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읽다. -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약간 공상적으로 씌어진 「프라이데이터리코더」를 말고는 모두 대학을 각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이십 대 여주인공의 이야기다. ‘88만원 세대’의 대표적인 표징은 임시직 혹은 비정규직인데, 이 창작집의 주인공들 역시 학원 강사나(「침이 고인다」?「자오선을 지나갈 때」) 과외 교사다(「기도」). 「기도」의 여주인공이 말한다. “한번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대한민국 사교육 무너지면 우리 다 죽는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학원 강사나 과외 교사로 연명하면서 죽지 않고 용케 목숨을 부지한 주인공들의 그다음 임무는, 서울 하늘 아래 방 한 칸을 구하는 것이다. 열악한 주거 공간은 임시직 혹은 비정규직과 함께 88만원 세대의 또 다른 표징이다.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김애란의 주인공들은 반 지하방(「도도한 생활」), 4인용 독서실(「자오선을 지나갈 때」), 신림동 고시원(「기도」)에 닥치는 대로 서식한다. 오빠나 막내와 함께 욕실이 있는 원룸에 살거나(「성탄특선」?「기도」), 혼자 13평형 원룸에서 사는 경우는(「침이 고인다」) 성공한 축에 든다.
먹고 거주할 데를 확보한 청춘은 짝짓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성탄절에 만난 청춘남녀는 끝내 여관방을 얻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성탄특선」). 과연 이들은 계속해서 연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연애·결혼·출산’을 모두 포기해 버리는 대열에 끼이기 십상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니, 이십 대 때 읽었던 마레크 플라스코의 『제8요일』(평민사, 1978)이 떠오른다.
88만원 세대의 등장은, 구조조정 당하고 명예퇴직 당하는 ‘아버지의 몰락’과 상관있다. 엄마의 강한 생존욕을 보여주는 「도도한 생활」과 「칼자국」에서처럼, 김애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이 애초부터 번듯한 관직이나 기업에 속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읽고 싶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 스치듯이 언급된 ‘IMF’는,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세시켰다. 같은 작품에서 막내딸에게 재수를 제안한 것은 ‘엄마’였는데, 그것은 그 집안의 경제를 엄마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기도」나 「네모난 자리들」에서도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거나, 엄마의 비중이 아버지보다 크다. 이런 설정은 공상의 섬나라가 나오는 「프라이데이터리코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결혼을 한 뒤 몇 달 안 돼 죽었다.
가진 직업이나 방도 변변찮고, 연애도 잘 안 되는 김애란의 주인공이 유일하게 가진 것은 ‘배려’다. 「침이 고인다」의 여주인공은 아무런 거처가 없는 대학교의 후배에게 자신의 13평 원룸에서 지낼 것을 허락하고, 「기도」의 여주인공은 설문을 하러 온 50대 남자에게 성심껏 대답을 하면서 “나 스스로 누군가를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오래된 배려심이랄까, 그런 습관에 쫓기는 기분이다”라고 생각한다. 「네모난 자리들」도 그랬다. 여주인공이 최두식이라는 선배에게 반한 것은, 학교 앞 대로변의 허름한 건물에 살았던 그가 늘 배고파 보였던데다가, 실연마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배려는 오래가지 않는 일시적인데다가, 타산적이기까지 하다. 「침이 고인다」의 여주인공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후배에게 자신이 일하는 학원의 논술 첨삭일을 알선해 주고, 집세와 공과금을 반씩 부담시킨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고 나자, “어서, 고독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후배를 내쫓는다. 「네모난 자리들」의 최두식이 말했듯이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
『침이 고인다』의 주인공들, 또는 김애란의 세계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낱낱의 반 지하방’을 연상시킨다. 낱낱의 반 지하방으로 존재하는 이 단자單子들은, 연대나 저항을 꿈꾸지 않는다. 독서실의 자기 책상 앞에 점점 더 강한 각오의 포스트잇을 써 붙이는 이들의 타자에 대한 배려는 실낱같고 변덕스러우며, 환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자는 억척스러운 본능을 지닌 엄마다. 「프라이데이터리코더」에서 그 엄마는 “화재가 난 여관방에서 벌거벗은 사내”와 함께 죽지만, 곧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가 되어 돌아온다. 이 블랙박스야말로 주인공들이나 작가가 연대나 저항 대신 선택한 ‘억척스러운 본능’이 아닌가?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두려움에 침을 삼키게 되지만, 그런 시대일수록, 엄마의 귀환보다 불길한 징후도 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