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8일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읽다
최인훈의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문학과지성사, 1992 재판)에는 총 7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장르 간의 칸막이 현상이 뚜렷한 한국 문단에서 소설가 최인훈은 완성도 높은 희곡을 쓴 드문 작가로 손꼽을 수 있다. 최인훈 희곡은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ⅰ) 모든 작품이 설화나 동화로부터 빌어 왔다는 것 ⅱ) 현대 연극에서는 거의 사멸화한 운문을 종종 도입하거나, 주관과 서정을 강조한다는 것. 그래서 그의 희곡은 시극詩劇으로 불리기도 하며, ‘읽는 희곡Lesedrama’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표제작인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앞서 말한 두 가지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 작품에 모티브를 제공한 ‘아기장수 설화’는 전국적으로 많은 이본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은 이렇게 요약된다.
① 평민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②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방안을 날아다니고 말을 한다.
③ 아이가 자라서 역적이 되리라고 생각한 부모가 아이를 돌로 눌러 죽인다.
④ 용마가 울면서 용소에 빠져 죽는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읽어보면, 최인훈의 작품이 아기장수 설화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화가 역사 이전에 그치듯이 설화에서 취채한 최인훈의 작품 역시 아기장수의 탄생 이후를 그리지 않는다. 많은 평자들은 “서사적 이야기는 미처 시작도 못된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이미원)나고 마는, 이 작품의 결말을 지적하면서, 이 작품의 시극적인 특징을 부각한다. 즉 아기장수의 탄생이 영웅의 승리나 민중 구제라는 본격적인 서사로 진행되지 않고, 부모들의 심리적 갈등으로 국한된 탓에, 갈등의 논리적 해결을 추구하는 극장르의 요건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갈등의 외면화를 거부하고, 갈등의 주체들이 논리적 해결(의 극한 정점인 절정)로 치달아가는 대신, 상반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통합하는 너무나 시극적인 결말인 ‘비극적 황홀’로 마감된다. 아이는 자신을 죽인 아버지에게 진달래 꽃묶음을 주고, 세 식구는 용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면서, 아이의 죽음을 은연중에 강제하였을 마을 사람들에게 꽃을 던진다. 즉 용서하는 것이다.
아기장수의 ‘부활-승천’을 보여줌으로써 간신히 설화와 결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은 설화에 머무를 뿐 역사로 나가지 않는 듯해 보인다. 그래서 언뜻 보면, 압제자나 좋아할 ‘심리적 화해(=비극적 황홀)’를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98~99쪽에 나오는 개똥어멈과 노파의 대화는, 백성이 원님보다 더 높아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 백성이 곧 하늘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남편의 ‘말더듬’은 여러 가지 재미난 해석을 낳았는데, 누구는 남편의 말더듬이 갈등과 행동이 모자란 시극의 약점을 보완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바, 바, 바람 소리야”, “다, 다, 다, 다, 다람쥐”, “구, 구, 구, 구, 구름 -”, “새, 새, 새, 새가 - 지, 지, 지나가는 거야”는, “바람소리야”, “다람쥐”, “구름”, “새가 지나가는 거야”가 내지 못하는 시각적 효과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람쥐’라고 하기보다는, “다, 다, 다, 다, 다람쥐”라고 말할 때, 관객의 뇌리 속에는 ‘다람쥐’가 지나가는 것과 같은 선명한 영상을 그리게 된다. 또 그 말더듬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막’ 지나가는 듯한 바람·다람쥐·구름·새가 되어 남편의 불안과 공포를 생생히 전달해 준단다.(손필영)
남편의 말더듬은 여백이 너무 많은 시극의 약점을 보완해 줄 뿐 아니라, 또 다른 상징도 갖고 있다. 우선 많은 평자들은, 이 말더듬을 권력자의 폭정과 연관시킨다. 작품 외적으로 보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발표된 1976년은 월남패망(1975) 이후 더욱 강화된 박정희 독재와 상관된다. 남편의 말더듬은 재갈 물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다. 또 작품 내적으로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가렴주구와 관련된다.
원래 이 작품 속에서 말을 더듬는 것은 남편이다. 그런데 도적의 죽음에 놀란 84쪽과 아이의 특이성을 재확인한 106쪽에서는, 느닷없이 아내가 말을 더듬는다. 이 일화는 말더듬이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심리적 장애라는 의학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말더듬과 억압을 연결 짓게 해준다. 말더듬은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호소며, 이 작품의 주요 주인공인 아버지를 신빙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보통 말더듬은 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지만,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말 더듬는 자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까닭은 말더듬 자체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피지배자의 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므로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가 달변이었다면, 이 작품은 아예 다른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남편의 말더듬은, 아기장수 설화를 과거로부터 떼어내는 효과를 자아낸다. 원래 설화란 구수하게 잘 전달되도록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진 구전 장르다. 그런데 말더듬이 설화의 장점인 구전성을 방해함으로써, 아기장수 설화를 과거의 맥락에서 떼어내 현재인 듯 드러낸다. 과거의 설화를 현재화하기 위해 말더듬이라는 ‘낯설게 하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의미가 상반된 여러 개의 쌍이 긴장을 조성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가장 희망적인 봄에 사람들은 기근에 시달리며, 아기는 생명의 상징인 씨앗조에 눌려 죽는다. 뿐 아니라 아이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부모에 의해 죽으며, 도적이 되었던 노파의 아이는 효수되어서야 “춥지도”, “덥지도”, “목이 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는 착한 내 새끼”가 된다. 또 장차 장수가 될 범상한 인물이라서 미리 제거된 아이와, 늘 “마루 끝에 앉아서 그렇게 숨차”하던 별 볼 일 없는 “해소기침쟁이”에 불과했던 노파의 아이도 한 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형식상으로 남편의 말더듬과, 아내나 노파의 반복되는 노래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
이 작품의 모티브였던 ‘아기장수 설화’는 민중들의 패배주의와 보신을 드러내는 텍스트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반인륜적인 설정을 통해, 당대의 권력이나 질서가 얼마만큼 억압적이었나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자주 ‘희생양 제의’와 연관 지워 설명되어 왔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모티브가 되어준 아기장수 설화와 예수의 생애는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절대자의 하강 → 난세에서의 짧은 생애 → 순교 → 승천’이란 예수의 일생과 아기장수 설화는 같으며, 그들의 죽음이 억눌린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희망으로 전도되는 것 또한 흡사하다.
사회가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군중들은 손쉬운 해결책으로 희생양을 찾으며, 희생양은 사회 위기의 원인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대개의 희생양 텍스트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순기능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인류가 이제껏 호도해 왔던, 사회 순기능으로서의 희생양 텍스트를 전복한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자의 무죄성을 통해 사회의 폭력적 질서를 도리어 폭로하는 게 ‘예수 사건’이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 나오는 아기장수가 희생양에게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아니면 박해의 폭력성을 드러내는지는 더 자세히 분석해보아야겠지만, 예수의 경우와는 다른 데가 많다. 참고로 이 작품이 외국에서 공연되었을 때의 제목은 「대속자Redeemer」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