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류상태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삼인, 2005), 『당신들의 예수』(삼인, 2007)를 읽다. - 2004년 10월 26일, 대광고등학교 교목이었던 류상태는 15년 동안 재직했던 대광고등학교 종교 교사를 그만두는 것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목사 자격도 반납했다. 교목 말고는 아무런 일도 해보지 않은 마흔여덟 살 난 가장으로 하여금 학교를 자진 사직하고, 길거리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이 되게 한 이유는 대체 뭘까?
개신 기독교계 학교인 대광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인 종교교육(예배)을 강요했다. 이 책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관한 교육부의 방침은, 종교과목을 복수 개설하고, 예배도 원하는 학생만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정일치 국가가 아닌데다가 다종교 사회이고, 더욱이 현재의 고등학교 입학 방식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배정을 받는 방식이므로 교육부의 방침은 일반인의 상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많은 개신교계 학교 재단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는 성서의 구절을 근거로, 예배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교육의 근간으로 본다. 기독교계 학교의 운영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지, 언젠가 예수 믿고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감사할 거야. 국어, 영어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 갈 인생이니까 아이들이 아무리 싫어하고 거부해도 강제로라도 예배에 참석시키고 종교교육을 열심히 시켜서 한 명이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굉장히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개신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런 강제적인 종교교육을 버젓이 일삼아왔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게 ‘강의석 사건’이다.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교내 방송을 통해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특정 종교 예식으로서의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학교 홈페이지에는 “저는 기독교를 믿지 않습니다”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학교는 선도위원회를 열어 강의석에게 ‘전학 권유’ 결정을 내리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1주일 후 제적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이에 대해 강의석은 “종교 자유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며,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두고 혼자 전학을 간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부모와 선생의 권유를 물리치고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자 학교는 사건 발생 22일 만에 강의석을 제적시켰고, 강의석은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이때 지은이는 강의석을 제적 처리한 것은 “헌법의 정신을 위배”한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사람을 만든다는 “대광의 설립이념과 목적”과도 어긋날뿐더러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존엄한 사랑과 우주적 구원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기준으로 신자 개개인의 신앙을 구분 지을 때,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로 나눈다. 원래 근본주의 신앙에서 출발했던 지은이는, 목사 안수를 받을 1985년 무렵에 중간 단계인 포용주의 입장에 다다랐고, 강의석 사건이 벌어지기 7~8년 전에는 이미 다원주의 신학에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입장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교에서 약간이라도 그런 눈치를 보이면, 학교의 최고 책임자에게 불려 가 경고를 받았다. 지은이는 이런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강의석 문제에 개입해서 학교에 부담을 주었다는 이유보다 더 큰 ‘신학적 관점’에서의 잘못으로 교목 실장과 교목 직위를 해제당했다.
지은이는 강의석 사건이 벌어지기 2년 전인 2002년부터 ‘불거토피아’라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해 왔다. “‘불’로소득을 ‘거’부하여 아름다운 세상(유토피아)을 만들어 보자, 아닌 것(불)을 거부(거)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자”(『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라는 뜻에서 만든 이 카페는, 불로소득 거부, 자연보존, 평화통일문제, 종교 간의 상생, 지구촌 평화와 같은 문제를 환기하고 실천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러데 강의석 사건 이후 ‘기독교 의식개혁’이라는 또 다른 축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기독교 의식개혁이 이 카페의 중심이 되었다: “기독교가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각성에 의해서 기독교가 서서히, 서서히 변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 내적인 각성이 뭐냐 하면 (…)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 우리 기독교 신앙만이 전부라고 느꼈고, 타 종교는 다 사탄이라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이지만, 타 종교도 훌륭할 수 있네’ 하는 식으로 우선 존경심을 갖는 단계로 가고, 타 종교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도 인정하고, 이렇게 단계적으로 독선과 배타성을 인정해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독선을 완전히 내려놓은 내부적인 의식개혁운동을 통해서 변해야 된다는 거죠.”(『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1970~80년대에 교세가 수직 상승하던 한국 교회는 1990년대 들어 하락세로 돌아섰고, 빠른 속도로 교인 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보수주의 개신교 진영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정치에 몰빵’하는 외형적인 확대와 ‘도덕성 회복 운동’이라는 내부적 개선을 들고 나왔다. 류상태가 쓴 두 권의 책은, 외형적 방법이 갖는 문제점보다 내부적 방법의 한계와 허구에 대해 번번이 강조하고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도덕성 문제는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다. 대형 교회 목회자의 재정적 비리나 도덕적 탈선이 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도덕적 긴장에서 해체되도록 만든 보다 깊은 원인을 찾아보면 역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한국 개신 교단의 도덕적 타락은 대형 교회나 목사 개인의 도덕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불신지옥, 예수천당’이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있다. 