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7일
복거일의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 2009)를 읽다
이 책은 “빠르게 늘어나는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점점 자주 그리고 깊이 침해되는 현상”을 다룬다. 지은이는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침해되는 현상을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화란 강대국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가 강한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이웃에게 점차 자국의 이익을 양보하게 되는 과정으로, 20세기에 핀란드가 러시아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주권의 손상을 입으면서 생존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용어다.
러시아와 핀란드의 경우처럼 두 나라의 힘이 차이 나게 비대칭적일 때, 강대국은 ‘지배적 정책’을 고르고 약소국은 ‘묵종적 정책’을 택하게 된다. 묵종적 정책은 ‘적응적 묵종’이라는 다른 말로도 불리는데,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적응적 묵종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있다. 첫째는 ‘양보’. 이 전략은 약소국의 양보가 강대국의 비용-편익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즉 약소국의 양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안이 압박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보다 크다면 강대국은 압박을 멈추고 현상을 유지할 것이다. 또한 이 전략은 작은 양보를 통해, 더 큰 양보를 미리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한다. 두 번째는 ‘대항’. 이 전략은 자신의 역량을 길러서 강대국에 대한 양보를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적 대항력·군사적 대항력·시민적 대항력을 기르고 배합해야 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응적 묵종의 전략적 개념은 ‘양보’와 ‘대항력’이다. 약소국의 전략은 간단하니, 비대칭적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양보를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대항력을 한껏 키워야 한다. 양보의 크기와 대항력의 크기는 역비례한다. 우리에게 열린 합리적 선택은 중국에 대해 적응적 묵종을 하되, 협상력을 한껏 키워서, 공동의 이익을 나누는 데서 너무 밀리지 않는 것이다.
약소국의 강대국에 대한 전략적으로는 꼬투리 잡을 것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왜 새삼 대한민국의 핀란드화를 걱정하고, 유독 한반도에 드리울 중국의 영향력만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을 이렇게 마쳤다.
우리와 강대국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적 관계는 우리 시민들에겐 성찰하기 괴로운 주제다. 그래서 외면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러나 어떤 사회도 외면에 바탕을 두고 앞날을 설계할 수는 없다.
지은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월터 래커의 말을 빌려, 핀란드화에 따른 적응적 묵종이 불러오는 가장 나쁜 것은 “사회의 도덕적 변질”이라고 말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힘센 이웃이 신뢰하는 후보만을 고위 공직에 선출하거나, 언론을 검열하는 ‘국내 조정’을 쉬지 않고 행한다. 그러면서 국가의 구성원 전체가 현실 도피와 위선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중국에 의한 핀란드화를 한껏 우려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보다 미국에 의한 핀란드화를 먼저 겪었고, 현재도 그것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사회의 도덕적 변질이 ‘핀란드화/적응적 묵종’의 가장 나쁜 폐해라면, 대한민국의 미국화Americanize만큼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킨 것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중요한 국가 정책이 미국의 이익과 합치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는 관행이지만, 국익을 위해 일을 해야 할 정치가나 고위 공직자들이 미국 정치인과 줄을 대기 위해 안달을 하거나, 아예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제5열’이 되는 것조차 불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오래된 대한민국의 미국화 때문에 도덕이 아니라 영혼까지 파먹힌 자는 “이라크 전쟁은 원래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지은이 같은 사람이다.
한국전쟁 때 남한을 도왔다는 것을 제외하고, 지은이가 대한민국의 미국화를 묵살하거나 핀란드화로 인정하지 않는 까닭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미국은 역사상 제국주의적 특질을 가장 적게 보인 제국”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미국이 행사한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선량”하며 “비공격적 특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21세기의 초강대국이 예약되어 있는 중국은, 냉전 종식 이후에 선의의 제국주의 역할을 떠맡은 미국과 달리, 유사 이후로 줄곧 제국주의를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증거로 중국이 “자신을 ‘천하天下라고 부르는 관행”을 꼽고 있다. 지은이의 이런 오해는, 곧 다른 독후감을 통해 반박하겠지만, 여기서는 이런 질문을 제출해 둔다. 백인도 아닌 것이, 도대체 한국인들은 왜 백인들이나 느끼는 황화黃禍 수위의 혐중嫌中 감정을 지니게 된 것일까?
