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일
김영섭의 『오디오의 유산』을 읽다
동화책과 장난감은 아이들 차지다. 그런 것들은 어른이 되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동화책과 장난감이 필요하다. 오디오 잡지, 자동차 잡지, 카메라 잡지 등이 바로 어른들의 동화책이고 장난감이다. 아이에게도 그렇듯이, 어른들에게 동화책과 장난감은 싱싱한 꿈을 솟아나게 한다.
김영섭의 『오디오의 유산』(한길사, 2008)은 출간된 순간부터 내 동화책이고 장난감이 되었다. 이 책 이전에는, 허제의 『허제의 명반산책 1001』(가람기획, 2001)이 그 역할을 했다. 허제의 책은 내가 클래식에 입문하던 마흔 살 때에 입수하여, 근 8여 년 동안, 닳도록 들춰보았던 책이다. 매일 새 음반을 사 들고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그 책을 넘겨보았다. ‘이 음반은 언제 잡아 올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보통 클래식 입문자들이나 음반 수집가들은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현암사, 1991)을 참고서로 삼지만, 일단 그 책은 동화책이 아니다.
동화책은 그림이 많고, 읽을 게 적어야 한다. 뿐 아니라, 그림 옆에 적혀진 글을 읽지 않더라도 감흥이 줄지 않아야 하고, 무엇인가 상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오디오의 유산』은 최고의 동화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많은 글이 인쇄되어 있지만, 나는 그걸 관심 갖고 읽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아예 동화책이 되고자 가로와 세로가 3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판형으로 만들어졌고, 매 쪽마다 훌륭한 사진이 가득 실려 있다.
여기에 실려 있는 오디오는 모두 지은이가 현재 가지고 있거나, 한 번씩 사용해 보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허제의 명반산책 1001』처럼 ‘분발해야겠다!’라는 각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한순간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런 전투욕은 좀체 생겨나지 않았다. 여기 나오는 명기들은 어느 것 하나 내가 만만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선은 가격 면에서 그랬다. 그리고 함부로 쓸 수 있는 몇 천만 원의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평생 알현하지 못할 옛 기기도 많다. 그걸 갖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정열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막 속에 우물이 있다.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명기들 속에, 나도 사 본 게 있고, 써 본 것이 있다. 이 책 313쪽에 나오는 엠파이어598 턴테이블이 그것이다. 이 제품은 1997년쯤, 대구의 건들바위 근처에 있는 오디오점에서 50만 원에 샀다. 집에 오디오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나는 꼭 이 쪽을 펼쳐서 보여 주는데, 찾기 좋으라고 아예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이마저 없었다면, 이 동화책은 얼마나 잔혹했겠는가?
언젠가 취미에 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취미의 본질을 ‘공공연한 이중생활'이라고 보았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이중생활이라면 기혼자의 불륜을 꼽는데, 실은 취미야말로 어느 것보다 악질적인 이중생활이다. 불륜과 취미가 다른 것은 전자가 남에게 들키지 않게 은밀히 행하는 것이라면, 취미는 아예 드러내 놓고 한다는 것. 아주 뻔뻔스럽다.
불륜이 항상 누군가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을 지는 반면, 취미에 빠진 자들은 언제나 결백을 주장한다. 딴은 ‘나는 적어도 다른 여자(남자)를 만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디오나 음악 취미의 경우, ‘나의 취미는 술이나 도박처럼, 건강을 해치거나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나쁜 취미와는 다르다'는 자부심마저 더해져 더욱 당당하게 군다. 그럴 뿐 아니라, 이 투명한 이중생활자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자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핍박받는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들의 동호회는 결속력이 높다.
공공연한 이중생활에 남편(아내)을 빼앗긴 배우자는 그것만으로도 억울한데, 거기에 더하여 남편(아내)의 공공연한 이중생활을 잘 보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마저 하게 된다. 스스로를 이해심이 모자란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오디오나 음악과 같은 공공연한 이중생활에 빠진 남편(아내)을 바라보는 배우자의 심정은 거의 지옥이다. 배우자를 꼬드겨 낸 상대가 사람이라면 머리채라도 잡아 뜯겠는데, 이놈은 실체가 없는 ‘취미’라네!
어떤 경우, 취미는 그 사람의 상처이기도 하다. ‘나 말야, 어릴 적에, 전축이 있는 옆집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어.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했거든…’ 혹은 ‘음악이 너무 듣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거든…’. 어떤 사람의 취미가 그 사람의 상처나 결핍과 연관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취미를 미워하기 어렵다. 취미 삼아 살인을 저질렀던 유영철 정도면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그 지경이 아니고서는 오히려 이해하고자 노력하거나 최소한 면죄하거나 방기하게 된다.
바둑이든 등산이든 낚시든, 취미는 외설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오디오나 음악취미는 열거한 취미보다 더 외설스럽다. 바둑을 제외한 등산이나 낚시는 그나마 저 외설스러운 이중생활을 밖에서 한다. 무형의 애인이 집 밖에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오디오와 음악 취미는 무형의 애인을 아예 집 안에 들여 놓는다는 것. 이만큼 뻔뻔하고 외설스러운 세계도 또 없다.
공공연한 이중생활은 배우자를 안심시키면서, 자신만의 ‘사적 연애'를 맛보기 위한, 자유의 행사이다. 그래서 한 번씩 동행은 하되, 배우자가 그걸 같이 하자고 넘보면, 이중생활로서의 취미는 열기가 식는다. 때문에 오디오나 음악 감상에 미친 사람들은, 좌우 스피커와 삼각 꼭지를 이루는 청취실 복판에 아예 단 하나의 의자만을 놓아둔다. ‘내 의자는 왜 없어?’라고 묻는 ‘배우자-타인’에게 그가 내놓는 답변은 안 들어도 뻔하다. ‘최적의 음질을 들을 수 있는 스위트스폿sweet spot은 한 점밖에 없거든.’
남녀 관계가 위계적이어서 아내는 남편의 취미에 무력하기 일쑤지만, 남편은 아내의 취미를 단속한다. 워낙 부부관계가 평등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불안감 내지 독점욕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미는 물론이고, 아내가 종교를 갖는 걸 극구 방해하는 남편도 많다.
나는 이 책의 지은이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오디오 애호가들의 시청실에서 억대에 가까운 소리를 귀동냥해 보았다. 거기서 들을 때는 흥감하지만, 그 체험은 여행과 똑같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곳에 갔더라도 집에 돌아와서는 ‘우리 집이 최고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몇 시간 전에 지은이의 집에서 음악을 듣고 왔는데도, 나는 내 오디오의 소리가 더 좋더라(동화책에 푹 빠졌다가도 금방 현실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능력은 마술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술적인 능력이 없다면, 아이들은 모두 정신분열을 앓을 것이다. 어른은 아이가 자란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