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4일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욥기―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말씀』(나눔사, 1989)을 읽다.
하느님이 악마에게 신실한 욥을 자랑하자, 악마가 ‘당신이 뭘 주니까 따르는 거지, 그걸 다 빼앗아 보라. 그러면 그자가 당신을 욕할 것이다’라고 토를 달았다. 발끈한 하느님이 ‘그러면 네가 마음대로 한번 해봐라. 그러면 내가 뭘 베풀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다’라고 욥을 악마의 손에 부쳤다. 욥은 하느님과 악마 사이의 내기에 걸려,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그는 악마의 예상과 달리, 하느님을 욕하지 않았다.
욥이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절친 세 명이 멀리서 찾아온다. 엘리바즈·빌닷·소바르가 그들이다. 이들은 욥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번민에 빠트린다. 세 친구는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욥에게 ‘자신도 모르는 죄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욥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느님이 이런 재앙을 내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가 믿는 것은 ‘인과응보론’으로, 그것은 「욥기」가 쓰여질 당시 가장 유력한 교리였다. 아마 그것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종교적 사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해방신학의 창시자이자 대표적 이론가인 구티에레즈는 기독교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인과응보론적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것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잘못된 접합을 비판한다.
이것은 광대한 소유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도 구미에 맞는 교리였으며, 이러한 소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체념과 죄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교리다. 교회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교계의 특정한 경향은 풍요로움을 정직과 근면함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하고 가난을 죄 많고 게으른 사람들에 대한 징벌로 간주하는 윤리적 교리에 계속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다른 한편, 모두 알고 있듯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역사적으로 이 교리의 편리함을 사용했었다. 처음에는 가끔 사용했지만, 요즈음에는 보다 미묘한 형태로 사용한다. 교리를 이렇게 교묘히 다루는 것은 가르침에 대한 모든 비평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점을 계속해서 중요하다고 왜곡시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필연적으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윤리를 발생시킨다.(71~72쪽)
우리는 저 교리를 세속적으로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지상에서의 물질적 성공이 곧 구원의 징표(은총)라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접선을 제일 먼저 간파한 사람이 막스 베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구티에레즈는 기독교에 만연한 인과응보론을 ‘우상숭배의 미묘한 형식’이라고 본다. ‘하느님을 믿으면 복(잘살게) 받는다’거나, ‘현세에서의 성공이 하느님의 은총(구원)을 미리 입증해 준다거나’라는 것은 모두 물신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세 친구와 욥은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했는데, 욥이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면 할수록 세 친구의 신앙은 흔들렸다. 욥의 확신은 그들이 여태껏 믿어온 바로 그 인과응보론적인 신앙과 합치되지 않았다. 만일 그의 삶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가난과 질병은 왜 그를 덮쳤는가? 욥은 하느님이 부당하다는 것만 알 뿐,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 친구나 마찬가지로 욥 또한 인과응보론이라는 교리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의 번뇌는 가중되었다. 욥이 친구들에게 하소연한다.
그런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네.
자네들이 한다는 위로는 기껏해야 괴로움을 줄 뿐,
그 헛된 말은 끝도 없는가?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
자네들이 내 처지에 있다면
나도 분명히 자네들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네.(16:2~5)
그의 친구들이 현세적인 인과응보 교리를 계속 주장함에 따라 욥은 똑같은 논리로 반박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의 경우는 제쳐 두고, 왜 사악한 사람이 번창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나도 그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네.
몸에 소름이 다 끼치네.
악한 자들이 더 오래 살며
늙을수록 더 건강하니 어찌 된 일인가?
자식들이 든든히 자리를 잡고
후손들이 잘 사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지 않는가?
그들의 집은 태평무사하여 두려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없지 않는가?(21:6~9)
[그들은] 일생 행복하게 지내다가
고요히 지하로 내려가더군.
기껏 하느님께 한다는 소리가
“우리 앞에서 비키시오.
당신의 가르침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소.
전능하신 분이 다 무엇인데 그를 섬기며
무엇 먹을 것이 있겠다고 그에게 빌랴!”
이런 악인의 등불이 자주 꺼지던가?
재난이 그에게 떨어지던가?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시던가?(21:13~15, 17)
참 맞는 말이다. 인과응보론대로라면, 욥이 저처럼 고난을 당하는 이유도 다 자신이 모르는 죄가 있어서이고, 이명박 장로의 재산이 380여 억이나 되었던 까닭도 결코 BBK 따위가 아닌, 우리가 모르는 선행을 그득히 쌓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 친구는 자신들이 욥에게 했던 똑같은 논리로 욥이 역공을 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욥이 세 친구의 인과응보론을 반박하는 이 대목에서부터 「욥기」는 성서에 되풀이되어온 ‘무고한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에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고소’라는 또 하나의 흔한 전통으로 돌아간다. 이제 욥은 자신의 고난을 잊고,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권력자와 부자들을 공박한다.
악한 자들은 지계표[땅의 경계표식]를 멋대로 옮기고
남의 양떼를 몰아다가 제 것인 양 길러도 좋고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
과부의 소를 저당 잡아도 되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밀쳐내니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들은 아예 숨어야 하는가.
들나귀처럼 일거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행여나 자식들에게 줄 양식이라도 있을까 하여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저 모양을 보게.
악당들의 밭에서 무엇을 좀 거두어 보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줍는 가련한 신세.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밤을 새우고
덮을 것도 없이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몸,
산에서 쏟아지는 폭우에 흠뻑 젖었어도
숨을 곳도 없어 바위에나 매달리는 불쌍한 저 모습을 보게.
