞선 고립주의는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4가지 계열을 가지고 있다. ① 미국의 힘이 모든 인류를 위해 전세계에 행사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또는 인도주의적 개입주의 ② 미국은 순수하나 세계는 퇴락했으니 미국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악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보수적 고립주의 ③ 세계는 순수하나 미국은 그렇지 않으므로 미국의 세계진출은 악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자유주의적 고립주의 ④ 미국은 중대한 국익과 서구문명의 이익을 위해서만 세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보수적 개입주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처럼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던 제⑤의 노선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외교정책은 항상 보수적 고립주의(②)가 우세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미국이 오래 망설였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보수적 개입주의(④)로 전향했을 때, “첫 사상자는 보수적 고립주의였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막대한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을 지게 된 미국은, 자유주의적 또는 인도주의적 개입주의(①)를 선택하도록 내몰렸다. 예컨대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전형적인 보수적 개입주의가 가미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은 예상 밖에도 자유주의적 고립주의(③)를 출현시키면서 막을 내렸다. 까닭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의 자유주의적 개입이 명분을 잃고, 미국이 “세계의 순수하고 힘없는 곳에 독을 뿌리는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줄곧 추구한 것은, 미국은 중대한 국익과 서구문명의 이익을 위해서만 세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보수적 개입주의였다.
보수적 개입주의는 현실정치와 세력균형 외교를 높이 평가했고, 이에 따른 정책의 목표는 오로지 미국의 국익과 서방세계의 보호였다. 이러한 신념은 1941년부터 89년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고, 당시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단극체계를 꿈꾸지 않았다. 미국은 패권적 야망 없이, 오로지 소련 지상군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고, 전세계에서 서방세계의 이익을 수호하며, 전략적 요충지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보수적 개입주의에는 미국을 소말리아나 발칸으로 이끌었던 인도주의적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50여 년에 걸쳐 보수적 개입주의를 고안하고 발전시킨 이들은 미국이 현안, 즉 소련 공산주의와의 싸움에만 군사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의 야망(그것이 비아프라의 기근을 해소하는 것이든,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든 간에)을 갖는 것은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 동구권과 소비에트가 패망하는 것에 고무되고, 또 미 국무부 정책실 차장 출신이자 네오콘 말류였던 후쿠야마의 사이비 논문에 ‘뽐뿌질’을 당한 미국은 “외교의 1차 과제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라는 원리를 망각했다.
지금 미국 외교의 현실인식은 착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미국 외교의 코 위에 ‘진보론’이라는 색안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당면과제는 어떻게 이 역사 진보론의 색안경을 걷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미국이 쓰고 있는 저 ‘색안경’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2005년, 재임에 성공한 부시 2세의 취임사 가운데 “전세계의 폭정을 종식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로 민주주의의 성장을 추구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말이 그것을 잘 웅변해 주며, 그것의 우리나라 식 메아리는 “이라크 전쟁은 원래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라는 복거일의 개그다.
지은이는 부시 2세를 “역사 순환론 대對 진보론 논쟁에 뒤늦게 뛰어든 지각생”으로 보면서, ‘세계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그의 신념을 ‘선교사적 민주주의’ 내지 ‘선교사적 외교’ 혹은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라고 비난한다. “냉전적 멘털리티를 갖고 있는 주변 참모들과 아랍에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네오콘의 엉터리 주장에 넘어간 부시 대통령은 9.11 이후 미국을 대재앙으로 끌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네오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들고 있는 역사 진보론에 현혹돼, 이라크전이라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역사 진보론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제도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이며 문화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 미국은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역사 진보에 남다른 사명이 있는 국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시가 벌인 두 나라와의 전쟁은 이제 개가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미국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전쟁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기는커녕, 두 나라와 전세계에 이슬람근본주의를 산종하는 것으로 마칠 가능성이 크다(미국은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완수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미국의 패전으로 끝난 게 아닌가?). 지은이의 더 신랄한 비난을 보자.
현재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만으로 이슬람권 한복판에 수십만의 미군을 주둔시켜 놓았다. 그는 이슬람 한복판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른다. 그가 취한 조치로 인해 미국은 지금 역사상 아마겟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위험한 상태다. 부시는 자유의 확산과 민주주의 전파라는 정치적 희망에 근거해 미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네오콘을 비롯해 미국 지식인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역사의 종말, 자유의 확산, 민주주의 이식 같은 일련의 관념은 한결같이 어설픈 현실감각에 기초한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들이다.
9.11 이후 미국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외교정책과, 역사 진보론이라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전통적인 외교정책인 보수적 개입주의와 반관념론적 현실주의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심겠다며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 미국의 오판이었다고 말한다. 종교적 열정에 취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과 달리, 아랍민족주의와 현실세계에서의 부와 권력을 추구했던 사담 후세인은 전혀 성격이 다르며, 때문에 미국이 필요한 원활한 원유수급과 알카에다에 대한 정보를 놓고 후세인과 거래를 계속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망을 가진 독재자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는 않으며, 앞으로 미국은 “독재자=세계평화 위협”이라는 공식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국가를 향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서 출발한 정책이 “자칫 세계평화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네오콘들이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야망을 무조건 억눌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내부 정치구조와 인권문제를 들춰 중국을 공격”하고 있지만, 중국 문제가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보수적 개입주의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는 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한다고 고언한다.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가장 미국적인 보수주의 신념에 투철한 지은이는 이 책 제9장에서 네오콘을 ‘그때그때 말이 다른’ 기회주의자들, 기본적인 철학이 없는 자들로 간주하며, ‘이념과 도덕’에 매몰되어 미국의 국익을 전혀 계산하지 못한다고 공박한다(그는 이 책 말미에 실린 옮긴이와의 대담에서, “공화당은 2008년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할 것이며 “네오콘은 2009년 이후 거의 사멸단계”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견했고,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은이의 보수적 실용주의자로서의 면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한 대목을 보자.
미국이 전파하고자 하는 민주주의가 중동에서 반드시 미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에 의해 이슬람근본주의에 기초한 반미정권이 수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동에 ‘자유’를 전파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
위 대목은 해석하기에 따라 지은이를 야비한 인물로 여기게 만든다. 하지만 저 대목은 “미국은 전 지구적인 패권에 대한 야망을 갖지 말아야 한다”라거나, “세계화의 적은 세계화다”라고 말하는 지은이의 다른 육성과 어울려, 제국이라는 과부하를 힘겨워 하는 미국의 ‘출구전략’으로 해석할 여지도 준다.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뜻과도 통하는 이 책의 원제 ‘Sand of Empire'를 생각하면 더욱 그런 심증을 굳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