쓰나미 발언으로 유명한 금란교회의 김홍도나 ‘빤스 목사’로 알려진 전광훈 같은 사람들이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 되지 않는 설교를 하면서 신도들에게 ‘무조건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독선적인 교리, 그 절대화 된 교리에 의해서 가능”(『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한 것이다. 즉 ‘하느님이 절대적이니까 이 말을 전하는 목사의 말도 절대적이다’는 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독재자와 윤리성을 갖춘 독재자, 어느 쪽이 더 문제가 될까? 윤리적이지 못한 독재자는 오래가기 어렵다. 그러나 윤리성을 갖춘 독재자라면, 그 독재자는 훨씬 더 오래가면서 두고두고 사람을 잡을 수 있다. ‘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한국 주류 개신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그대로 둔 채 한국 교회가 윤리성을 갖출 경우, 사람들은 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방해를 받을 수 있다. 학교에서 종교 자유를 주장한 강의석 군을 내친 대광고등학교는 비교적 투명하고 모범적인 학교였다. 그들이 사회의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자체가 개혁의 대상임을 깨닫고 문제 해결에 나선 단체도 있기는 하다. 김동호 목사나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제도와 윤리 개혁운동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개혁은 껍데기 개혁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윤리나 제도 이전에 교리 자체가 갖고 있는 폭력성과 정복성에 있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현상을 치료할 수 있는가. (…) 기독교가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제도를 개혁하고 윤리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 교리가 갖는 공격성과 문화적 강요는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진정 기독교의 개혁을 원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갖는 폭력성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당신들의 예수』)
목사 개인이나 대형 교회의 비리를 자정하겠다는 도덕성 회복 운동만으로는, 단군상 목 자르기, 사찰 ‘땅밟기’와 방화, 개신교 학교에서의 예배 강요, 공격적 해외 선교를 없앨 수 없다. 한국 개신 기독교의 부도덕성은 ‘불신지옥, 예수천당’이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칫 ‘종교 전쟁’마저 부를 수 있는 한국 개신교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존재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①교회·예식·교리·경전 중심의 제도적 종교 시스템을 소집단·세미나로 바꾸고, ②성서를 읽을 때 ‘성서 축자영감설’에 근거하지 않고 역사적 맥락에서 읽으며, ③무엇보다, 모든 종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나 홀로’ 존재하는 종교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종교를 통해서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신도들이 많을 때, 목사와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빌려 분탕질 칠 ‘빽’을 잃게 된다.
강의석 사건으로 목사직마저 반납한 지은이는, 기득권자인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개혁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면서, 진정한 개혁은 그 공동체의 사람들, 즉 교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평신도들이 나서야 한다고 권한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위임을 받은 담임목사가 사회 범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도 여전히 위세를 행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하고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위세를 부릴 뿐 아니라 ‘주의 종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통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성서적으로 보더라도 목회자는 사도들을 본받아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6장 1~6절 참조). 교회 행정과 재정은 평신도들이 맡아야 하며, 목회자들이 간섭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당신들의 예수』)
대광고등학교 교목 시절, 3일 밤을 통성기도와 통곡으로 일관했던 어느 개신교 영성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지은이는 “내가 기독교인이며 목사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기독교는 태생부터 잘못되었다”(『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는 생각으로 그를 인도했다. 예수의 삶이 ‘종교’로 둔갑한 게 기독교이니, 기독교는 태생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예수의 삶’이 종교적인 도그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바로 초대교회였는데도, 한국의 교회 개혁 운동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개그콘서트’나 같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사와 종교 교사직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아직 기독교를 포기하기에는 일렀고, 가장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의석 사건으로 목사와 종교 교사직을 내려놓게 되었지만, 교회 개혁운동을 하면서 번민과 갈등은 더 깊어졌다. 갈 곳 없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생활비를 벌게 해준 개혁교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아름다운 교회였으나,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오히려 독선과 배타에 사로잡힌 주류교회에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주류 개신교회들이 살아가는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갈등과,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의 정당성이 도전받는 상태에서 개혁은 없다. 기독교 개혁운동 단체는 자신이 가해자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고민 속에서, 지은이는 자신이 사역하고 있던 개혁교회마저 떠났다. 2007년 봄, 지은이는 “그토록 소망했던 기독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당신들의 예수』)
사족이다. 강의석은 46일간의 단식 끝에, 학교 측으로부터 예배 선택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불상사를 피하고자 강의석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던 학교는, 그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저 사건이 한참일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대광고등학교는 이름난 문인들을 많이 낸 학교인데, 왜 모두들 쥐죽은 듯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