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척 팔라닉의 『질식』(책세상, 2002)을 읽다. - 소설의 제목 Choke는, 주인공 빅터 맨시니가 벌이는 연기에서 따왔다. 그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음식물에 기도가 막힌 듯이, 의자에서 버둥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면 식당 손님 가운데 의사자 응급 처치법을 배운 사람이 있어 그를 구해낸다.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단조로운 일상에 짜릿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영웅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서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사람은 누군가를 구해주면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누군가가 구해주면 그 사람이 살아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국의 오래된 풍습이 있다. 이제 그들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내게 편지를 쓸 것이다. 기념일에는 카드를 보내올 것이다. 생일카드를. 생명의 은인이 누가 되든 달라질 건 없다. 그들은 전화를 걸어와 내 기분이 어떤지, 내가 풀이 죽어 있지는 않은지, 혹은 돈이 필요한지 살핀다.
빅터 맨시니가 무려 400여 회가 넘는 ‘질식’ 연기 끝에, 상당한 후원자를 모았다. 그는 그 돈으로 정신병원에 있는 예순두 살 먹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질식 연기를 하는 것은, 꼭 돈 때문만이 아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좀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는 의과대학 이 년 차를 마쳤다.
그가 질식 연기를 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숱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인데, 그에게 온갖 강박을 주입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는 그의 어머니다.
커다란 호텔 로비에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흐르기 시작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밖으로 뛰어나가야 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야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만약 병원에서 플라밍고 간호사를 암 병동으로 호출하면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한다. 플라밍고라는 간호사는 없다. 불레이즈 박사를 호출해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호텔에 왈츠가 나오면 그것은 건물을 속히 비워야 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병원에서 플라밍고 간호사는 화재, 블레이즈 박사도 화재, 그린 박사는 자살, 블루 박사는 환자의 죽음을 뜻한다.
(…)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기 싫어서 늘 이런 식으로 말하지.
브로드웨이의 극장에서 “엘비스가 빌딩을 나갔습니다”라는 방송은 불이 났다는 뜻이다.
식료품점에서 캐시 씨를 호출하는 것은 무장 경비원을 부르는 신호다. “여성복 운송 확인!”이라는 방송은 누군가 여성복 매장에서 좀도둑질을 했다는 뜻이다. 어떤 가게에서는 실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실라 씨는 프런트로 와주세요”라는 말은 프런트에 좀도둑이 있다는 뜻이다. 캐시 씨나 실라나 플라밍고 간호사는 항상 나쁜 소식을 뜻한다.
엄마는 시동을 끄고 한 손으로는 열두 시 방향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면서, 아이에게 자기가 말해준 것들을 전부 외워보게 했다.
(…)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야. 이런 건 알아두면 나중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
엄마는 다시 손가락을 딱딱 꺾었다. “애먼드 실베스트리 씨?” 엄마가 말했다. “그를 찾는 방송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위의 이야기는, 양부모와 살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생인 빅터 맨시니를 그의 어머니가 납치한 끝에, 경찰 헬리콥터의 추격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스쿨버스 속에서 들려준 것이다.
작중에 어렴풋이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히피이거나 대안 문화의 세례를 받았던 ‘꽃의 아이들’의 세대다. 그녀가 입고 다닌 ‘문제아Troublemaker'라는 문구가 씌어진 티셔츠가 암시하고, 또 위의 인용 가운데, 그녀가 아들에게 다그쳤던 “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라거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야” 같은 가르침은, 그녀의 가치관이 기존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했던 그녀는 몇 차례의 폭행 사건 끝에,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겼다.
건강·성공·성적 매력 등의 미국식 가치에 저항했던 그녀는 납치한 아들과 여행을 하면서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경계선은 개념, 소설, 음악, 예술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또 “세상을 창조해봐. 네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좋겠어. 너 자신만의 현실을 창조하는 거야. 너만의 법들도. 엄만 그런 걸 가르쳐주고 싶어”라고 강요한다. 그 순간 빅터 맨시니는, 처음으로 ‘질식의 예술’을 떠올렸다.
사실 이 멍청한 아이는 자기 자신, 자신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한심한 꼬마 녀석은 엄마가 잡혀가서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다음 식당에서 벌일 일의 계획을 벌써부터 꾸미고 있었다. 그는 모험에 지쳐버렸고, 그의 소중하고, 지루하고, 한심한 인생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미 안전, 만족과 엄마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무릎으로 버스를 몰면서 엄마가 아이의 어깨를 꼬옥 움켜쥐고 말했다. “점심은 뭘 먹을까?”
아이는 어떤 악의도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콘도그요.”
어머니와 함께 모텔을 전전하는 게 진력났던 빅터 맨시니는, 식당에서의 질식 연기로 납치된 자신의 존재를 식당 손님들에게 알린다. 한 번의 배반으로 어머니를 감옥에 보낸 그는, 현재의 나이인 스물네 살이 되기도 전에 섹스중독자가 된다. 섹스중독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치료 행위의 일부로 씌어진 ‘자서전 쓰기’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가히 ‘강박증의 미국’에 대한, 희극적인 보고서다(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다). 공동체보다 자아를 중시하는 미국 문화는 다른 어느 사회보다 온갖 강박증과 중독자를 양산하는데, 공동체를 중시했던 히피들마저 이 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족. 어느 대형 마트에서 “오 번 계산대에 이십오 센트 동전이 필요하다”는 방송이 나오면, 그곳에 예쁜 여자가 있으니 모두 와서 보고 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