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9일
미키 기요시의 『독서와 인생』(범우사, 2011, 2판, 범우문고 242)을 읽다.
범우사에서 나오는 월간 <책과 인생>을 꽤 오랫동안 받아 보았다. 『독서일기』를 거기서 낸 연으로 출판사가 보내준 것이다. 미키 기요시의 『독서와 인생』은 그때 받아본 잡지에 분재된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연재물만큼은 꼬박꼬박 챙겨 읽었다. 그런데 오늘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의 판권란에 ‘초판 2007년’이라는 출간 연도를 보니, 그때서야 분재를 마치고 단행본이 나왔나 보다.
지은이의 이름과 약력은 차츰 잊혔지만, 그때 읽은 몇 대목은 철학책을 읽는 데 큰 향도가 되었다.
철학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색의 근원성根源性’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철학자의 저서는 수많은 아류亞流가 쓴 것보다 본질적으로 알기 쉽다. 사색의 근원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은 그 언저리의 책보다 알기 쉽다. 일반적으로 고전이 되는 것에는 ‘천재적인 단순성’과 같은 것이 있다. 해설서보다 원전原典이 결국 이해하기 쉽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경험하는 일이다. 따라서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사색의 근원성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확실히 생각하고 쓴 것은 이해하기 쉽다.(128쪽)
고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또한 항상 원전을 읽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해설서나 참고서를 읽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전을 중심으로 그것에 의존해야 한다. 원전은 언제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책이다. 예컨대 플라톤이나 칸트와 관련해 천 가지 문헌을 읽어도 원전을 읽지 않으면, 그것을 되풀이해 읽지 않으면 깊이 근본적으로 배울 수 없다. 제삼자가 쓴 해설서보다 원전이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한층 더 이해하기 쉽다. 많은 참고서를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원전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 결국 그것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게다가 원전은 종종 해설서보다 짧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원전을 읽는 것은 독서를 단순화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다. […] 책이 남이 읽어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 스스로 읽을 필요성이 원전의 경우에는 절대적이다. […] 사람은 언제나 원천源泉에서 퍼 올려야 한다. 원천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하다. 원전을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다.(147~148쪽)
위의 두 대목은, 나에게 해설서를 모으는 버릇을 없애 주었고, 원전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1897년에 태어난 지은이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를 읽고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졸업 후, 니시다 기타로가 있는 교토대학 문과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도쿄] 제일고등학교를 나와 교토의 문과에 진학하는 학생은 없었다. 내가 처음이었다.”(15쪽)
교토대학을 졸업한 지은이는 몇 개 대학에서 1년 동안 강사를 하다가, 1922년에 독일 유학을 떠난다. 하이델베르크에 자리 잡은 첫해에 그는 하인리히 리케르트를 사사하며 역사철학을 연구했다(지은이는 철학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자신을 철학으로 이끌어 준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와 함께, 리케르트의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을 애써 권하고 있다. 『독서와 인생』이 1942년에 출간된 옛 책이라, 여기 나오는 책들은 철학사에서 소멸된 것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마르부르크로 옮겨가 하이데거로부터 배웠다. 지은이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 “나 자신은 하이데거 교수님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79쪽)고 말하는 데, 귀국 이후의 진로는 오히려 하이데거를 떠나 마르크스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미키 기요시는 일본 공산당에 자금을 제공하고 반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감옥에서 죽었다). 지은이는 이 책 곳곳에서, 하이데거 철학이 유행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그 당시 이들의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던 횔덜린을 비롯해 니체,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깊이 공감하며 탐독하게 된 것은,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가서 하이데거 교수님 밑에서 배우게 되면서부터였다. 하이데거 교수님의 철학은 그런 ‘전후 불안’의 표현이었다.(74~75쪽)
그 무렵의 독일은 완전히 정신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횔덜린이 유행하는가 싶더니 한편으로 간디 등이 환영받고 있었다. […] 하이데거 교수님의 철학 자체도 이런 불안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의 철학은 니체, 키에르케고르, 횔덜린 등이 유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고, 여기에 그 철학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이유가 있었다.(84쪽)
인용한 두 대목 말고도 비슷한 구절이 더 있지만, 『독서와 인생』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과 그 뒤를 따른 일본에서 왜 ‘불안의 철학’이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없다. 지은이 자신의 독서 편력과 독서법, 그리고 철학에 대한 일반인의 궁금증에 간략히 답하고자 했던 이 책에는, 그런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래의 대목은 짧고 우회적이지만, 충분한 대답이 되고 있지 않은가?
마르부르크 시절 이래 내가 경험한 이른바 불안의 철학이나 불안의 문학이 몇 해 뒤에는 일본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몇 년 뒤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나 독일에서처럼 하나의 요소, 즉 마르크시즘의 유행이 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순서다.(92~93쪽)
‘불안의 철학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어야 한다’는 위의 명제가 뜻하는 바는, 불안의 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반정립antithese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이마르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과 일본의 부르주아들은 ‘마르크스만 아니면 무엇이라도!’라는 심정으로 미키 기요시가 말하는 ‘불안의 철학’을 받아들였고, 불안의 철학이 열어 놓은 뒷문으로 구세주인 양 들어 온 것이 바로 나치즘(독일)?파시즘(이탈리아)?군국주의(일본)였다는 말이다.
사족이다. 나는 다양한 책을 읽지만, ‘독서’에 대한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 ‘밥줄’ 가운데 한 가닥이 독후감을 쓰는 일이라서 기신기신 이걸 쓰고는 있지만, 내가 제일 경멸하는 독자는 ‘독후감 따위를 모아 놓은 책’을 읽는 독자다. 이를테면 내가 쓴 『독서일기』 류 같은 책. 그런 내게 독서에 관한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해 보라면 바로 이 책, 『독서와 인생』을 권하고 싶다. 독자들이 지은이의 독서론을 직접 만나보라고 더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이 얇고 값싼(3,900원) 책에는 진정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지침이 적혀 있다. 약점이라면 워낙 오래된 책이라, 여기에 언급된 많은 책이 유물이거나 고서라는 것. 하지만 원래 이 책은 장모가 쓴 『독서일기』류의 ‘독후감 모음집’이 아닌데다가, 바로 거기서 우리는 책과 사상의 시대적 한계나 소멸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와, 더더욱 책을 정선해서 읽어야 할 이유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