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장 주네의 『하녀들』(예니, 2000)은 1933년 노르망디와 브레타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중소도시 뉴망에서 일어난, 파팽 자매의 엽기적 모녀 살인 사건에서 취채
파팽 자매의 모녀 살인 사건은 보기 드문 여성에 의한 ‘연쇄 살해’라는 점에서도 특별나지만, “자신들이 박해당했다”는 주장과 “나는 여주인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라는 어니 크리스틴 (『하녀들』의 쏠랑쥬)의 말이 사건을 계급적 복수라는 지위로 승격하고, 크리스틴과 동생 레아(『하녀들』의 끌레르)의 동성애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정신분석의 놀라운 예가 되었다.
전후 프랑스 지식계를 평정한 사람은 실존주의의 거두 J.P. 사르트르다. 그는 세 명의 절친한 친구와 시기를 나누어가며 논전을 벌였다. 메를로 퐁티, 알베르 까뮈, 레이몽 아롱. 그만큼 사르트르가 타협 없는 원칙주의자(마르크시스트)였기도 하지만, 그가 당대 지식계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르트르는 라캉이 크게 부딪힌 적이 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한 번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신분석을 부르주아들의 위로물이거나 방어막으로 보았다. 한편 라캉은 그때 막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던 때로, 그가 쓴 최초의 논문 가운데 두 편은 파팽 자매 사건과 또 다른 여성 살인자인 에매에 관한 글이다. 라캉은 파팽 자매에 관한 글을 먼저 발표했는데, 그는 두 자매의 예로부터, 그 유명한 ‘거울 단계’라는 용어의 이론적 실례를 보았다. 모녀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 두 자매는 서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상계의 분신들이었으나, 모녀 살해가 계기가 되어 동일시의 거울을 깨고 각자의 주체성을 찾게 해주었다고 분석했다. 사건 후 크리스틴은 단식 상태에서 자살을 맞이했고, 레아는 평생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살았다. 갑작스러운 분리가 두 사람에게 혼란과 상실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사르트르는 존 휴스턴 감독이 찍은 프로이트의 전기 영화 각본을 쓰기는 했지만, 주관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고, 라캉 역시 프로이트의 추종자로 여겨 그를 “부르주아 계급의 공모자”로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주재하던 <현대>지에 정신과 의사 르 기앙의 글을 싣는데, 그 글은 라캉이 주장한 것처럼 모녀 살해 사건을 “서로에게서 분리되려는 필사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체성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으로 읽었다. 그는 입주 하녀들의 자살이나 자살 기도, 정신 병원 수용의 통계 수치가 다른 범주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 하녀에게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한 수많은 주인들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파팽 자매의 모녀 살해는 계급적 요인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르 기앙은 크리스틴의 자살조차도 노동 생활의 끝없는 되풀이를 피하고자 하는 비참한 사회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주네는 『하녀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은 하녀들의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그런 언급과 별개로, 이 작품엔 하층 계급의 상류 계급에 대한 동경과 원한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언니도 알잖아. 모든 물건이 우릴 저버려.”(88쪽), “물건들은 우리한테 관심도 없다.”(88쪽), “물건들은 우리를 배반해. 물건들은 악착같이 우리를 고발해, 마치 우리가 무슨 큰 죄인이나 되듯이 말야. 하마터면 마담한테 다 들킬 뻔했어. 전화가 우리를 배반했고, 그다음엔 우리 입술이 우리를 배반했어.”(88쪽), “물건들이 하나하나 우릴 고발하는 걸 보면서 난 무서워졌어.”(89쪽)
끌레르가 사물에 대해서 느끼는 두려움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의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마담이 자신의 사치품을 하나하나 두 자매에게 선물할 때, 쑥스러워하고 죄스러워하는 두 자매의 모습은 사물로부터 소외된 두 자매의 심정을 부각해준다. “어머. 정말로 이걸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74쪽), “전 도저히 못 입겠어요. 너무 아름다워요.” 마담으로부터 사치스런 의상을 선물 받은 두 자매는 “마담은 아름다워요!”(이상 75쪽)라는 말로 물건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오히려 그것을 마음껏 소유할 수 있는 주인을 찬미한다. 그럴 수밖에. “모두가 마담 거였지”(95쪽)라는 구절도 기억해 두자.
