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이희원의 『브레히트 초기시 연구』(예문, 1989)와 권정우의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열림원, 2003, 이 작품을 읽는다 002)를 읽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정지용이 문학 연구자의 이론이나 비평 속에 함께 묶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두 권의 책을 헌책방에서 함께 사온 독자의 독후감에서는 무엇이나 가능하다(이희원의 책은 이 책이 발간되었을 무렵에 처음 읽었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모은 책을 모두 헌책방으로 넘겼던 마흔 어느 때에 버린 바 있다).
브레히트(1898~1956)와 정지용(1902~1950)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괄호 속의 생몰 연대를 보면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성장해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거쳐 마르크시스트가 되었고, 정지용은 나라를 잃은 식민지의 지식인으로 살다가 독립 이후에는 민족 간에 벌어진 좌·우 이념 전쟁 속에서 죽었으니, 두 사람이 살았던 ‘동시대’란 그저 숫자놀음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희원은 김나지움(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잡지에 작품을 기고하던 때부터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가 출간된 1913~1927년까지를 브레히트의 초기 시로 본다. 우리나라에 브레히트의 시작품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광규가 번역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 1985)이 출간되면서다. 거기서 브레히트가 보여준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전체주의 독재자들에 대한 속 시원한 풍자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처럼 빈약한 비유와 평범한 어휘로 그것이 가능하다니! 하지만 브레히트의 초기 시는 무척 심심할뿐더러,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빌헬름 황제를 찬양하기까지 한다. 까닭은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123쪽)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 이전에는 신흥 중산계층의 아들답게 ‘빌헬름적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도덕·신·황제를 삼위일체로 하여, 게르만 민족주의·애국주의를 추구했던 것이 빌헬름적 이데올로기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브레히트의 초기 시에는, 그가 192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될 브레히트적 특성이 이미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거부다. 서정시는 보통 시를 쓰는 시인이 ‘서정적 무아경’에 빠져 자신과 세계를 통합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 시작품은 시인의 편에서 독자에게 작용하는 ‘진리의 표현양식’이다. 서정시의 어조와 서정시가 거두고자 하는 효과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이다.
브레히트는 전통적 서정시가 강조하는 위와 같은 ‘서정적 정조’를 포기했다. 오히려 그는 시를 쓰는 서정적 정조와 혼연일체가 되기보다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고, 서정적 자아와 세계(대상) 사이의 섣부른 융화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런 접근을 통해, 시를 읽혀지는 것에 만족하는 ‘텍스트Text’가 아닌, 독자와 상호소통하는 ‘워크Work’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시작법은 그를 20세기 연극의 혁신자로 만들어 주었던 서사극 정신과 동일한데, 그에게 예술은 ‘대상과의 거리를 통해 토론과 비판의 발판을 확보하고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시작에 임한 서정적 자아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대상과의 융화가 아닌 간격을 구하기 위해 그가 쓴 시작 기법은, ⅰ) 일상어 사용 ⅱ) 은유를 기피 ⅲ) 관용어 차용 ⅳ) 낯설게 하기 위한 외국어 사용 등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극히 친숙한 일상어나 관용어, 아울러 낯선 인공적 언어를 토대로 ‘뒤집어 보기’와 ‘낯설게 하기’ 효과를 얻자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실험했고 또 이 책의 지은이가 강조하는 ‘새로운 서정시’는 브레히트 개인의 고안물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나와 세계’를 아우르는 전통적 서정시는 자아의 도저한 자립성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자아와 세계가 별 무리 없이 융합될 수 있었던 전통 시대(고전주의)의 산물이다.
[브레히트가 처음으로 시를 쓰던 당시] 내면성이 외부세계에 반영되거나, 혹은 이 내성 자체가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장르로서의 시민적·개인주의적 서정시는 역사적으로 이미 몰락했거나 몰락해 가고 있는 주체의 서정시였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서정시에서는 자연을 자아 속으로 침잠시킴으로써 외부세계에 주체를 투영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반면, 브레히트 초기 시에서는 주체가 스스로를 소멸시킬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독점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사회가 상품적 성격에 물들고 자율적·개인적 이데올로기가 동요됨으로써 시민적 개인이 자신의 역사적 한계에 부닥치게 된 데에 있다.(25~26쪽)
한편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스물두 살 적에(1923), 자신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향수」를 썼던 정지용에게 ‘서정적 자아’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쉽게도 권정우의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는, 서정시인과 서정적 자아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조망하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새롭게, 의욕적으로 구분했던 정지용 시의 세 시기 동안, 시인은 한 번도 서정적 자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동시와 민요풍의 시를 비롯해 「향수」를 썼던 초기에 정지용이 애용했던 이항대립 구조는 서정적 자아의 우세를 보여준다. 또 「유리창 1」·「난초」와 종교시를 포함하여 『정지용 시집』이 나온 1935년 무렵까지의 중기에도 시인은 이미지즘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감정적이고 주관성이 강한 서정적 자아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여전히 그의 시는 이항대립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의 시를 지배하는 목소리는 서정적 자아였다. 마지막으로 『정지용 시집』 이후를 일컫는 후기에 와서는 동양 고전을 통한 신성과 세속의 또 다른 이항대립을 구축했으나, 자아는 끝내 동양 고전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지은이는 “정지용의 시 세계에서 이항대립은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117쪽)이었다면서, “이분법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면 세계를 보는 데 있어 서정적 자아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69쪽)고 말한다.
동시대라고는 하지만, 브레히트가 살았던 20세기는 독점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첨단을 걷던 곳이었던 데 반해, 정지용이 살았던 곳은 아직 전통적인 농본사회였다. 정지용은 아직 서정적 자아가 가능했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데다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에 살았다. 그러므로 주체라고 바꾸어 불러도 좋을 시인의 서정적 자아는 폐기될 수 없었다.
사족: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에는 정지용의 여러 시들과 함께, 지은이가 정지용의 시를 비교·해설하기 위해 전문 인용된 도연명·굴원·유종원·『시경』·두보의 시들이 나온다. 그런데 정지용의 시는 그 시들이 씌여진 시대의 철자법과 표현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중국의 시들은 현재의 철자법과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비교를 위해, 사례를 옮겨 보자.
①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② 초가 지어 마을에 살고 있으니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는다.
그대여 어찌해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동쪽 담밑에서 국화를 꺽다가
문득 남쪽 산을 바라본다.
산 경치는 저녁때가 한껏 아름답고
새들은 줄지어 돌아간다.
이런 속에 참다운 진리가 있으니
말로 표현하려 해도 이미 할 말을 잊었다.
①은 정지용의 「향수」 가운데 넷째 연이고, ②는 도연명의 「음주시飮酒詩」 가운데 제5수다. 천 년도 넘는 중국 시는 저렇게 읽기가 쉬운데,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우리나라 시는 원본을 살린다는 빌미로 천 년 전의 중국 시보다 더 읽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또 정지용 시에 한자로 나오는 ‘전설’이 원본 그대로라면, 도연명의 시 가운데 나오는 ‘남쪽 산’은 왜 ‘南山’이 아니고 ‘산 경치’는 왜 ‘山氣’가 아닌가? 정지용이 살아 있다 하더라도, 한자나 옛 철자와 표현을 고스란히 고집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잘못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이나 작품세계를 설명해주는 문학 연구자도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이런 연구자가 흔치 않다”(35쪽)라고 쓴 지은이의 철저하지 못한 신념이 아니라, 원칙을 바로 세우지 못한 이 총서의 기획위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