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황금가지, 2005)를 읽다. - 『유니스의 비밀』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렌들의 소설이다. 작가는 추리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두 편의 소설을 읽고 난 감상은, 추리소설에 대한 혼란이다. 예컨대 두 편의 작품을 ‘세계문학전집’ 속에 넣으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민음사, 1999, 세계문학전집27)처럼 ‘평범한’ 소설로 읽을 수 있다. 루스 렌들의 소설을 ‘특별난’ 소설로 읽게 만드는 것은, 반어적이 표현이지만, 그녀가 세계의 추리소설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한다는 에드거 상(미국 추리작가협회)과 골드 대거 상(영국 범죄작가협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출발점은 전형적인 영국 추리소설 스타일의 웩스퍼드 경감 연작물이다. 스무 권에 육박한다는 이 연작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훗날 작가 자신은 이 연작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루스 랜들은 웩스퍼드 연작물을 쓰는 와중에 비정상적인 인간의 심리를 다룬 범죄소설들을 따로 써왔는데, 이 작품들로 대중의 인기와 함께 앞서 말한 상들을 받았다. 『유니스의 비밀』과 『내 눈에는 악마가』가 바로 반사회적 인격장애psychopathy를 다룬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번역자도 말하고 있듯이 “문학 소설 못지않은 상상력과 묘사”가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유니스의 비밀』보다, 재미가 떨어진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범죄가 남성들의 것이기 때문에, 늘 볼 수 있는 남성 주인공의 범죄보다 여성 주인공의 희귀한 범죄가 더 관심을 끄는 까닭에서일까?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유니스의 비밀』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지, 결코 이번 작품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병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아서 존슨은, 유니스 만큼 복잡하고 기괴한 인물이다.
아서의 어머니는 생후 두 달밖에 안 된 그를, 여동생에게 팔았다. 아서는 이후로 한번도 어머니나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빅토리아식의 도덕과 관습이 몸에 밴 이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스무 살 후반 무렵에 이모가 죽고 나서 쉰 넘도록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열네 살 때 사환으로 입사했던 회사에 장기근속 중이다. 고작해야 고루한 독신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이십오 년 전과 이십 년 전에 두 명의 소녀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다. 이십 년 전, 새로 이사 온 전셋집의 지하실에서 여자 마네킹을 발견하고 정기적으로 마네킹의 목을 조르는 의식을 치르지 못했다면, 해소되지 못한 그의 공격본능은 또 다른 여자 희생자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내 눈에는 악마가』는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를 연상시킨다. <사이코>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공격 본능을 죽은 어머니의 명령으로 치환하듯이, 아서 또한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나, 그의 수호천사 역을 자청했던 이모에 대한 애증으로부터 자신의 공격 본능을 길어 올린다. 모성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강조하는 이런 설정은, 자칫 여성에 대한 가부장 사회의 억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우려하는 것처럼, 아서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그런 설정에 송두리째 내맡기지 않았다(뭐하러, 그러겠는가?).
이 작품의 묘미는, 아서의 옆방에 입주한 앤서니가 반사회적 인격장애인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쓰고 있는 논문의 초고를 잠시 훔쳐보자.
(…) 정신병질자는 특징적으로 정서적인 관계 형성을 하지 못한다. 이런 관계를 형성한다면(일시적이고 산발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목적은 자신의 욕망을 직접 만족시키고자 함이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애정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정신병질자는 좌절에 대처할 사회적인 방법을 거의 배우지 못한다. 이를 배운 사람들은(예를 들어 ‘극심한’ 포르노에 몰두하는 것) 잘해야 스스로를 괴기스러운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77쪽)
그의 행동. 아이들과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를 때, 그에게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있기는 있다 해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가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일상적인 일을 완수하지 못했거나 강박적인 행동, 예를 들면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사회의 안녕이라는 문맥 속에서 행해진 행동들이 실패했을 때 가책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111쪽)
(…) 정신병질자의 대다수는 자기 자신의 공격성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피실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의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여성 그리고 권위자와 관련된 그들의 행동 양식에서 비정신병질자보다는 정신병질자에게서 더 큰 장애 요인이 발견되지만 정신병질자가 죄의식을 더 많이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분석 결과에 의하면 정신병질자의 죄의식은 진정한 후회의 감정이기라기보다는 힘들고 불쾌한 상황에 대한 감정이라고 한다. 정신병질자는 이기적인 형태의 행동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여서 만약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행동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후자를 선택할 만큼 교활할 수도 있다. (176~177쪽)
앤서니는 정신병질자(이 책이 번역된 2005년에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이라는 말이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에 관해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자기 옆방의 입주자가 그런 사람인 줄은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