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피터 셰퍼는 우리나라에 상당히 알려진 극작가이다. 그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많지만, 특히 『에쿠우스』(범우사, 1991, 1997재판)는 남자 배우가 스타가 되는 등용문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1대 에쿠우스, 2대 에쿠우스……’하는 남자 배우들의 계보가 있을 정도다(정확하게는 ‘1대 알런, 2대 알런……’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필적하는 여자 배우들의 계보를 굳이 찾자면 존 필미어의 『신의 아그네스』(예니, 1987)에서 탄생한 ‘1대 아그네스, 2대 아그네스……’ 정도일까?
밀로스 포만 감독의 <아마데우스>의 원작이 셰퍼의 것이듯이, 그는 숱한 화제작과 흥행작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셰퍼에 대한 평가도 극에서 극을 치닫는다. 이를테면 그에 대한 평가는, 한 사람의 기술 속에서도 크게 엇갈리곤 한다: ⅰ) “피터 쉐퍼는 탁월한 극장적 상상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만한 사상가는 되지 못한다. 쉐퍼는 끊임없이 신과 믿음에 대한 관심을 그의 희곡들에서 표명했으나 현재까지 극작가로서의 능력은 주로 휘황한 무대적 언어의 창출에서 찾아진다.” ⅱ) “극작가로서 누구보다 대중적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단순한 상업극작가로 주저앉지 않고 진지한 작가군에 포함되는 사람이 곧 피터 쉐퍼이다.” (정진수, 『영미 희곡의 세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한 사람이 쓴 글인데도 ⅰ)에서는 극장적 상상력은 뛰어나지만 사상은 빈곤한 작가로, ⅱ)에서는 대중 작가인데도 진지한 작가군에 속한다고 달리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역설이지만, 셰퍼가 악평을 받은 원인은 ‘잘 만들어진 극well-made play’에 있다. 정해진 주제(목표)가 뚜렷하고, 주제 성취를 향해 ‘발단→전개→갈등→절정→해결'이 빈틈없이 진행되는 플롯에 ‘잘 만들어진 극’이라는 평가가 따르는데, 그 말에는 칭찬보다 조롱기가 더 섞여 있다. 거기엔 ‘대박’ 난 작품을 어떻게 해서라도 흠잡고 싶은 평자들의 질투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 ‘잘 만들어진 극’의 대부분이, 선과 악의 극한 대결, 강한 욕망에 맞서는 강력한 방해자(장애물), 분명한 원인과 동기, 의혹과 음모가 밝혀지는 과정이 이끌어내는 단계적인 흥분(점층되는 긴장), 일점 의혹 없는 해결을 공식으로 삼는다. ‘잘 만들어진 극’의 비판자들은 그런 작품을 ‘모범적’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상업적’이고 ‘대중의 요구에 부응’ 작품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셰퍼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앞의 책에 인용된 어느 글에서 “나의 희망은 항상 무대 위에 일종의 ‘총체연극’을 실현하는 것이다. 언어만이 아니라 의식儀式과 마임과 가면과 주술呪術이 있는 (…) 그런 연극은 극작가의 연극이자 동시에 연출가의 연극이요, 무언극 예술가의 연극이요, 음악가의 연극이요, 또 당연히 배우의 연극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위의 말을 염두에 두고 『에쿠우스』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1974년과 1975년, 런던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 셰퍼의 이름을 널리 알린 『에쿠우스』는 이 분야에 하나의 공식을 세운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 분야의 공식이란, 먼저 초엽기적인 사건이 있고, 거기에 탐정이 아닌 정신분석의가 투입되는 것이다. 『에쿠우스』는 대중성(초엽기)과 현대의 지성(정신분석)을 섞어 상업적 성공을 이룬 전형을 제시한 작품으로, 훗날 필미어가 『신의 아그네스』에서 똑같은 공식을 되풀이했다.
