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예니, 1999)는 1901년과 1913년 사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아주 친절하게도 작가는 제2막 서두에, 이 작품의 줄거리를 잘 요약해 놓았다: “첫째 막이 일상생활이었다면, 이번 막은 사랑과 결혼입니다. 다음에 또 한 막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가 될지 짐작하시겠죠?”
『우리 읍내』의 주인공을 깁스가의 아들 조오지와 웹가의 딸 에밀리로 간주한다면, 이 작품은 조오지와 에밀리의 청소년기(제1막, 16세)→성년기(제2막, 19세)→장년기(제3막, 28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조오지와 에밀리의 부모를 중심으로 이 작품의 줄거리를 본다면, 아이를 양육하고(제1막)→혼사를 치르고(제2막)→죽는(제3막) 얘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구분은 작품의 제일 끝에 놓인 에밀리와 조오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봉합된다(에밀리의 죽음은 결혼 뒤 ‘14년’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나, 조오지의 죽음은 시간을 적시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읍내』의 주인공이 조오지나 에밀리도 아니요, 그들의 부모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탄생→생식→죽음 또는 생로병사를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보편적인 인간 조건이다. 이 점에 대해 『클라시커 50―연극』(해냄, 2003)을 쓴 노르베르트 아벨스는 “일상의 생활 자체가 작품의 주인공이다”고 확인해 주고 있으며, 와일더의 창작관과 연관하여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와일더는 일상이라는 시문학이 드라마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의 연극은 실험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구체화하는 것, 끝이 반복되는 틀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줄거리라도 비유가 될 수 있으며, 반복되는 사건들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작품이 평범한 소도시 마을에 사는 장삼이사들의 비근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근한 일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있으니, 그것은 ‘바쁨(빨리)’이다. 막이 열리면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 열한 살 먹은 조오 크로웰 2세가 새벽 일찍 신문을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19쪽). 그런 다음 우유 배달원 하우이가 등장하고(21~29쪽), 깁스 부인이 조오지와 리베카를, 또 웹 부인이 에밀리와 월리 등교시키기 위해 부산을 떠는 아침 식전 풍경이 묘사된다(24~29쪽). 그러고 나서 깁스 부인과 웹 부인은 곧장 양계와 콩깍지 벗기는 일과 같은 가사에 몰두한다(29쪽).
연극이 막 시작된 19쪽에서부터 두 부인이 가사에 열중하는 29쪽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나 행동은 ‘분주함’과 ‘바쁨’이다. 대사의 순서에 따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하우이: 네, 좀 늦었죠? (23쪽)
웹 부인: 에밀리! 일어나라! 월리! 일곱 시다! (24쪽)
깁스 부인: (…) 조오지! 리베카! 학교 늦는다! (25쪽)
깁스: 빨리 해라! (25쪽)
깁스 부인: 조오지! 리베카! 학교 늦는다! (25쪽)
웹 부인: 월리! 에밀리! 학교 늦는다. 월리! 깨끗이 씻어! 아님 내 올라가 씻길 테다!
(25쪽)
아이들: 첫 종이 났어요. 늦겠어요. 고만 먹을게요. 빨리 가야지. (28쪽)
웹 부인: 그냥 빨리 걸어, 안 뛰어도 돼. 월리야, 바지 바짝 추켜. 에밀리 어깨 펴고. (29쪽)
위에 묘사된 분주하고 바쁜 풍경은 보통 가정에서 늘 벌어지는 일상 풍경이다(저 분주한 풍경 속에 27쪽에 나오는 “밥을 먹을 땐 책 안 보기로 했잖아”라는 웹 부인의 아들에 대한 타박도 첨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저 일상 풍경을 일상으로 보아 넘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주함과 바쁨으로 점철된 삶의 최종 결과다.
