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데이비드 버스의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청림출판, 2003)를 읽다. - 이 책이 원제는 ‘The Dangerous Passion'이고, 위험한 열정이란 다름 아닌 ‘질투’를 가리킨다.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의 어원은 차례대로 그리스어 ‘zelos’, 라틴어 ‘zelosus’, 불어 ‘jalousie’ 혹은 ‘jaloux’에서 유래했는데, 그리스어 ‘zelos’는 열정, 따뜻함, 열성 혹은 강한 욕망을 뜻한다. 그런데 불어 ‘jalousie’는 질투라는 뜻과 함께 ‘발blind’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정신의학자는,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현장을 잡고자 ‘jalousie/blind’ 뒤에서 아내를 몰래 훔쳐보는 상황에서 질투가 생겨났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지은이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설계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화심리학에 기초해서 이 책을 썼다. 진화심리학과 질투의 관계를 더 파고들기 전에, 이번 기회에 질투와 시기라는 용어를 확실히 정리해 두자. 시오노 나나미는 『남자들에게』(한길사, 1995) 가운데 어느 글에 이렇게 적었다.
질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요, 선망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선망은 일곱 대죄에 끼워 넣었으나 질투는 제외한 것을 이해할 만하다. 질투는 동정 못 할 것도 없으나, 선망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
질투란 내가 소유한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피해 의식이다. 그러므로 동정의 여지가 있지만, 선망은 남의 것에 대한 탐욕이므로 용서될 수 없다는 게 윗글의 요지다. 이런 해석은 데이비드 버스의 『오셀로를 닮은 남자』에서 고스란히 되풀이 된다(단 시오노 나나미의 ‘선망’은 아래의 글에서 ‘시기’로 바뀌었다).
일부 학자들은 질투라는 개념을 때로 유사한 개념인 시기envy와 혼동하기도 한다. 시기란 라틴어 ‘invidere’에서 온 것으로 악의를 가지고 바라본다는 뜻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정의를 보면 시기란 ‘행복, 성공, 명성 등 가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우월함에 대해 불쾌감과 악의를 느끼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질투와 시기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 남자는 아름다운 아내를 거느린 다른 남자를 시기할 수 있다. 이 시기심은 자신이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 남자를 향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아내를 소유한 남자가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의심한다면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질투를 느낄 것이다. 시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탐욕, 악의, 나쁜 감정 등을 포함한다. 반면 질투는 자신이 이미 가진 소중한 짝을 경쟁자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포함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화심리학자인 지은이는 질투를 신경증이나 미성숙과 같은 성격적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질투를 이성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화심리학은 그것이 수백만 년에 걸쳐 성공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감정적 지혜”라고 말한다. 나아가 “질투는 우리 조상들의 성공적인 생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진화적 토대”라고까지 말하는 지은이는, 질투는 정상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야망·근면성·지능·신뢰성·창의성·쾌활함·유머 감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질투는 미성숙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들과 오늘날의 우리가 계속 생존하고 생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감정이다. 예를 들어 질투는 위협적인 언사와 매서운 눈초리로 경쟁자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질투는 경계를 강화하거나 배우자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는 등의 전략을 동원하여 한눈을 팔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질투는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배우자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알려서 결국 사랑의 유지라는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한다. 성적 질투는 때로는 파괴적이기도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끊임없이 부딪쳐야만 했던 문제에 대한 성공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배우자 어느 한 쪽의 외도는 다른 쪽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충성심을 떨어뜨리고, 한정된 자원을 다른 경쟁자에게 돌아가도록 만든다. 배우자의 외도는 자원의 분배만 아니라 생식의 기회마저 빼앗아 가며,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위협을 막아내지 못하거나 배신당할 가능성을 줄이지 못하면 부성애나 모성애는 결코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인 이혼은 아이들을 학대의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배우자가 배신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어 체계가 진화 과정에서 구축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질투의 진화심리학에 과학적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정자 경쟁’에 대한 최신 연구를 덧보탠다. 남자의 정자가 여성의 생식기 안에서 고작 하루나 이틀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은 예전의 지식과 달리, 여성의 생식기 안에서 남자의 정자는 7일까지 생존한다. 따라서 한 주 동안 한 여성이 두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출신이 다른 정자들은 난자를 먼저 만나기 위해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정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①상대방보다 많은 정액을 사출해야 했다. 그래서 인간 남성의 정액량은 신체 무게와 비교했을 때, 일부일처제인 다른 영장류에 비해 두 배나 많아졌다. 그리고 ②인간의 정자는 힘차게 움직이는 꼬리를 가진 돌격형(스피드형)과, 돌돌 말린 꼬리를 가진 가미가제형으로 나뉘었다. 돌격형은 난자를 빨리 만날 수 있도록 개발된 반면, 수영 속도가 느린 가미가제형은 근원이 다른 정자를 감싸 안고 함께 죽는다. 이렇듯, 부피가 커진 정액량과 전투를 담당하는 특수 정자의 등장은, 생명의 기원에 경쟁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질투는 성 전략의 중요한 자원이다.
진화심리학의 논리를 고스란히 따르면, 질투를 부르고 부리는 인간의 성적 전략은, 생존을 위협하는 질병·전쟁·기아와 한정된 자원이 발달시킨 생존술이다. 그런데 고대의 압도적인 생존 위협이 가시고, 또 자원이 풍족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질투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왜일까? 환경은 바뀌었는데도 성적 전략만 낡은 습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대와 정반대의 환경이 ‘패스트푸드’와 같은 외도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 놓았기 때문에 사라질 수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