『에쿠우스』의 알런이 말굽파개로 여섯 마리의 말의 눈을 찌르고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에게 인도되는 것이나, 『신의 아그네스』에서 사생아를 낳은 뒤 태아를 죽여 쓰레기통에 방치한 아그네스 수녀가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에게 인도되는 것은 같은 공식을 띈다. 또 법의 대리인 혹은 합리주의의 화신인 두 명의 의사가, 정신병자를 돌보면서 자신의 역할에 혼란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 정체성과 인생관을 되돌아본다는 것도 그렇다.
두 작품의 흥행 요소를 좀 더 간추려 보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①엽기적 사건에 ②섹스와 ③독신瀆神을 함께 버무리는 것이다. 『에쿠우스』에 나타나는 예수나 성상聖像은 가학적인 사디스트의 모습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그의 도래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한 소년에게 에로티시즘의 빛을 던지고자 하강한 것처럼 느껴진다. 『신의 아그네스』 역시 마리아의 처녀수태를 아그네스라는 평범한 수녀가 되풀이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와 예수 탄생의 기적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줄거리 요약과 분석은 생략하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만 간단하게 말해 보겠다. 먼저 『에쿠우스』의 중요한 주인공인 다이사트는 확고한 신의 대리자, 다시 말해 진리의 담지자로 등장하지만, 극의 경과와 함께 그의 회의는 짙어지고 그의 권위와 같은 ‘황금빛 가면’(34쪽)은 떨어지고 만다. 이렇듯 사건을 조사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 혼돈에 빠지고 마는 것은, 굉장한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전 문학 속에서 화자는 확실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화자는 이야기의 진위나 진실을 보증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대인이 처한 혼란과 회의를 나타내는 인물이 되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에쿠우스』의 사건은 일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바로 ‘눈’이다. 즉, 알런이 말굽파개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여섯 마리의 말을 죽였다면, 수수께끼가 이처럼 복잡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신화와 상징 의례 속에서 눈은 ‘지혜’나 ‘태양’과 동일하며, ‘신’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신이란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비추는 존재’였다. 또 눈은 ‘성기’와 연관된다. “오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제거한 것이 근친상간에 대한 벌로 자신의 성기를 거세한 것을 상징한다”(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71~72쪽)는 프로이트의 유명한 해석도, 알고 보면 많은 고대 자료가 ‘눈과 성기’의 상동성을 밝혀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대인들은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신의 양면성이 성기의 실제성과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
알런은 말의 ‘눈’을 파냈지만, 그보다 먼저 거세된 아이다. 거세를 성기에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알런에게 행해진 굉장히 다양한 거세의 양태를 볼 수 있다. 우선은 열일곱 살이나 되는 나이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쓸 줄”(50쪽) 모른다는 것. 그걸 ‘사회적 거세’라고 하면 어떨까?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는 것 역시, 시각적 쾌락의 거세라는 점에서 성적 쾌락의 거세와 동일하다. 아버지와 완고한 반자본주의 투쟁 방식과 어머니의 종교적 강제 또한 알런을 긴장시키는 심리적 거세에 해당한다. 알런의 어머니는 사건 후에 다이사트를 찾아와 악마라고 말한다(135~136쪽). 이런 것을 보면, 알런의 어머니 도라는 아들에게 균형 잡힌 종교교육을 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도라의 광신과 남편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하는 42쪽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식이 부모의 성교를 처음 목격하는 것을 ‘원초경’이라고 한다. 원초경을 목격한 자식에게 부모가 그들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해 주느냐에 따라, 또는 원초경을 목격한 아이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성을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진다고 한다. 딱히 원초경이라곤 할 수 없지만, 『에쿠우스』에서 아버지 프랑크가 도색영화관에서 자식을 맞닥뜨렸을 때가, 알런의 원초경에 가깝다. 알런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킨 자신의 치부를 변명하지 않고 좀 더 당당히 아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설명했더라면 어땠을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초경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식이 부모의 성교를 처음 목격’하는 행위이지만, 자식 편에서 우연히 부모의 성생활을 목격해버린 원초경이 아니라, 부모 편에서 우연히 자식의 성행위(혹은 성에 눈뜨는 징후)를 눈치채버린 원초경을 상정해 보면 또 어떨까? 예를 들어 사춘기 아이가 자신의 수음 장면을 부모나 어른들에게 처음 들키는 것은 역시 원초경이 아닐까? 그것에 대한 주위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수음을 들켜버린 아이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고 판단되는 장면이 『에쿠우스』에는 있다(81~84쪽). 알런의 아버지는 자신이 우연히 목격한 것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이런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태도가 알런에겐 심리적 강박이 되었을 것이다.