이 역본의 번역자인 오세곤은 하녀들의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동경과 현실적 지주가 없는 환상에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 자매의 연극을 통한 ‘탈영토 전략’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노예가 주인에게 승리한다는 익숙한 변증법을 상기시킨다. 마담은 두 자매가 연극을 하던 중인 것도 모르는 채 자신은 상상력이 지나친 게 탈이나 하급계층은 “상상력이 없으니까”(66쪽)라고 단정한다. 또 쏠랑쥬가 끌레르에게 절을 하며 “네, 마담”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너희들은 농담 같은 거 모르는 줄 알았는데”(76쪽)라고 조롱한다. 하지만 현실을 극장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결국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언뜻 보면 끌레르의 죽음이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두 가지 사항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쏠랑쥬가 이 집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끌레르는 그것을 단호히 뿌리친다. 현재의 영토를 탈영토 한다는 것은, 또 탈주란 것은, 여기로부터의 도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를 바꾼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끌레르의 도피 거부는 그들의 죽음을 결코 패배로 물들이는 것이 아니다. 둘째, 끌레르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의 긴 대사 가운데 한 구절은, 이미 마담을 적대시하지도 동경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마담을 동정해요. 마담의 창백함과 마담의 비단 같은 피부를 동정하고, 마담의 조그만 두 귀와 마담의 가냘픈 두 손목을 동정해요.”(99쪽) 이 구절은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제작하면서 두뇌와 육체를 발달시켰던 노예가 언젠가는 주인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노예의 변증법을 되풀이한 거나 같다.
주네의 작품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본 희곡 대사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대사는 다음과 같다: “쏠랑쥬는 경찰의 호위 속에 커다란 계단을 내려간다. 모두들 발코니로 나와서 검은 옷의 속죄자들과 함께 걸어가는 쏠랑쥬를 보시오. 낮 열두 시. 쏠랑쥬는 9파운드나 되는 횃불을 들고 있다. 쏠랑쥬 옆에는 사형집행인이 따르고 있다. 사형집행인은 쏠랑쥬의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인다. 사형집행인이 나를 호위하는 거야, 끌레르. 사형집행인이 나와 동행한단 말야. (웃는다) 끌레르가 마지막 길을 갈 때 모였던 동네 모든 하녀들과 모든 하인들이 줄을 지어 쏠랑쥬를 호위한다. 모두 왕관과 꽃다발과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 그들은 모두 그들의 왕관을 쓰고 있다.”(99~100쪽)
인용된 끌레르의 기나긴 독백은, 연극 대사가 고양될 때, 산문이 곧바로 운문이 되는 경우를 보여준다. 주네가 명석한 무아지경(!) 속에서 썼을 게 분명한 이 구절은, ‘비극적 황홀’을 보여준다. 상반된 감정을 통합하는 비극적 황홀이 이 작품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세력의 연대로 드러난다. 사형집행인과 사형수, 이 극단적인 적대자들이 서로 연대를 말한다. 숱한 하녀와 하인들이 왕관을 쓰고 동료(하녀)가 죽는 날을 축제의 날로 바꾸는 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비탄을 승리로 바꾸는 비극적 황홀이다(내가 생략했지만, 인용된 대사의 마지막에 나오는 “경찰만이 날 이해해요. 경찰도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세계에 속해요.”라는 구절 역시 그러한데,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는 경찰과 범죄자들 사이의 ‘비극적 황홀’을 너무나 얄밉게 상업화한다. 퀜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나 맥조휘·유위강의 <무간도>가 그렇다).
하녀들이 벌이는 연극은 그들이 “치욕”(90쪽)을 의식화하는 교육 과정이며, “온 세상에 대고 우리 얘길 하는”(94쪽) 투쟁의 수단이다. 현실성을 띠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두 하녀의 연극은 폐쇄적인 놀이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옮긴이의 해석은, ‘대낮에 횃불을 든’ 쏠랑쥬의 열망을, 또 이 연극의 마지막에 단 한 번 열리는 발코니 장면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이 짧은 글에서는 더 말하지 못했지만, 하녀들의 혁명이 무산되고 만 것은, 그들이 행한 ‘연극놀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실패는, 피지배자의 욕망이 지배자의 욕망과 같았기 때문이다.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배자와 다른 꿈을 꿔야 한다. 다른 욕망을 바라야 하고,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두 자매는 마담이 욕망하는 것들을 따라 욕망하기만 하면, 모든 차이(계급적·신분적)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다. 예컨대, 당신이 오랫동안 ‘명품 계’를 부은 끝에 비싼 코트나 백을 걸칠 때, 진짜 부자들은 일부러 꾀죄죄한 옷차림을 하거나 어느 촌구석에서 발견한 ‘망태기’를 들고 나온다(이런 걸, ‘과시적 비소비’라고 부른다).
실제로 마담은 하녀들이 본받고자 하는 욕망을 간단히 팽개친다. 마담은 자신의 것을 모두 하녀들에게 주고, 하녀들이 ‘죽었다, 깨도’ 따라하지 못할 순애보의 주인공이 된다. 두 자매는 그제야 자신들의 패착을 깨닫게 되고, 죽음을 선택한다.
사족: 큰따옴표 뒤에 쪽수가 표시된 것은 『하녀들』의 것이고, 쪽수 없는 큰따옴표는 모두 레이첼 에드워드·키스 리더의 『잔혹과 매혹』(이제이북스, 2005)에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