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5일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읽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문학사상사, 1995, 2판)는 황순원의 초기 장편과 후기 장편 사이에 끼어 있는 작품으로,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접점 삼아, 역사적 현실과 밀착해 있었던 초기는 개인적(실존적) 현실로 관심을 돌리는 후기로 넘어간다고 한다. 1960년 1~7월 사이, <사상계>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이 나올 때, 말미가 대폭 수정되었다. 문학사상사본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 해설을 쓴 김병익은 해설에 딸린 주1)에서, 말미가 대폭 수정된 연유를 이렇게 적었다: “<사상계>의 연재 시에는 주인공 현태의 자살로 끝났으나 책으로 출판될 때는 자살마저 포기할 극도의 무기력 상태임에도, 계향이의 자살 방조로 무기형의 검사 구형을 받는다는 것으로 끝냄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열어 놓았다. 이 개작은 4.19 이후의 어떤 가능성의 기대에 그가 침윤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1·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1부는, 휴전협정을 앞둔 어름의 중동부전선에서 시작한다. 대학을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출전한 동호·현태·윤구는 학도병 출신이라는 동질감 하나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전투 중에는 서로를 보살폈고, 전투가 소강일 때는 함께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현태와 윤구가 스스럼없이 하는 ‘색시집’ 출입이 동호에게는 고역이었다. 그에게는 대학교에서 사귄 숙이라는 애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 년 전, 동호가 입대하기 전날 밤, 해운대 호텔에서 밤을 지새웠다: “새벽녘에 잠이 들 때까지 수없이 되풀이된 이 억제가 얼마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어쩐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는 숙이의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네는 영원히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짐승 같은 욕망을 억누르고 그녀의 순결을 지켜줌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는 이 ‘마초적’인 시나리오. 작가는 동호의 입을 통해 “어째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방에 나란히 누워 자면서 그 행위를 불순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묻는데, 불순한 것은 성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성 윤리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문제를 파고들 경황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전후에 나온 대개의 한국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실존’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인민군에게 부모가 몰살당했던 목사의 아들 선우 이등상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란 있는 것두 아니구 없는 것두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있기두 하구 없기두 한 것이다, 있다구 믿는 사람에겐 있구 없다구 생각하는 사람에겐 없는 거다, 누구나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자유가 있다, 모든 게 사람에게 달렸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지배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재미있게도, 동호가 말했던 그 ‘불순한 행위’를 맴돈다. 그는 숙에 대한 자신의 순수했던 사랑에 반복해서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현태가 소개해준 술집 작부 옥주(최명애)에게 빠져든다. 이제 동호는 숙에게서 온 편지뭉치를 몽땅 불태우며 “좀 더 홀가분한 기분이 되구 싶어. 좀 더 홀가분한 기분이 되구 싶단 말야”라고 되뇌게 된다. 옥주의 말처럼, 사랑이란 다 “말라빠진” 것이며, 남아있는 것은 지워져 가는 “몸뚱이”뿐이다. 이제 동호에게는, 불시에 그녀를 만나러 나간 날,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는 두 남녀를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일만 남았다. 언젠가 현태가 말했던 것처럼 “어른이 되기란 그렇게 힘든 법”이기도 하지만, 동호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숙의 순결을 지켜줌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는 마초적 시나리오가, 옥주와 함께하는 짐승 같은 욕망의 구역에서도 고스란히 작동했다는 것. 두 민간인을 살해하고 동호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1부는 끝난다.
2부는 전쟁이 끝난 1957년, 서울의 귀거래 다방을 근거지로 한 ‘토요회’ 이야기다. 회원은 현태·윤구·석기인데, 현태와 윤구는 전우고, 새로 등장한 석기는 현태와 중학교 동기다. 전쟁터에서는 고작 명령에 따라 적을 죽이고, 술 마시고, 여자를 껴안는 실존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데 반해, 일상적인 도시는 주인공들에게 더 많은 실존의 기회를 주는 듯해 보인다. 작가는 현태의 입을 빌려,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맡겨진 무한한 실존을 “자유가 너무 많은 데서 오는 과잉상태가 아니구 자기에게 주어진 자율을 처리하지 못해서 생기는 과잉상태”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실상 그들이 누리는 무한대의 실존은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는 게 고작이다. 명령에 따라 적을 죽이는 일은, 구직求職이나 성공이 대신한달까? 2부에서도 많은 일화는 성에 집중된다. 현태는 윤구의 애인인 미란을 잡아채어 임신을 시키고, 낙태수술의 후유증으로 죽게 만든다. 또 옛 애인의 전우를 찾아온 동호의 애인 숙을 성폭행해서 역시 임신을 시켰다.
