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해롤드 핀터의 초기 세 작품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잡담’이다. 세 작품 모두 연극이 시작되면서 음식에 관한 잡담으로 일관한다. 까닭은 육체적 인간에게 ‘음식’이란 세계의 총화나 다름없으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타인이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이다. 음식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을 식탁에 함께 앉게 할 뿐 아니라, 이질적인 문명과 문명을 통하게 만든다. 뿐 아니라, 어느 종교에서든 인간이 신을 만나는 가장 일상적이고 성스러운 순간 또한 신을 화육의 형태(음식)로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성스러운 음식을 통해 신을 영접하게 되고, 하나 된다.
하지만 핀터의 등장인물들은 음식을 얘기하면서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핀터의 작품에 나오는 음식(밥상머리 화제)은 주인공들을 함께 묶어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주인공들의 소외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방」(『해롤드 핀터 전집·4』, 평민사, 2002)과 「생일파티」(『해롤드 핀터 전집·1』, 평민사, 2002)에 나오는 음식은 여성과 남성의 성차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음식을 매개로 여성이 남성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아주 미약한 저항).
연극 초반에 맛보기로 보여주는 잡담은 항상 음식과 연관되는데, 아내가 음식을 매개로 남편과 대화를 시도할 때, 남성은 항상 ‘딴청[어떤 일을 하는 데 그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나 행동]’을 피운다. 「방」과 「생일파티」에서 그 딴청은 ‘신문보기’로 정형화되어 있다.
핀터가 보여주는 잡담과 딴청은,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며, 사태의 핵심(혹은 상황의 바로 파악하기)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다. Guido Almansi와 Simon hendererson는 핀터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이런 태도에 ‘존재론적인 잡담’이란 명칭을 붙였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진지한 목적으로 벌이는 쓸데없는 말장난’이 존재론적 잡담이다. 여기엔 말 그대로의 잡담뿐 아니라, 딴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핀터 이전에 잡담과 딴청으로 일관했던 연극 주인공들의 명세를 이미 갖고 있다.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1949)며,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1952)가 그렇다.
「벙어리 웨이터」(『해롤드 핀터 전집·2』, 평민사, 2002)는 음식이 인간 사이에 소통과 관계를 만들고, 소통과 관계를 통해 인간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에 단절을 만들어내는 기막힌 역전을 보여준다. 「벙어리 웨이터」에서는 음식으로 인해 삶이 지속되는 게 아니라, 음식 그 자체로 억압과 불신이 생긴다. 음식이 우리를 불화하게 하는 세계에서는, 품위 있는 삶만 아니라 실존 그 자체가 위협당한다.
핀터는 자신의 등단작인 「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두드리는 아이디어는 게슈타포에서 얻었다.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953년이나 1954년이었다. 전쟁은 채 10년이 못 걸렸지만, 내 머릿속에는 크게 박혔다.”
핀터는 유대인이다. 핀터의 해석가들은 「생일파티」에 드러난, 낯선 권력의 임재와 압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다시 말해 제2차세계대전 시 나치에게 겪었던 ‘절멸 체험’과 인종박해를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스탠리에게 외삽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일날 정신병원행을 선고받는 아이러니에는 유대의 전통문화도 은밀하게 접맥되어 있다 :
ⅰ)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4, 5).
ⅱ) […] 이집트 왕의 신하 가운데 두 사람이 이집트 왕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였습니다. 파라오는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그들을 경호대 대장의 집 안에 있는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요셉이 갇혀 있던 감옥이었습니다. 경호대 대장은 요셉에게 두 죄수의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이집트 왕에게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가 모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저마다 달랐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가 보니 그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파라오의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슬퍼 보입니까? 두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무슨 꿈인지 풀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꿈의 뜻을 풀어 줄 분은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저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그러자 왕에게 포도주를 바치던 사람이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꿈에 어떤 포도나무를 보았다네. 그 나무에는 가지가 셋 있었는데 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더니, 포도가 열렸다네. 나는 파라오의 잔을 들고 있다가 포도를 짜서 즙을 내어 파라오에게 바쳤다네. 그 이야기를 듣고 요셉이 말했습니다. 그 꿈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지 셋은 삼 일을 뜻합니다. 앞으로 삼 일이 지나기 전에 파라오가 당신을 풀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전에 하던 일을 다시 맡길 것입니다. 당신은 전에 하던 것처럼 다시 파라오에게 포도주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풀려나시게 되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파라오에게 말해서 제가 이 감옥에서 풀려나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히브리 사람들의 땅에서 강제로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빵을 바치던 사람은 요셉의 꿈 해몽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꿈을 꾸었다네. 내 머리 위에 빵이 담긴 바구니 세 개가 있는 꿈을 꾸었다네. 가장 위에 있는 바구니에는 파라오에게 바칠 온갖 빵들이 있었다네. 그런데 새들이 내 머리 위에 있는 바구니 속의 음식을 먹었다네.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그 꿈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 바구니는 삼 일을 뜻합니다. 앞으로 삼 일이 지나기 전에 파라오가 당신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입니다. 파라오는 당신의 시체를 장대 위에 매달 것입니다. 그래서 새들이 당신의 시체를 쪼아 먹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삼 일 뒤는 파라오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모든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를 감옥에서 불러냈습니다. 파라오는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에게 옛날에 하던 일을 다시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다시 파라오의 손에 포도주 잔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빵을 바치던 신하는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모든 일이 요셉이 말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20:1-20).
ⅲ)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딸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했다.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다. 달은 자기 어머니에게로 요한의 목을 가져가니라. (마태복음 14:6-11)
『성경』에는 생일이 단 세 번 언급되는데, 보시다시피, 모두 부정적이다. 이는 예수의 생일이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없을 수 없다. 구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도서 7:2)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도 그와 비슷한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