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김종은의 『신선한 생선 사나이』(창비, 2005)를 읽다. - 주로 십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주인공이 나오는 김종은의 작품은 성장소설의 외양을 취하고 있다. 「프레시 피시맨」·「메모리」·「스물다섯의 그래피티」·「그리운 박중배 아저씨」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지만, 「미확인비행물체」처럼 성장 이전의 유년기를 다룬 작품도 거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성장소설의 특징을 주인공과 세계와의 갈등과 화해에 겨누어진 굉장히 일직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다면, 김종은의 작품은 그런 공식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이라는 불치병으로 자해를 하고 죽거나(「프레시 피시맨」), 현실로부터 자취를 감춘다( 「미확인비행물체」).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일직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성장소설의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기원의 부재와 상관있다.
녀석이 대학에 붙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녀석의 어머니가 정작 녀석이 대학생이 된 그 추운 겨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프레시 피시맨」)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아버지요? 자살했습니다.(「쎄일즈맨의 하루는」)
어머니는 살해됐다. […] 아버지는 그 길로 곧장 자수했다. 아버지의 편지가 끊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메모리」)
“신경 안 써. 우리 엄마 아빤 정말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상관이 없는거야.”(「미확인비행물체」)
대부분의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 부재하거나,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라는 상징 기표는 겨우 존재한다.
녀석의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그날도 녀석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프레시 피시맨」)
쌀가마니가 프린트된 그림 아래 ‘우리 농산물 살리기’란 글귀가 그것도 궁서체로다가 적힌 셔츠! 그건 농협에 다니는 아버지가 걸레처럼 휙 던져준 것이었다.(「스물다섯의 그래피티」)
“외계인에게 납치됐던 아버지가 삼년 만에 다시 돌아와요. 그 아버지가 사람들을 막 죽이기 시작해요. 헌데 혈육의 정은 있는지 아들은 안 죽여요.”(「우주괴물 엑스트로」)
양치질을 하다가 나는 거품이 묻은 칫솔을 신문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신문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나를 나무랐다.(「그리운 박중배 아저씨」)
주인공들의 아버지들은 자식의 “곁을 지켜주지 못”하고, 기껏 직장에서 무료로 나눠준 옷을 “걸레처럼” 던지거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혈육의 정”만 간직한 채, “신문을 보고” 있을 뿐이다. 거론된 작품 속에서 아버지들은 정말이지, 인용된 저 한 줄의 문장에만 등장한다. 이처럼 겨우 존재하는 아버지들은, 그들의 보잘것없는 경제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 아버지들은「쎄일즈맨의 하루는」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빚” 밖에 남긴 게 없다. 하므로 그 아들들이 “왜 우리는 세상 모든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것일까”라고 한탄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자기 정체성과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아버지 대신 의지하는 대상은 친구거나(「프레시 피시맨」·「스물다섯의 그래피티」·「미확인비행물체」), 직장 동료(「쎄일즈맨의 하루는」) 또는 「그리운 박중배 아저씨」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이다. 「길」의 남자 주인공 우현은 미진으로부터 자신의 상실된 기원 즉 ‘행복이 가득한 집’을 보상받고자 하지만, 그가 버림받는 이유도 다 ‘근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워진 기원에 대한 반대급부로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집착하는 게 ‘기억’이다. 그런 뜻에서, 「길」에 나오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기억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은, 『신선한 생선 사나이』의 형식과도 연관된다. 「프레시 피시맨」·「스물다섯의 그래피티」·「그리운 박중배 아저씨」·「미확인비행물체」 같은 성공작은 모두 과거 회상을 취하고 있다.
기원이 지워진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억과 대면해야 한다. 하지만, 「메모리」에서 보듯이 기억과의 대면은, 파괴적이고 환상적인 ‘자폐’에 막히거나 거기서 끝난다. 다섯 쪽 분량에 불과한,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신선한 생선 사나이』 가운데서 광채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주인공의 하루 일과를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된 전화기(“신규 메씨지 한 개가 녹음되어 있습니다”) · 전철(“이번 정차역은 시청, 시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 버스(“카드를 다시 대주세요”)의 안내 방송과 교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 젊은 세대들에게 돌아갈 기원이 없다는 것을 강하게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