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24세에 요절한 G. 뷔히너는 나폴레옹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813년 독일 헤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전 작품들에 심취했던 그는 계몽주의 철학가들의 글을 탐독하면서 문학과 정치에 눈떴다. 그는 인권협회를 조직하고 혁명을 충동하는 선전물을 쓴 죄명으로 망명객이 되었고, 『당통의 죽음』(예니, 2003)은 도피 생활 중에 집필됐다.
『당통의 죽음』을 읽은 독자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와 공포정치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죽었다. 둘째, 혁명이란 아무런 원칙도 없는 파괴의 연속이며, 인간적인 혁명이란 없다. 두 개의 의문을 풀기 전에,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시아출판사, 2004)에 실린 프랑스 혁명 편을 참조하여,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로 치달아간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자.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연도만 외우기 쉬울 뿐,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다. 대개 프랑스 혁명의 발단으로 7월 14일에 일어난 바스티유 함락을 꼽지만, 실은 그해 여름보다 이른, 2년 반 전에 이미 혁명이 시작되었다. 왕실의 재정 적자와 산더미 같은 국가 채무는 새로운 조세 체제를 필요로 했고, 이것을 처리하기 위한 모임이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으로 이루어진 명사회(성직자·대귀족·소수 부르주아로 구성된 의회)였다.
하지만 명사회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만드는 일에 자신들도 참여하기를 원하는 제3계급의 요구에 부딪혔다. 제3계급의 삼부회 소집 요구는 일순 프랑스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때 삼부회 소집을 요구한 애국주의자들은 절대 왕정이 자유와 시민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전제적이고 압제적인 지배 체제라고 비난했다. 반면, 절대주의 옹호자들은 그들이 특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국민 대다수를 위한 개혁을 고의로 방해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고 정당한 왕정 대신 자기도취에 빠진 귀족들의 지배를 획책하고 있다고 맞섰다. 결국 삼부회는 바스티유 함락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소집됐고, 그것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절대왕권이 붕괴된 프랑스 내적 사건이지만, 모든 혁명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1649년에 있었던 영국혁명과 1689년의 영국 명예혁명, 그리고 1776년 미국혁명(독립전쟁)의 영향과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활약이 그것이다.
바스티유 함락이 벌어진 1789년에서부터 루이 16세를 처형시킨 1793년까지, 프랑스엔 온갖 정파가 들끓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정파는 다음의 세 개다. ⅰ) 왕정을 유지하려는 왕정파 ⅱ) 공화정을 세우려는 공화파 ⅲ) 영국식의 입헌군주국을 세우려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은 프랑스 혁명을 극본 없는 사태로 몰아갔다. 우선 그 사건으로 프랑스는 유럽 각국의 적이 되었다. 국내의 왕당파들은 외국군의 개입을 요구했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왕국은 거기에 부응했다. 외부의 위협은 당연히도 더 많은 공안을 필요로 했고, 혁명은 자기 내부에서 과격파가 온건파를 처형하는 방식으로 가열됐다. 어쩌면 공포정치는 프랑스 혁명이 국내 정치의 범위를 벗어나면서 생긴 돌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통이 과연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와 공포정치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을 수 있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그가 공포정치의 발단이 된 1793년의 ‘9월 처형’을 앞서 지휘한 사람이며, 자코뱅 당내의 과격파인 에베르파가 처형되자, 그때야 비로소 혁명이 과격화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당통의 죽음』이 발표된 1835년 이후, 많은 독일의 보수 비평가들은 뷔히너를 자기편에 끌어넣으려고 시도했다. 즉 『당통의 죽음』은 혁명의 불가능성과 혁명의 폭력성을 휴머니즘의 시각에서 파헤친 작품이라는 식이다. 독일의 보수 비평가들은 그런 독해를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고, 인간은 동류(또는 민중)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기적’ 혹은 ‘지도자’를 통해서만 시대의 혼돈과 절망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교설을 정당화한다.
이런 해석을 반박한 사람이 게오르크 루카치다. 그는 파시즘에 의해 왜곡된 뷔히너를 바로 보기 위한 에세이에서, 뷔히너가 불굴의 혁명가였음을 주지시키면서 이 작품의 역설적인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 『당통의 죽음』은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간에 이루어지는 모종의 갈등으로 시작된다. 즉 로베스피에르는 “사회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64~65쪽)는 편이고 당통은 거기에 대해 “난 이제 싫증났어. 무얼 위해 우리 인간이 서로 싸워야 하나?”(79쪽)라며 물러앉는다.
루카치는 이 갈등을 분석해 보이면서, 당통이 혁명으로부터 물러서고자 하는 이유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봉건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을 뿐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은 그의 목표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봉건제도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목표가 있었다(49, 50쪽). 이와 같은 루카치의 해석에 따르면,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아니라 혁명의 완수를 가로막거나 목표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혁명을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한정했던 사람이다.
극 구성상으로 2막의 마지막 장인 7장에 나오는 국민공회에서의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연설(102~107쪽), 3막의 마지막 장인 10장에서 시민들이 당통을 비난하는 장면, 그리고 이 연극의 최종 막인 4막의 끝이 “국왕 폐하 만세!”라는 시대착오적인 희화로 끝나는 것은, 루카치의 해석에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이 희곡을 원작으로 폴란드의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영화가 <당통>(1983)이다. 이 영화는 당통이 처형된 뒤 생 쥐스트가 로베스피에르에게 달려와서 “프랑스의 독재자가 되어주길 바라오”라는 말하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마침 잠자리에 누워 있던 로베스피에르는 가발을 벗고 있었는데, 대머리에 가까운 모습이 마치 레닌 같다.
그것이 감독의 의중이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이 마치 레닌과 같았다는 나의 착각에는, 그렇게 착각할 만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1794년 7월 테미도르 반동으로 혁명이 좌절되고 나서부터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묘사됐고, 러시아 혁명이 중앙정부에 장악된 뒤부터 레닌을 로베스피에르를 동일시하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권력욕에 찬 냉혈한이라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미지에 레닌이 조합된 이후, 우리는 두 가지 한계에 구속되었다. 모든 이상주의적인 정치 운동(혁명)의 끝은 공포 정치를 부르며 그것의 논리적 결말은 강제수용소라는 것이 그 하나고, 모든 정치 운동은 민주주의적 제도와 지적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머지 하나다.
오늘날, 프랑스 혁명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후하지 않다.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에서 계급적 특권 사회의 권력 체제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형식상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들의 사회를 세운 건 인정되지만, 사회의 계층적 구조는 별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동의를 통한 정치권력의 합법화와 시민들의 참정권 요구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게 되었다.
사족이다. 이 글 가운데 『당통의 죽음』에 관한 기술은, 루카치의 『리얼리즘 문학의 실제 비평』(까치, 1987)에 실린 뷔히너에 관한 에세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오늘의 평가가 기술된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은,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