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2일
안톤 빠블로비치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읽다
흔히 체호프의 작품은 기승전결이 불분명하고 사건이 없다고 하지만 『벚꽃 동산』만큼은 분명한 전제가 주어진 작품이다. 즉 6년 만에 파리에서 귀국한 류보비 부인에게, 영지 차압공고가 날아든 것이다(『벚꽃 동산』, 열린책들, 203쪽). 이렇듯 전제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전통적인 기승전결을 결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문제 제시에 따른 일사불란한 해결 노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류보비의 가족들은 벚꽃 동산이 경매에 부쳐진 현실을 외면하고, 동산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충고를 무시한다(202~203쪽, 204쪽). 그래서 여러 차례 해결방법을 제시했던 로빠힌은 “당신들처럼 경솔하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219쪽)다고 힐난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을 읽는 우리는 현실 대응 능력이 없는 몰락한 지주 계급의 무력한 한숨을 듣게 되며, 몰락해가는 자신들의 처지를 지나간 영화榮華의 기억으로 막으려고 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연이어 보게 된다. 그중에서 특히 동산이 경매에 부쳐진 날 막연한 낙관과 기대 속에서 벌어지는 연회는 무기력과 모순의 절정이다(3막 전체).
『벚꽃 동산』을 읽으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모티프는 ‘책’과 관련한 것들이다. 이 작품 속에서 책과 연관된 모티브는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많아서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벚꽃 동산’을 뺄지언정 이 모티브를 빼면 작품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다. 막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인상적인 지문을 볼 수 있다.
여전히 ‘어린이 방’이라 불리는 방. 문 하나는 아냐의 방으로 통한다. 곧 해가 뜨려는 새벽. 이미 벚꽃이 핀 5월이지만 동산에는 아침 서리가 내렸고, 춥다. 창문틀은 닫혀 있다.
촛불을 든 두냐샤와 책을 든 로빠힌이 들어온다.(193쪽)
독자/관객이 『벚꽃 동산』에서 처음 보게 되는 인물과 행동은, (촛불을 든 하녀 두냐샤를 제외한) 책을 든 로빠힌이다. 그런데 로빠힌이 누군가? 벚꽃 동산을 소유한 지주댁(류보비家)에서 대대로 봉사했던 농노의 자식으로 “매나 맞고 배우지도 못한”(245쪽), “배운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다가, 글씨마저도 돼지가 쓴 듯 엉망”(221쪽)인 사람이다. 그런데도 로빠힌은 늘 책을 껴안고 산다.
꼬마 농부……. 사실 아버지는 농부였어. 그런데 나는 이렇게 노란 조끼에 노란 구두를 신고 있으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한 격이지……. 정말 돈이 많은 부자이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농부는 농부거든……. (책장을 넘긴다)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읽다가 잠이나 들지.”(194쪽)
아버지는 류보비가의 농노였으나 상인으로 자수성가한 로빠힌에게 책은, 계급 사회를 엄격히 구획하는 진입 장벽이다. 책으로 상징되는 귀족 계급(지배 계급)은 몰락 중이지만 로빠힌에게는 그들 세계에 대한 향수가 있다. 종내는 벚꽃 동산을 차지하게 될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에게 없는 ‘문화 자본’일 것이다.
책에 대한 강박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성격이다. 등장인물 각자가 어떤 식으로 책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류보비: 오, 나의 책장(202쪽)
가예프: 이 동산은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다고.(203쪽)
이 책장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204쪽)
나는 이 책장 앞에서 연설을 했어.(211쪽)
뜨로피모프: 아마도 나는 언제나 대학생일 겁니다.(209쪽)
[러시아의 인텔리들은]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을뿐더러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224쪽)
에삐호도프: 나는 성숙한 사람이라서 여러 가지 훌륭한 책들을 읽고 있지만…(215쪽)
당신은 버클리를 읽어 봤나요?(216쪽)
삐시치끄: 니체……철학자……그 위대하고 유명하다며……대단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232쪽)
이런 예는 차고도 넘는다. 로빠힌은 농노의 자식이었던 주제에 “오필리아여, 수도원으로 가시죠”(227쪽) 같은 어울리지 않는 비유를 쓰고, 무도회에 온 역장은 연회장에서 톨스토이를 낭독한다(239쪽). 또 부랑자들은 네끄라소프의 시를 읊는다(226쪽).