앞서 말했듯이 이 연극의 서두는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 열한 살 먹은 조오 크로웰 2세와 새벽 한 시에 왕진을 갔다가 이제서야 귀가한 깁스가 짧은 대화를 하게 되는데, 해설자는 그 직후 이렇게 말한다: “저 애 얘기를 좀 해볼까요. 쟨 여기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반에서 일등이었죠. 그래 장학생으로 매사추세츠 공대에 들어가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고요. 그때 보스턴 신문에 굉장했었죠. 헌데 막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려는 순간 전쟁이 터져 프랑스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공부가 허사가 된 거죠.” (21쪽)
이 해설이 의미하는 것은, 분주함과 바쁨으로 시종되는 우리 삶의 최종 결과는, 덧없는 죽음이란 뜻이다.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현대적 삶의 양식과 대비되는 덧없는 죽음을 도드라지게 대비하기 위해 작가는,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현대적 삶의 양식이 추구하는 목적을 아예 노골적으로 명시해 놓았다.
ⅰ) “공장의 기적소리 들린다”는 26쪽의 지문과 거기에 대한 설명인 27쪽의 해설자의 말: “우리 읍내에도 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들리시죠? 담요 공장인데, 카트라이트 씨네는 저걸로 부자가 된 겁니다.” 위의 지문과 설명은 조오지와 리베카가 어머니 깁스 부인의 채근을 받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탁에 앉았을 때 나온다.
ⅱ) 식사를 하면서 리베카가, 열한 살 난 리베카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 “엄마, 내가 최고루 좋아하는 게 뭐게? 응? 돈이야.” (28쪽)
분주함과 바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기 때문에, 작중 인물들은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단 한 번 아주 명확하게 주인공이 그걸 인식하는 장면이 88쪽에 있긴 하다. 결혼을 하는 날 아침이다.
조오지: 난 어른 안 될래요. 왜들 이렇게 서둘러요?
깁스 부인: 네가 서둘렀지.
조오지: 글쎄…
깁스 부인: 글쎄고 절쎄고 넌 인제 어른이야.
조오지: 제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저는요…
깁스 부인: 얘, 누가 들을라. 그만 해. 정말 창피해 못 살겠다.
『우리 읍내』의 제3막은 생자와 사자가 반씩 섞여서 이끌어 가는 듯하다가, 사자死者들이 주도하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로 끝맺는다. 죽음의 무도란 만물을 정복하고 평준화하는 죽음의 힘으로, 죽음의 본질적 개념인 불가피성과 공평함, 즉 모든 사람은 죽게 마련이며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던가? 그 힘 앞에서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현대인의 일상 원칙은, 다시 한번 타기唾棄시 된다. 예컨대 아이를 낳다가 고작 서른세 살로 죽음을 맞이한 에밀리가 무대감독에게 청하여 자신의 열두 번째 생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이승의 분주함과 바쁨에 질려, 도로 저승으로 데려가 주길 원했다(117쪽). 즉 현대적 삶의 양식은 이승이 그리워 돌아온 사자에 의해, 그야말로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타기된다(타기: 업신여기거나 아주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고 버림). 그러면서 작가는 “성인들이나 시인”(117쪽) 정도나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일상 너머의 진실, 곧 분주함과 바쁨에 물들지 않은 삶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며, 나아가 죽음의 덧없음마저 직시한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현대적 삶의 양식을 앞서 제시한 미국식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촉구하는 ‘일상의 행복’, ‘인식으로서의 삶’ 또는 ‘느림의 발견’ 같은 것은, 딱히 미국식 삶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을 의도하고 있지 않다. 미국식 삶의 구조적인 반성과 비판은,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를 낱낱이 밝힌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와서야 정식으로 시도되었다.
현대적 삶의 양식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구조적인 층위에서 추구되지 않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음을 확연히 해주는 대목은, 에밀리가 무대감독에게 자신을 도로 사자들의 세계로 데려가 달라는 장면이다. 사자에 눈에 비친 저 정도의 계기만으로 현대적 일상의 구조가 발견되었다고 말하기란, 너무 미미하고 설득력이 없다. 적어도 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재귀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철학적 근거가 있어야 했다.
그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향수nostalgia다. 어느 미학자에 따르면, 자신의 과거를 장악하지 못했던 후회 혹은 상실감이 자아내는 것이 바로 향수다. 『우리 읍내』가 우리에게 부추기는 것은, 현대적 삶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이기보다는, ‘죽음의 무도’를 추기 전에, 자신의 ‘현재(삶)를 잡아라!carpe die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