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평가된다. 하므로 가벼운 역사 에세이로 분류될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영림카디널, 2003)를, 그가 쓴 여러 주저 가운데 위치시키는 것은 분명 무리다. 이 책은 심혈을 기울여 역작을 쓸 때 부수적으로 생겨난 글감을 알뜰히 챙긴,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요리보다, 어떨 때는 요리를 하고 난 뒤에 남은 여분의 재료로 만든 찌개가 더 맛있을 수도 있다.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한국어 제목은, 500여 쪽이 넘는 이 책이 마치 ‘재즈는 저항과 반역의 음악이다’라는 기치 아래, 온통 재즈를 말하는 책인 양 오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Uncommon People'로, 역사의 변혁이나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기계파괴자들·제화공·농민·산적·노동 운동가·전위 예술가·학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평범하게 살기를 거부했던 인물들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유물론 역사가이면서 ‘아래로부터의 역사’, ‘민중의 사회사’를 추구했던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였다. 궁금하신 분들은 『원초적 반란』(온누리, 1984)이나, 『밴디트 - 의적의 역사』(민음사, 2004)를 보시라.
본문의 500여 쪽이 넘지만 재즈와 연관된 것은 말미에 붙은 일곱 편의 글로, 도합 99쪽에 지나지 않는다. 일곱 편의 글 가운데 네 편은 각기 시드니 베셰·카운트 베이시·듀크 엘링턴·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쳐졌고, 나머지 세 편은 재즈에 대한 통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통사 격인 세 편의 글은 음악 평론가로서보다, 일급의 역사가가 어떻게 재즈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지를 눈여겨보게 한다.
홉스봄은 재즈가 소수의 가난한 흑인들과 술에 절은 백인들이 즐긴 별 볼일 없는 음악이었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재즈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1920년대, 캔자스시티에서 빅 밴드(핫 재즈, 스윙 재즈)가 꼴을 갖출 무렵, 심하게 말해서 재즈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춤을 추기 좋은 음악이었다. “서민계급 출신의 밤의 생활자들이 만들어낸 재즈는 소박한 꿈을 갖고 살아가던 직업 연예인들의 음악”으로, 당시의 재즈는 유사 ‘실내악’은 물론이고 ‘예술’은 더더욱 아니었다. 또 미국 출신 대중음악 비평가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지만, 미국에서 탄생한 재즈와 블루스가 “최초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곳”도 미국 밖이었다.
미국 백인 사회가 천대한 재즈와 블루스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영국이었고, 유럽이 그 뒤를 따랐다. 여기서 지은이는 “영국 재즈 청중의 대중적·민중적 성향은 유럽 대륙의 재즈 청중이 안정된 중산층이나 대학에 진학할 정도의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확실히 다른 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과 함께 유럽에서는 블루스가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도 기억해 놓자. 그러면 영국과 유럽에서 나란히 재즈가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국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재즈는 그저 이국적이고 원시적이며, 비부르주아적인 음악이어서만이 아니라 현대적인 음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이며, 실제로 재즈 밴드들은 바로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나라에서 배출되었다. 1차 대전 직후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유럽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재즈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항상 현대성을 꼽았다.” 재즈는 1차 대전에서 유럽을 구원한 나라의 음악이었다.
유럽은 두 번에 걸쳐 재즈에 큰 공헌을 했다. 최초의 공헌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재즈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재즈를 극진히 환대한 것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환대와는 다른 융합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영국에서는 재즈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재즈나 블루스와 다른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 때문에 홉스봄은 “재즈 애호가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영국 록이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로큰롤의 모태는 재즈보다 블루스이지만, “흑인 블루스가 남부 및 몇몇 주와 북부 흑인 게토를 벗어나 일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재즈 연주자와 재즈 팬들 덕분”이었고, 영국이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처럼 두터운 영국의 재즈 팬은, 훗날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의 저력이 되었다.
지은이는 “1950년대 미국 대중음악에서는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살해한 것이다”고 말하면서, 유럽이 재즈에 공헌한 두 번째 사례를 든다. “유럽의 재즈 청중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에서 록의 물결이 재즈를 거의 내몰았을 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연주자들 중 일부는 아예 유럽에 정착하면서 유럽에서 열리는 콘서트와 페스티벌 순회공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에는 다양한 이국 취향이 나타났다. 달리 말하면, 재즈는 이전보다 덜 미국적인 것이 되었고 훨씬 국제화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재즈에 있어서 미국의 재즈 대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이유로는 1962년 이후로 프리 재즈가 재즈의 가장 중요한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된 사실 때문인데, 이 프리 재즈의 역사는 유럽에서 일궈낸 중요한 발전과 유럽 연주자들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그러나 홉스봄은 꺼져가는 ‘재즈의 불씨’를 간직해 준 것에 대해서는 유럽에 감사해 하지만, 재즈를 예술로 격상시킨 끝에 대중과 완전히 격리시킨 프리 재즈를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필자는 열여섯 살 때, 런던 교외의 한 무도장에서 소위 ‘모닝 댄스’를 위해 연주하던 엘링턴 밴드의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완전히 마음이 빼앗겼다”는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주로 재즈 서적에 관한 서평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지은이 자신의 재즈 체험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민음사, 2007)에 더 자세하다. 그는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자서전과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는 “재즈의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부각하면서, 재즈 초창기에 재즈를 응원하고 퍼뜨린 것은 정치적 좌파였음을 거듭 강조한다. 유물사관에 충실한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재즈 수용사를 비교하면서, 영국에는 도시 노동계층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즈가 노동계급의 댄스음악이 되었던 데 비해,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인층의 예술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좌파와 재즈는 한 통속이었으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빼앗아간 록이 혁명마저 탈취해가고, 비밥과 함께 재즈가 대중적 활기를 잃게 되면서 좌파들은 재즈와 소원해지고 포크송에 열중하게 되었다는 진단도 흥미롭다. 같은 좌파이지만 재즈를 적대시했던 아도르노를 향해 홉스봄은 “재즈에 대한 가장 지루한 글”을 쓴 사람이라는 일침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