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밀턴 멜저의 『랭스턴 휴즈』(실천문학사, 1994)는 ‘흑인 계관 시인’ 또는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렸던 랭스턴 휴즈의 평전이다. 랭스턴 이전에는 흑인 시인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인종차별적인 언사일 것이다. 하지만 랭스턴이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흑인 시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랭스턴이 생계의 한 방편으로 미국 전역을 누비며 시낭송회를 열기 이전에는, 시인이라면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을 연상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1902년 미주리주에서 태어난 랭스턴의 혈통은 복잡하다. 랭스턴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각기 유태계 노예 무역상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양조업자 집안이었다. 이들 집안은 저명한 영국 상원 의원과 시인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증조할아버지가 흑인 하녀에게서 낳은 게 바로 랭스턴의 할아버지다. 랭스턴의 가계가 보여주는 이런 흑백 혼종은, 오랫동안 미국의 정의로 행세해 온 ‘짐 크로우’법이 얼마만큼 자가당착적인 것인지를 드러낸다. 단 한 방울이라도 흑인의 피가 섞이면 흑인으로 취급하는 미국의 인종차별법은, 형제가 형제를 박해하는 법이나 마찬가지다.
랭스턴의 아버지였던 제임스 휴즈는 법률가가 되고자 했을 만큼 재능 있는 사람이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같은 장벽에 부딪힌 흑인들이 나타내는 태도는 보통 두 가지로, 하나는 완전히 절망하여 암울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편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의 불길을 태우면서 저항운동으로 나아가는 쪽이다. 혼자 멕시코로 떠나 미국을 완전히 등졌던 제임스 휴즈는 전자의 경우로, 이런 사람은 자신을 억누르는 압제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검은 피부를 증오하게 된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그는 아들이 대학을 가거나 시를 쓰는 것을 코웃음 쳤다.
남편이 없는 흑인 여자의 삶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발버둥과 병고의 연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랭스턴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외할머니 메리 랭스턴이었다.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대학을 다닌 최초의 흑인 여성이었던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루이스 레어리로, 그는 1859년에 있었던 존 브라운 무기고 습격 사건의 흑인 가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 사건은 백인 노예폐지론자였던 존 브라운이 버지니아주의 연방 무기 창고를 털어 흑인을 무장봉기시키려고 했던 사건으로, 루이스 레어리는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 죽었다.
첫 번째 남편이 죽자 메리는 똑같은 대의를 위해 똑같은 위험을 무릅쓴 또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두 번째 남편인 찰스 랭스턴은 노예해방 결사조직의 일원으로 탈주 노예의 탈출을 돕다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나서는 허울뿐인 자유만 아니라 흑인의 동등권을 위한 정치투쟁을 계속했다. 70대의 외할머니는 일곱 살 난 손자에게 흑인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손자에게 자신이 구독하고 있는 전국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NAACP)의 기관지인 <크라이시스>를 보게 했다. 외할머니는 협회를 만들고 잡지를 편집하던 듀 보이스 박사를 위대한 흑인으로 존경했고, 랭스턴은 어린 시절부터 “20세기의 문제는 인종 간의 문제이다”라는 듀 보이스의 문제의식과 마주쳤다.
대개의 문학청년들이 그렇듯이, 랭스턴을 시로 이끈 것도 독서였다. 그는 초등중학교 시절 헨리 롱펠로와 폴 로렌스 던바를 좋아했는데, 흑인노예의 아들이었던 그는 엘리베이터 보이를 하던 스물한 살 때 첫 시집을 냈다. 랭스턴은 흑인 사투리를 그대로 쓰고, 스윙의 음률과 박자를 갖고 있던 그의 시를 좋아했는데, 이런 특성은 훗날 랭스턴의 특징이 된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영어 선생의 지도로 로버트 프로스트?에이미 로웰?칼 샌드버그의 시를 읽었다. 이때의 랭스턴은 그 어떤 시인의 시라도 모방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잡지사에 투고한 시들은 ‘사절’이라는 쪽지와 함께 반송되어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덟 살의 랭스턴은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못했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호텔 수위나 버스차장이 고작이었다. 그때 랭스턴은 아버지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멕시코행 기차를 타게 되는데, 기차에서 미시시피 강을 보고 쓴 시가 바로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이다. 멕시코에 도착한 랭스턴은 기차 안에서 완성한 이 시를 <크라이시스>에 보냈다. 이 시는 랭스턴의 등단작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 시에서 그가 흑인의 고유한 영혼을 나타내고자 쓴 ‘소울soul’이라는 단어에도 주목을 해야 한다. 물론 이 단어를 랭스턴이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 의해, 소울은 오로지 흑인들만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흑인성의 정수, 흑인의 영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랭스턴은 스물네 살 때인 1926년 첫 시집인 『피곤의 블루스』를 출간했다. 비평가들은 찬사를 바치며 그를 칼 샌드버그에 비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랭스턴의 첫 번째 시집은 그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당시에 태동하고 있던 할렘 르네상스라는 흑인 문화운동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검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드러낼 뿐 아니라, 인종적 자부심과 과거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완전한 시민권에 대한 요구와 투쟁이 혼합된 흑인 문화운동이 없었다면, 흑인 계관시인도 할렘의 셰익스피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블루스나 재즈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한번도 가져본 일이 없지만, 랭스턴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블루스와 재즈를 듣는 일에서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보았고,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던 때에는 흑인 뮤지컬을 관람하느라고 용돈을 탕진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블루스의 맥박을 감지하고자 했으며, 재즈의 리듬을 언어의 리듬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가 소련에 체류했던 1932년의 일이다. 공산당원이면서 훗날 『한낮의 어둠』으로 유명하게 될 아서 쾨슬러가 “왜 당신은 당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묻자, 랭스턴은 “러시아에서는 재즈가 공식적으로는 퇴폐적인 자본주의 음악이라고 거부되고” 있다면서, “혁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의 시는 “블루스 음조의 진수”를 포착하고 있다거나 “언어로 된 재즈”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영어의 운율을 모르는 한국 독자들이 번역시로 랭스턴의 특성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은 그가 쓴 「빌리 할리데이를 의한 노래」의 한 대목이다.
무엇이
노래와 슬픔으로 가득한 내 가슴을
씻어줄 수 있겠는가.
슬픔의 노래 이외의
무엇이
내 가슴을 씻어 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