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가와카미 미에코의 『젖과 알』(문학수첩, 2008)을 읽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중편과 콩트를 연상시키는 「당신들의 연애는 빈사瀕死」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방확대수술을 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언니와 조카가 사흘 동안 도쿄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머무르러 온다. 수술을 하려는 언니의 현재 직업은 호스티스로, 연말이면 마흔이 된다. 조카를 낳자마자 곧바로 이혼을 했던 언니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는데, 본업으로만은 생활을 꾸릴 수가 없어서 저녁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이제는 호스티스가 직업이 되었다. 언니와 함께 온 조카는 딸인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는 반년 전부터 말을 하지 않고, 필담으로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고 한다.
언니는 동생에게 유방확대수술에 대한 각종 정보를 늘어놓고, 말을 하지 않는 조카의 노트에는 생리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젖과 알」인데, 젖은 ‘유방’을, 알은 ‘난자’를 뜻한다. 마흔을 바라보는 말라깽이 여자가 가로늦게 유방확대수술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거기에는 대책 없는 노년에 대한 불안이 서려 있으며, 남자(남편)에게 버려졌다는 박탈감이 도사리고 있다.
조카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는 유기불안 때문이다. 조카는 이렇게 썼다.
[…] 나는 가슴을 부풀리는 게 싫다. 귀찮아서 싫다. 그런데 엄마는 부풀리고 싶어서 전화로 유방확대수술 이야기를 한다. 병원 사람과 이야기한다. 무슨 이야길 하는지 몰래 다가가서 들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요, 라는 늘 하는 대사에 모유를 먹여서요를 덧붙였다. 매일매일매일매일 전화한다. 매일 바보다. 내게 먹여서 없어진 모유가 있던 곳에 다른 것을 넣어서라도 그걸 부풀리고 싶은 걸까. 낳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으면 차라리 안 낳았으면 좋았잖아. 엄마의 인생은 나를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잖아. 모두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을. 난자와 정자. 그걸 맞추려는 짓을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더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언니는 자신의 불행을 조카 탓으로 돌린 모양이고(“검어. 내 유방은 검고 커. 알아. 내가 예쁘지 않다는 건 […] 나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렇게까진 아니었어.”), 언니가 전화로 유방확대수술을 열심히 문의하는 것을 보면서 조카는 극심한 유기불안을 느꼈다. 아마 조카는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유방확대수술→재혼→버려짐’.
언어를 거부하는 조카의 방어기제 속에는, 고단한 상징질서(사회)로부터의 도피심리도 함께 섞여 있다.
[…] 태어나면 끝이다. 살아서 계속 밥을 먹고, 돈을 벌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만으로도 고달픈 일이다. 엄마를 보면 매일 죽도록 일하고도 매일이 힘들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싫은데 그 속에서도 다른 몸을 꺼내다니,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정말로 멋지고 근사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그렇게 판단한 것일까? 혼자서 이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몹시 우울해졌으므로, 나로서는 좋은 일이 아닌 게 확실하다. 게다가 생리를 한다는 것은 수정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임신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이런 식으로 먹고 생각하는 인간이 늘어난다는 것인데, 그 생각을 하면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나는 절대 아이 같은 건 낳지 않을 것이다.
이튿날, 언니는 도쿄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면서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집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밤늦게 술에 취해 돌아온 언니는 10년 동안 만나지 않았던 남편을 만나고 왔다.
이제 술에 취한 언니가 조카에게 말을 ‘말을 하라’고,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는 것은 소설의 정석이다. 조카는 이모가 내버리려고 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유통기한 지난 계란을 양손에 쥐고, 제 머리를 치면 말한다. 언니까지 가세한 이 장면은 가슴이 찡한데, 부화되지 못한 계란은 수정되지 못한 난자의 다른 모습이다.
유방확대수술에 집착했던 언니나 대화를 거부했던 조카는 모두 사회나 가장의 보호 없이 맨살로 내던져 있다. 그런 사정은 이 작품의 화자인 ‘나(여동생/이모)’의 처지마저 암시해 준다. 화자는 도쿄에 온 지 5~6년째이지만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초입에 “생각하면 할수록 오사카의 모녀는 성가시고, 무겁게 덮쳐 온다”던 화자 역시, 두 모녀와는 다른 무엇엔가 들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