현태는 미국 유학에 필요한 수속을 모두 마치고 출국을 며칠 앞둔 날, 석기를 불구로 만든 건달들을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고 단골 술집을 찾는다. 거기서 주인에게 매를 맞고 “죽구 싶어요”라고 말하는 어린 작부 계향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단도를 건네주며 자살을 부추긴다. 충분히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이 일로 말미암아, 현태는 자살방조와 교사죄로 무기징역을 구형받는다. 검사의 공소 사실을 일일이 시인하는 그의 모습에서 카뮈가 창조한 뫼르소를 연상하게도 되지만, 온갖 위악을 행했던 현태는 이런 류의 인물로는 한국 문학의 계보에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야 할 주인공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취미” 또는 “외로운 거야”라는 말버릇으로 정당화하는 현태는, 전후에 나온 대개의 한국 소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설익은 실존주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하지만 중첩된 1부 31쪽과 2부 140쪽의 일화는, 현태의 위악이 결코 박래품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원산지 표시다. 전쟁은 어른이 되지 못한 그들을 ‘피해자’로만 놔두지 않았고, ‘가해자’로도 만들었다. 현태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한번 전쟁터에 서보구 싶어. 그러구선 죽음과 맞선 순간순간에 잃어버린 나 자신을 도루 찾구 싶어.”
이재선의 『우리문학은 어디에서 왔는가』(소설문학사, 1986)는 아이들이 등장해서 “자아와 선·악의 발견 및 성性과 죽음의 현실에 대한 돌연한 인지認知”를 내용으로 삼는 이야기를 ‘이니시에이션 스토리initiation story' 혹은 신참 소설新參小說이라고 일컫는다면서 “‘이니시에이션 소설’ 또는 신참 소설이란 이런 주인공이 미숙·무지 및 순진의 유년 상태로부터 악의 발견, 생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 발견과 사회적인 조정의 성숙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치르는 통과 제의적 소설”이라고 부연한다. 이런 소설이 확장된 것이 발전 소설 또는 교양 소설Bildungsroman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우리 현대 소설에서 신참 소설의 기본 전범으로 황순원의 「소나기」를 비롯한 그가 쓴 일련의 단편 소설을 꼽고 있다. 그러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어떨까? 내가 읽은 황순원의 장편은 모두 신참 소설이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경우, 주인공들은 “미숙?무지 및 순진의 유년 상태로부터 악의 발견, 생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 발견”을 이루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조정의 성숙 단계”로 진입하지는 못한다. 까닭은 현태가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①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거나(무기징역형), ② 그들을 받아줄 성숙한 사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향방을 따라간 한국 문학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향방은 ‘성숙한 사회’와의 조화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나갔다. 전 12권짜리 문학과지성사판 ‘황순원 전집’ 가운데 첫 회분 두 권이 나왔던 1980년 즈음부터, 한국의 ‘아이들’은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계몽(미숙·무지 및 순진의 유년 상태로부터 악의 발견, 생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 발견)을, 자신이 설계한 사회 건설과 직결하기 시작했다.
사족이다. 올해 초 『일월』을 다시 읽으면서, 황순원의 장편을 발표된 순서대로 모두 읽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초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이 어중간한 시기의 작품을 두 번째로 읽게 된 이유는, 헌책방에서 발견한 문학사상사본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표지에 쓰여 있는 아래와 같은 글 때문이다.
‘수난을 통해 구원’으로 이르는
사도 바울적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황순원 문학의 창조적 정력이
절정으로 표출되던
40대 중반기의 대표작이다.
6?25를 다룬 최초의 본격 장편!
이 중에서도 “사도 바울적 진실”이란 문구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유는, 몇 달 전에 읽고 아직도 독후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김곰치의 장편소설 『빛』(산지니, 2008) 때문이다.
『빛』은 근래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지만,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바울에 대한 해석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바울에 대해서 좀 더 알고나 쓰자고, 쉬엄쉬엄 바울에 대한 책을 모으고 있는 도중에, “사도 바울적 진실”이란 문구를 보게 된 것이다. 문학사상사는 저 문구를 이 작품에 해설에서 뽑아 왔다.
[숙은] 애인의 자살과 자기를 범한 남자의 파멸을 보았고, 그 파탄들이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 피해자들과 같은 열에 서 있음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수난을 통해 구원으로’의 사도 바울적 진실을 작가는 이 여인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입영 전날, 해운대 호텔방에서, 동호의 욕망과 손길을 끝내 다독인 것은, 그에게 책임 의식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던 숙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강간한 현태를 용서하고(수긍하고), 무기징역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사도 바울적 회심(진실)에 해당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