책·책장·시·대학생 등은 모두 책의 세계를 이루는 계열체로, 류보비가로 대변되는 구세대(신분사회, 귀족사회)의 몰락과 책의 세계의 무력함은 『벚꽃 동산』에서 서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시야를 잠시 작품 밖으로 넓혀보자. 안정된(억압적인) 세계는 항상 안정된(절대적인) ‘책의 세계’를 가진다. 서양 중세와 성서, 같은 시기의 동아시아 유교 경전은, 그 시대의 안정과 질서를 상징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지식인도 응분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한 세계가 다른 세계로 이행할 때, 제일 먼저 흔들리는 것은 그 시대를 유지해 주었던 참조서reference다. 『벚꽃 동산』은 그런 참조서에 의지했던 전통적 지식인이 새로운 사회 변동에 대처하지 못하고 ‘살처분’되는 만화경을 보여 준다.
사정은 이랬지만, 류보비 가족에게 책은 그들 계급을 지켜주는 최후의 신부神符다. 동산이 매각되고 여행길에 오르기 직전, 막내딸 아냐의 대사는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그 신부에 다시 한 번 그들의 미래를 의탁한다. “[…] 나는 시험 준비를 해서 학교에 입학하겠어요. 그런 다음 일을 해서 엄마를 돕겠어요. 엄마, 우리 함께 여러 가지 책을 읽도록 해요……. 그럴 거죠? (엄마의 손에 입 맞춘다) 가을밤이면 우리 책을 읽어요. 많은 책을 읽고 나면,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거예요.”(253쪽)
아냐의 공상적인 해결 방법은, 나이 먹은 만년 대학생 뜨로피모프에게서 반복된다. 그는 “인류는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면서 진보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언젠가는 익숙하고 분명해질 겁니다. 그러니 오직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찾는 사람을 정성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러시아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너무도 적습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인텔리들은 아무것도 탐구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또 그럴 능력조차 없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인텔리입네 하면서 하인들이나 농부들을 짐승 대하듯 함부로 대하고,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을뿐더러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224쪽)라고, 식자처럼 말하지만, 행동은 혀를 따라가지 못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수성가한 로빠힌에게 책은 자신의 재력에 더해야 할 문화 자본이다. 또 신흥 자본가를 꿈꾸는 또 한 사람의 야망가인 몰락 지주 삐시치끄에게 역시 책은 성공의 기술을 가르치는 처세서에 불과하다. 니체를 위대하고 대단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추워 올린 다음, 그는 이렇게 덧붙였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지. 위조지폐를 만들 수도 있다고.”(232쪽)
체호프는 ‘책의 세계’를 구세대의 상징 삼아, 그 시대가 당면했던 농노제 해체(1861년)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피르스: 불행이 있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부엉이가 울고, 사모바르도 끊임없이 덜커덩대고.
가예프: 불행이라니?
피르스: 농노 해방 말입니다.(226쪽)
하지만 모든 작가의 작품이 다 그렇듯이, 체호프의 『벚꽃 동산』 또한 ‘책의 세계’의 붕괴라는 모티브 하나만으로 저 주제를 다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살펴야 할 모티브는 커다란 사회 변혁 앞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다.