오래지 않아 닥칠 “중국의 제국주의는 미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일방적이고 압제적이고 공격적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중국을 “가장 나쁜 형태의 제국주의” 국가로 만드는 동력으로, 변질된 공산당과 극단적인 중화 민족주의 사이의 제휴와 악순환을 든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이미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압제적 일당一黨은 “자신의 잃어버린 정당성을 민족주의를 통해서 되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경제가 발전해서 자유에 대한 중국 시민들의 열망이 커지면, 공산당 정권은 민족주의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게다가 지은이도 어디에 썼듯이,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나기까지 ‘백년국치百年國恥’를 당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들은, 다가올 굴기와 함께 지금까지 억압됐던 중화 민족주의를 한껏 과시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현상 때문에 중국이 다른 어느 제국주의보다 더 나쁜 제국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한국인들의 혐중은 두 가지 원천이 있다. 하나는 한국인들이 500여 년 동안 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해왔다는 게 원인이다. 그런 중국이 서양은 물론이고 한국인이 멸시해 왔던 일본에마저 굴욕을 당하고, 중국을 모범으로 삼았던 자신마저 나라를 잃게 되면서 중국에 대한 반동형성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생긴 혐중 감정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랄까. 다른 하나는 지은이가 대한민국의 미국화를 핀란드화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연관된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도왔기 때문에 통일을 놓치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 원천 가운데 전자는 중국의 굴기로, 후자는 1992년에 맺은 수교로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본다. 전 세계의 전문가들뿐 아니라, 미국의 전략가들마저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한국전쟁에 대한 원한으로 중국과의 수교를 반대했던 대중(시민) 운동은 없었다.
혐중 감정이 팽배해 있으면서도, 한국인들이 한중수교를 아무 반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수수께끼다. 그 이유는 첫째, 미국화된 것은 외양이었을 뿐 내면은 한 번도 중화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인들의 정신과 습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공자 왈, 맹자 왈’이었지 프로테스탄트 윤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둘째, 복거일이 부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국화에 대한, 반도인의 본능적이고 현명한 균형 잡기가 한중수교를 내심 반겼던 것이 아닐까? 이 두 가지는 워낙 주관적인 것이라서, 수수께끼의 정답은 못 된다. 그렇지만 복거일이 내놓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비현실적으로 우호적이고 낙관적이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반감이 워낙 거세다는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 인식은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말인즉, 반미감정이 중국에 대한 비현실적 우호 의식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어조나 강세의 차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앞서 든, 미국화에 대한 한국인의 균형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하므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반미감정이 중국에 대한 비현실적 우호 의식으로 전환’됐다는 지은이의 주장이 아니라, 과연 한국에 ‘반미’ 감정이란 게 있느냐는 것이다.
복거일은 중국에 의한 대한민국의 핀란드화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혈맹이 굳건히 유지되어야 한다면서, “점점 거세지는 한국의 반미주의”. “친북 세력의 조직적 반미운동”을 비난한다. 그러나 반미에도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그 가운데, 종교적 이유로 벌어지는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반미나 남미의 몇몇 나라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반미가 가장 처치 곤란한 경우다. 반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반미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 없고, 이데올로기적인 반미는 운동권 내의 자주파(NL)에 한정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반미는 ‘사건에서 기인하는 반미’로 이벤트적인 성격이 짙다. ‘효순?미선 사건’이라든지, 미군 병사의 탈선 범행이, 미국이라면 ‘껌벅’ 죽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국화 된 한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런 이벤트적인 반미는 미국 정부의 성의 있는 대처만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들로, 복거일이 말하는 조직적인 ‘반미주의’나 ‘반미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과장하자면, 한국인에게는 프랑스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미국을 조소하는 만큼의 반미 의식조차도 없다.
솔직히 말해, 세계 10위권에 바싹 다가붙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미국의 덕을 크게 봤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오늘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베트남과 이라크 파병과 같은 예서 보았듯이, 남의 ‘똥꼬’를 빠는 데는 구린내가 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꿀과 같았다. 그런데 꿀을 제공하던 자에게서 꿀은커녕 구린내만 더 심하게 풍긴다면 어떻게 할 텐가? 미국의 퇴락과 중국의 굴기는 금세기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복거일은 ‘자, 다음!’이라고 외쳐야 옳다.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는 복거일이 여태껏 자신만만하게 외쳐왔던 경제 일변도의 실용주의 노선과 모순된다. 게다가 그는 일제의 조선 통치를 근대화와 경제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찬양하는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들린아침, 2003)를 쓰기도 했던 성장 제일주의자가 아닌가?
사족: 시인 신혜정은,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서 이렇게 썼다. “미8군에 들어가 본 자와/ 그렇지 못한 자”(「평화의 눈 2」 중에서). 당신이 아무리 출세했다 하더라도, 미8군 영내 출입증이 없다면, 말짱 꽝이다. 이런 것도 다 ‘대한민국의 미국화’의 부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