아비 없는 자식을 젖가슴에서 떼어내고
빈민의 젖먹이를 저당 잡아도 괜찮은가.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나들이를 해야 하고
빈창자를 움켜잡고 남의 곡식단을 날라야 하는 신세,
악인들의 돌담 사이에서 기름을 자며
포도 짜는 술틀을 밟으면서 목은 타오르고
죽어가는 자의 신음 소리와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 하시네.
악인은 떳떳한 생활을 꺼려하여
밝은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따라 살려고도 않는 자들,
해만 지면 살인자들이 활개를 치며
빈민과 가난한 자들을 죽이려 찾아다니고
밤만 되면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24:2~14)
구티에레즈는 이때 욥의 울부짖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욥기」 자체를 권력과 부를 독점한 라틴아메리카의 특권층에 대한 항의로 독해하고 있는 지은이는, 욥을 ‘무고한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론적인 개인이 아니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으로 간주한다.
욥기서를 이렇게 읽으면서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상황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가난한 자―말하자면 다수의 민중들―가 고통받는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에 나의 주의를 집중시킬 것이다. […] 욥이 스스로 열정적으로 주장했던 결백은 강요된 고통과 죽음의 상황 한가운데서 억압받는 무고한 신앙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이라는 상황 또한 염두에 두려고 노력했다.(22~23쪽)
욥이 무고한 자의 고통을 양산하는 권력자와 부자들을 비난하자, 소바르가 맞장구를 치며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악한 짓거리를 길게 나열한다. 그러면서 예의 인과응보론을 되풀이하며 끝낸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긁어모은 재산에 얽매여 꼼짝없이 망한다네.
남아날 것 없이 마구 집어삼키고
어찌 자기의 영화가 오래가리라고 믿겠는가?(20:20~21)
그 뒤를 이은 엘리바즈 역시 소바르가 나열한 부자들의 악행을 욥에게 적용하기를 시도하면서, 다시 한번 인과응보론에 따라 욥의 회개를 촉구한다.
자네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지 않은가?
한 피 받은 동기의 재산을 마구 빼앗고
헐벗은 이의 옷을 벗기며
기진맥진한 사람에게 물 한 모금 주지 아니하고
굶어 죽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더니,
주먹이 세다고 하여 땅을 차지하고는
세도가 있다고 하여 그 차지한 땅에서 거들먹거리며
과부를 알몸으로 쫓아내고
고아들의 팔을 꺾더니 (22:4~9)
그러자 욥은 인과응보론을 밑자리에 깐 엘리바즈에 맞서 이렇게 대답한다.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는 빈민들,
의지할 데 없는 고아를 내가 건져 주지 않았던가?
숨을 거두며 하는 마지막 축복은 모두 나에게 쏠렸고
과부의 서러움은 나에게서 기쁨으로 바뀌었네.
정의가 나의 옷이었으며,
공평이 나의 두루마기요, 나의 면류관이었는데…
나는 소경에게는 눈이었고
절뚝발이에게는 다리였었지.
거지들은 나를 아버지로 여겼으며
낯선 사람들도 나에게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네.(29:12~17)
욥은 “가난한 사람을 모독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모욕함이다”(잠언 17:5)라고 번번이 강조하는 성서의 전통을 따라, 가난한 이를 보살폈다.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덧붙인다.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의무는 가난한 자들이(마치 현세적인 인과응보의 교리가 암암리에 선언하듯이) 하느님의 징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친구라는 것을 뜻한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107쪽)
인과응보론에 맞서 자신의 성실함을 고집했던 욥은 세 친구로부터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난데없이 엘리후라는 논쟁자가 나타난다. 세 친구들이 인과응보론에 기대어 욥을 위로하고 설득하려고 했다면, 욥과 아무런 면식이 없는데다가 젊은 혈기를 지닌 이 논쟁자는 욥을 가르치고 심판하기 위해 왔다. 그는 인과응보론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성과 완벽성을 거론한다.
사람이 모를 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은 이런 길도 저런 길도 있다오.(33:14)
엘리후의 등장은 「욥기」를 또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엘리후에게 공박을 당한 욥은, 불에 기름을 붓듯이 더욱 도전적이 되어 인간과 논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 토론하기를 원하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 욥 사이의 대면이 이루어진다.
구티에레즈의 「욥기」 해석은 두 개로 압축된다. 하나.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불사하는 욥의 도전적인 태도로부터 민중의 저항할 권리를 본다. “성서에서 불평은 희망을 제거시키지 않”(217쪽)듯이, “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은 불평하고 저항할 권리”(222쪽)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 인과응보론은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 품에 던지는 대신 하느님을 손아귀에 쥐려고”(168쪽) 만든 인간중심적이고 편의적인 교리일 뿐,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다. 이 대목이 내가 갑작스럽게 중단한 예의 「욥기」의 ‘또 다른 차원’일 텐데, 매우 신학적인 논의라 여기서는 두 개의 인용만 남겨둔다. ①“하느님의 자유, 은혜, 창조적인 사랑과 하느님을 가두려는 인과응보의 교리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한다.”(193~194쪽). ②“인과응보의 교리는 타당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즉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 행동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조차도 보상과 징벌이라는 편협한 도식에 짜 맞추어질 때 왜곡된다.”(212쪽) 여기 내가 생각한 것을 덧붙이자면, 「욥기」에서 인과응보적 사유는 원래 악마의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자유’를 구속하고자 했다.
지은이는 욥에게 내려진 고난이, 그 시대에 누구나가 사로잡혀 있었던 인과응보론을 극복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본다. 구티에레즈에게 「욥기」는 인과응보의 교리의 벗어나기 위한 텍스트이며, 그런 욥의 노력이 오늘의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희망의 진로를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사족: 「욥기」는 원래 시였다는 데에서 착안해 지은이는 운문으로 편집된 「욥기」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