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1일
이강백의 『황색여관』을 읽다
이강백의 『황색여관』(범우사, 2007)을 다시 읽었다. 만약 누군가 ‘러브모텔’을 개장한다면, 이 상호로는 당최 손님이 꾀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작중의 ‘황색여관’은 어떤 경쟁자도 없는 “허허벌판 가운데” 있다.
민담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숲 속의 집’은 ‘죽음의 집antidom'을 상징한다. 폐쇄된 공간으로 설정되는 그곳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은 폭력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사후死後 세계를 경험한다.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이 바로 전형적인 ‘죽음의 집’이다. 그 반대편에 평화의 장소이며 깊은 사색의 장소이자 어머니의 품과 일체 되는 안전한 장소로서의 ‘생명의 집dom’이 있다. 시골의 외딴 집이긴 하지만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조용한 가족>과 달리 추억과 재생을 안겨주는 ‘생명의 집’이다. 이제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듯이, 황사 바람 날리는 황야에 서 있는 황색여관은 ‘숲 속의 집’의 변용이다.
막이 열리면 여관의 주인이 자신의 거처인 지하실의 뚜껑을 열고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채 “거기… 산 사람 없소?” 하고 말한다. 하지만 어젯밤 1층과 2층 객실에 가득했던 투숙객들은 밤새껏 싸움질을 하곤 죽었다. 여관 도처에 즐비한 시체를 보며 황색여관의 주인장은 “좆같이 조용하군”이라고 내뱉는다. 극 중의 여관 주인은 이 욕을 아주 버릇처럼 하는데, 이 대목은 가부장적이고도 폭력적인 이 세계의 질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라서 재미있다. 간밤의 투숙객들이 모두 죽었으니 이제 그와 그의 아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자들의 돈지갑과 귀금속을 챙기는 거다.
주인 부부가 전날 밤의 살육극을 정리하는 중에, 가방을 싼 처제와 주방장이 나타나 여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파업인가? 주인 부부는 언젠가 여관을 물려준다는 약속을 미끼로 처제의 월급을 한 번도 주지 않았고, 주방장에겐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었다. 하지만 처제와 주방장은 살육극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떠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여관 운영에 차질이 생긴 주인 부부는 처제에게 내기를 건다. 오늘 밤 처제가 투숙객의 싸움을 말려서 “손님 열 명만 살리면 이 여관을 당장 준다, 줘!” 처제는 그건 불가능하다며, 점점 숫자를 낮춘다. 다섯 명…세 명…한 명! 이 도박은 원래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맺었던 의로운 ‘열 사람’에 대한 명백한 은유다. 여기서 우리 현실의 축소판인 황색여관이 곧 소돔과 고모라이며 ‘죽음의 집’이라는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하지만 극의 중심이 되어야 할 내기는 어딘가로 실종했다. 처제의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집과 바깥(자연)은 혼연일체의 공간이었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집과 바깥은 철저히 구분된다. 바깥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이 판치는 공적인 전장戰場이 되고, 바깥의 세계가 그토록 야수적인 만큼 자본주의 사회의 가내 공간은 사적인 휴식과 친밀함의 성소가 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휴식과 친밀함의 공간인 집안이 생산기지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을 선취해 보여준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바깥이 힘겨웠던 그레고르는 잠자는 집안에서 위로를 구하고자 했으나, 가족과 집은 그것을 거부한다. 영화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조용한 가족>의 집은 자본주의의 생산기지가 되면서 ‘죽음의 집’이 되었고, <집으로>는 그렇지 않았기에 ‘생명의 집’이 되었다.
내기를 한 첫날, 처제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2층에 투숙했던 공직 은퇴자?변호사?사업가와 1층의 배선공?배관공?외판원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모두 죽었다. 극은 첫 막의 아침 풍경을 되풀이하고, 주인 부부는 전리물을 거둔다. 주방장은 어제 아침처럼 처제에게 여관을 떠나자고 재촉하지만, 그녀는 “오늘은 꼭 살릴 거”라며 떠나길 거부한다. 실망한 주방장은 어깨를 떨어트리며 주방으로 돌아간다.
이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은 여관을 떠나지 않는 처제로부터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물론 “오늘은 꼭 살”리고 말 거라고 결심하는 처제의 가녀린 존재는, 형부가 버릇처럼 내뱉는 저 쌍욕과 같이 남성적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살육의 세계와는 대척에 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황색여관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자본이 발생하는 ‘기지’(여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처제와 주방장은 문을 나서면 황사만 날리는 황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다시 말해 처제와 주방장이 이용하고픈 것은 임금투쟁에 필요한 도덕적 명분의 축적일 뿐, 애써 살육을 막거나 떠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여관은 언젠가는 그들의 수중에 떨어질 유산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이중적이다.
작가가 무대 지문에 쓴 ‘가축사육장’이란 표현처럼 오늘의 집들은 자주 모욕받는다. 앞서 ‘생명의 집’과 ‘죽음의 집’을 거론했지만 그 구분은 케케묵은 민담이나 신화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집은 그 어떤 평화도 사색도 모성적 가치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집이 자본의 축적과 생산의 전초기지라는 사실은, 사회면을 장식하는 가족 이기주의나 님비NIMBY현상이 잘 드러내 준다. 아주 흥미롭게도, 신화 시절부터 위대한 인간들은 ‘생명의 집’과 ‘죽음의 집’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아닌 방랑(여행)을 택하곤 했다(그것의 현대적인 용어가 노마드Nomad다). 하지만 『황색여관』을 보라. 잠시 황야를 헤매었다는 뜻에서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분명 방랑자이지만, 그들은 그저 2층으로 오르거나 자기 자리를 빼앗으려는 욕망의 ‘짝패’를 떨어트리기 위해서만 숨을 쉰다. 모든 길은 어김없이 황색여관으로 모이고, 승리하는 것은 지하실에 똬리를 튼 죽음이다.
집의 이상은 ‘스위트 홈Sweet Home’이다. 그런데 집이 생산의 전초 기지가 되면, 스위트 홈이 될 리 없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재택근무’가 바람직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도 있다.
스위트 홈과 생산의 전초 기지가 합해지면, 당신은 어디에 숨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