영지의 관리인인 에삐호도프는 3년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스물둘의 불행”(195쪽)으로 불리며, 뜨로피모프는 “언제나 대학생”(209쪽)일 것이라고 호언한다. 또 가정교사 샤를로따는 신분증도 없고 나이도 모르는 고아(214쪽)로 “나는 누굴까, 대체 왜 살고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일”(216쪽)이라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
이들보다 한층 재미있는 인물들은 하인 야샤와 하녀 두냐샤다. 야샤는 하인의 신분을 잊고(198쪽), 어머니를 부정하며(209쪽), 무식하고 예의 없는 조국을 비난하며 파리로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한다(240, 252쪽). 또 항상 두통을 호소하는 하녀 두냐샤는 자신을 섬세하고 고상한 귀족이라고 여기며(217쪽), “연약한 숙녀”(241쪽)라는 도취에 빠져있다.
하층 계급의 도립 현상과 함께, 한때 지배 계층이었던 류보비 가족의 퇴행도 눈에 띈다. 특히 이 작품의 첫 지문에 나오는 “여전히 ‘어린이 방’이라 불리는 방”(196쪽)이란 지문은, 류보비가의 퇴행을 가리키는 중요한 상징이다. “여기 앉아 있는 게 정말 나일까?”(201쪽)라고 말하는 류보비는 “이제 나는 어린애가 된 거야”(196쪽)라고 선언하며, 그 퇴행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동산을 배회하는 죽은 ‘어머니의 환영’을 보게 만든다(207쪽).
류보비의 오빠인 가예프는 아예 “나는 80년대 사람이다”(212쪽)라고 유세하며, 옛 추억에 푹 빠져 사는 인물이며, 몰락한 지주인 삐시치끄는 류보비가 먹어야 할 약을 삼킨다(205쪽).
네끄라소프의 시를 읽는 부랑자들처럼, 온갖 사물이 뒤죽박죽된 실상은 영하 3도에 피어난 벚꽃(195쪽), 두 시간이나 연착한 기차(196쪽), 호도를 먹는 개(196) 등의 초자연적이고 풍자적인 일상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다가 “자유의 몸이 되는 걸 원치” 않았으며 “농부들은 나리에게 의지하고, 나리들은 농노에게 의지했”(222쪽)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농노해방을 “불행”(226쪽)이라고 말하는 피르스까지 더하면, 정체성 혼란은 책의 세계의 붕괴보다 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신분과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세계는 기존의 온갖 경계와 정체성을 흐릿하게 하고 뒤섞는다. 이런 세계에서 산 자와 죽은 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마저 무너진다. 이 작품은 많은 비밀을 품고 있지만, 최고의 불가사의는 253쪽에 나오는 ‘아기의 울음’이다. 물론 그 가련한 아기의 울음은 정체불명의 샤를로따가 복화술로 재현한 것이지만, 혼란 그 자체인 신생 러시아에 대한 암시가 아니겠는가?
표면적으로 보면, 류보비 가족이 동산을 구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류보비가는 아주 노회한 수단을 보여주었다. 수양딸 바랴를 로빠힌에게 시집보내려는 책략이 그것이다. 아냐(198쪽)·가예프(206쪽)·류보비(221, 235쪽)는 번갈아 가며, 바랴를 로빠힌에게 억지로 밀어붙인다. 바랴는 결코 로빠힌을 좋아하지 않지만, 가족들이 그녀를 로빠힌에게 밀어붙일 때마다 바랴는 수동적이 된다. 하지만 로빠힌은 바랴를 선택하지 않았다. 수녀원에 들어가는 게 소망인 바랴는 류보비와 아냐가 파리로 떠날 때 혼자 고향에 남아 가정부로 연명하게 된다.
『벚꽃 동산』을 비롯한 체호프의 모든 희곡은 딱히 누구를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체호프보다 4년 먼저 출생하여 근대 사실주의 극의 기초를 놓았다는 입센의 작품과 달리,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체호프의 희곡이야말로, ‘주인공 없는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사실주의에 충실한 작품이자, 가장 현대적인 극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로빠힌은 러시아 역사의 아이러니,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대한 기막힌 은유다. 농노가 귀족의 장원을 차지하고 새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러시아 혁명이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돌아 농노의 자식이었던 로빠힌은 상업 자본가가 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팔렸던 장원(러시아)은 이제 자본주의 시장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