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7일
김호경의 『바울』(살림, 2009, 살림지식총서 377)을 읽다
바울의 출생 시기는 대략 예수와 비슷하며, 예수가 죽은 후 2~3년이 지난 32~33년 정도에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62~64년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유대 문화는 헬라화(그리스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정통적 유대세계와 이방세계를 오가며 자랐던 바울은 ‘헬라적 사고를 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로 훈련받았다. 그가 훗날 ‘이방인의 사도’가 된 데에는 두 세계에 속했던 이런 성장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바울의 특이점은 뭐니뭐니해도, 예수의 종교개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수가 초대교회를 시작했을 때, 예수는 여러 유대교의 종파 가운데 한 ‘묵시적 소종파’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런 이유로는 동족으로부터 박해받을 까닭이 전혀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들 역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테두리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전하는 것과 자신이 전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반율법적(반유대교적)이었던 예수는 자신의 보속을 통해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약속했다.
예수의 복음은 유대적 정결법을 비롯한 율법의 허위를 폭로하며 유대인들의 믿음을 흔드는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보여준 행위와 선포된 말씀은 매우 도발적이었으며 유대인들의 거룩함을 보증해 주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과 같은 듯 보이지만 확실히 다른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름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유대인에게 한정된 구원을 이방인들에게로 확장시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리새파 율법을 착실하게 배웠던 율법학자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할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눈이 멀게 되고, 그 상태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을 한다. 소위 이것을 ‘바울의 회심’이라고 부르는데, 이 회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맞물려 있다. 이전의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바울은 종종 ‘사울이라고 불리던 바울’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의 원래 이름 사울은 ‘가장 높은 자’라는 뜻인 반면, 바울은 ‘가장 낮은 자’라는 뜻이다. 자신의 이름을 바꾼 행위는,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되곤 하는데, 거기에는 음미해야 할 다른 사항도 있다. 유대 이름 사울이 헬라어로는 사울로스Saulos로 발음되는데, 헬라어 사울로스는 매춘부의 이완되고 방탕한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의태어다. 바울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방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유대적 이름을 바꾼 바울의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초기교회는 오늘날의 기독교 교파만큼이나 다양했는데,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12사도들 역시 비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적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편이었다. 예수와 함께 있었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12사도는 그들의 특별한 지위로 초대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한 번도 예수를 보지 못했던 바울에게는 매우 불리한 싸움이었다. 이방인에게 유대적 율법을 얼마만큼 준수하게 할 것인가, 또 그리스도교를 이방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개방할 것인가는 초대교회의 민감한 문제였다. 그 흔적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집사’라는 직분이다. 집사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행하는 일들을, 이방인 신자에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할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유대적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을 ‘거짓 형제’라고 부르며,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 내세운다. ‘칭의론/의인론’으로 불리게 될 이것은, 바울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단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을 비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자 안에서 할례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였다. 할례와 율법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정결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의인과 죄인을 끊임없이 나누었다. […]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이런 구분과 차별을 철저히 부정한다. […] 바울은 예수가 이미 폐하여 버린 인간 사이의 오래된 장벽을 다시 세우는 인간의 지난한 노력을 비난하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복음의 이러한 구조적 특징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빠질 수 있는 일상적인 악의 고리에서 믿음의 본질을 찾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