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7일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읽다
1938(사르트르, 『구토』), 1942(카뮈, 『시지프의 신화』), 1950(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1953(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1961(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1969년(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부조리 연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연대기다.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는 부조리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은 목적 없는 존재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늘 부조화할 수밖에 없는데다가,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단독자다. 삶의 동기를 찾는 일의 어려움, 환경과의 부조화, 타인과의 소통 불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가진 ‘나에 대한 실감實感’을 부추긴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의 저 책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하지만 카뮈는 ‘촌놈’이라서 실존주의자는 되지 못했다).
부조리라는 현대적 개념을 창안한 카뮈나, 세계 속에 내팽개쳐진 ‘목적 없는 실존’을 발견한 사르트르는 서로 경쟁의식을 갖고 몇 편씩의 희곡을 썼다. 그들의 작품에는 부조리한 상황과 실존적인 자유 속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 속에서 실존을 확보하려는 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발견한 의식에 걸맞는 형식을 만들지는 못했다.
삶의 무의미성, 모든 이상의 끊임없는 가치저하, 의지의 원초적인 순수성에 필연적으로 소외당하는 것 등의 비슷한 감정은 장 지로두, 아누이, 살라크루, 사르트르, 카뮈 같은 극작가들의 작품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과 부조리극 작가들은 근본적인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이런 작가들은 인간 존재의 불합리함에 대한 느낌을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구성된 논증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와는 달리 부조리극에서는 인간존재의 무의미성, 이성적 직관형식의 불충분함에 대한 의식을 합리적 근거나 논증적 사고를 의식적으로 포기하면서 표현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사르트르나 카뮈는 옛 형식으로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고 있으나 부조리극 작가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그들은 전하려는 근본경험과 표현형식을 조화시키려고 한다. (철학적 관점이 아니라) 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적 인식들은 그들이 쓴 드라마에서보다 부조리극에서 더 타당하게 표현되고 있다. (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한길사, 2005, 37쪽)
사르트르와 카뮈는 부조리 연극을 거론할 때 명예로운 서두를 장식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인식을 전통적인 형식’에 담으려고 했던 탓에, 부조리 극작가로 지칭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조리 연극보다, 부조리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더 뛰어났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한 부조리 연극을 최초로 선보인 사람은 이오네스코다. 그의 첫 작품인 「대머리 여가수」는 향후 부조리극이 보여주게 될 특징이 모두 나타나 있다. ⅰ) 설명 가능한 줄거리의 부재 ⅱ) 언어에 대한 불신 ⅲ)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묘사되지 않음 ⅳ) 주제의 모호성이 그것이다.
이 경천동지할 작품 속에서 스미스 부부가 알고 있는 한 가족의 이름은 부부·자녀·조부를 통틀어 바비 와트슨이다(그들의 직업도 모두 외판원). 그리고 작중의 한 부부는 서로가 부부인 줄도 모른다. 또 자신이 왜 이 드라마에 등장했는지 모르면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소방수를 보라! 극의 말미를 보면, 연극은 아무런 절정이나 해결 없이,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될 것이 암시되고 있다.
부조리 극작가들의 작품은 대개 비슷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작가의 이름만 가린다면 이오네스코의 작품이 베케트의 작품으로 읽힐 수 있고, 베케트의 작품이 이오네스코의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두 사람 모두 희비극이라는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고전 연극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에 다가가기 위해서 장르를 엄격히 구분했지만, 이오네스코와 베케트는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장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즉 삶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사람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 인식의 결과가, 희비극으로 나타난 것이다.
「대머리 여가수」가 초연되고 난 10여 년 동안, 서구의 연극계는 ‘부조리극’이 범람했다. 이 연극 사조의 주요 작가들이 주로 파리에서 활동한 불어권 작가들인 때문에, ‘파리파派’라는 지역적인 이름이 따라붙기도 했지만, 부조리극은 차츰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 숱한 동조 세력을 만들었다. 핀터(영국)·올비(미국)·아라발(스페인)이 여기 속한다. 현재는 정색하고 부조리 희곡을 쓰는 작가나 그 시절의 작품이 왕성히 공연되지 않기 때문에, ‘50년대’의 연극 운동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처럼 연극 사조로서의 부조리극은 사멸한 듯이 보이지만, 부조리극적인 요소는 여전히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1966년에 발표된 박조열의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나, 1982년 중국어로 발표된 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이 그것이다.
사족1. 이오네스코·베케트 등의 연극이 전위연극·반연극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부조리극’이란 정식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마틴 에슬린의 책 제목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 『부조리극』에서, 언어보다 행동(이미지)에, 해결보다 질문에, 이성보다는 본능에 몰두하는 것이 부조리극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몇몇 대목 말고는 별로 신빙할 게 없다. 지은이가 부조리극의 외연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바람에, 부조리극은 두루뭉실한 ‘현대극’ 일반이 되고 말았다.
사족2. 부조리극을 개척한 공로로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베케트가 아니라 이오네스코였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루마니아는 ‘세계문학계’에 변변한 마일리지mileage를 쌓아 놓지 못했다. 반면 베케트가 태어난 아일랜드는 어떠했던가? 오스카 와일드, W.B.예이츠, 버나드 쇼, 제임스 조이스… 그들이 누적 점수를 쌓아 놓지 않았다면, 베케트가 이오네스코를 제치는 일은 어림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