알런이 말에게 쉽게 빠지게 되는 이유는, 6세 때 처음 본 말과 기수의 당당함에 매혹되었기 때문이지만, 부모와 좋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런은 자신을 “고아”(79쪽)로 여기는 것이며 퇴원을 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151쪽). 알런은 “새 아빠를 원”(145쪽)했던 것이다(그런데 이 ‘새 아빠’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최소한 알런은 두 부모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느꼈고, 진정한 가족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12세 때 처음 조우한 말은, 가정을 탈출할 수 있는 성적 몽상을 제공했다. 사방이 막혀버린 위선적이고 폐쇄적인 가정 속에서, 말과 성적 흥분과 종교가 합체해 버린 것이다.(76쪽)
기독교의 신은 아주 자주 ‘본다’는 동사와 연관되는데, 이 작품에는 “신이 보고 계시다”(80쪽), “내가 너를 보고 있다”(112쪽)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신은 언제 어디에나 편재하면서, 우리를 감시한다. 이것은 중세의 기독교사회가 무너진 다음에도 여전히 서구 사회를 작동하는 원리다. 이와 연관하여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문예출판사, 1988)에 나오는 일절을 읽어 보자: “종교 개혁은 인간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래의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대체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종래의 형식에 의한 종교의 지배는 매우 느슨하여 실제 생활에서 별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경우 거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이 새로운 형식은 가정생활 일체와 공적인 생활 전반에 걸쳐 어디까지나 엄격하고도 진지한 규율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39쪽)
인용한 대목에서 베버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캘빈주의라는 지배 형식이 개인에 대한 교회의 통제 형식 가운데 가장 참아 내기 힘든 것”(40쪽)이라고 쓴다. 베버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은, 형식(가톨릭의 복잡한 성례를 떠올려 보라) 또는 대리자(교황과 신부들)를 통한 신과의 만남이 아니라, 나의 내면성 속에서 신과 내가 1대 1로 대면하는 형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종교 개혁은 탈주술화를 완수하는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 신을 아로새겨 놓는 역설적인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좀 더 요약하자면, 종교개혁이 신도들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와 반대로 베버는, 종교개혁이 더 촘촘한 종교적 규율을 낳았다는 것이다. 아래는 『에쿠우스』의 한 대목이다.
다이사트 (…) 그대의 신 여호와는 질투심이 강한 신이니라. 그리고 너를 보고 있다.
신은 너를 영원토록 보고 계시다. 알런. 신이 보고 계시다! 너를 보고 계시다.
알런 (공포에 사로잡혀) 눈! 새하얀 눈이 바짝 뜨고! 불길 같은 눈초리가- 온다! 온다!
신이 보고 계시다.
(…)
(부드럽게) 에쿠우스… 고귀한 에쿠우스… 성실하고 참된… 신의 종… 그대-
신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알런. 너제트의 두 눈알을 찌른다).
(…)
알런 나를 찾아내 봐! …찾아내! …찾아내 보라구! 나를 죽여라!… 죽여 줘! …
(185~187쪽)
알런과 그의 어머니가 바라보는 눈은 바로 그런 내면화된 청교도적인 눈이고(알런의 아버지에겐 ‘노동자의 규율’이겠고),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이 사건의 밑에 종교가 도사리고 있습니다”(84쪽)라고 한 말도 옳다. 기독교의 죄의식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탐욕이나 분노 보다는 성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니, 『에쿠우스』 해석에는 더욱 그럴듯하다. 그러므로 알런과 알런의 초자아를 중계할 부모의 역할이 부재했다는 것, 또 알런 스스로 초자아와 잘 지내지 못했던 것도 맞지만(120, 123쪽), 알런의 광기는 신의 독재적인 눈, 시각적 폭력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도록 한다.
사족이다. 서구의 눈(시선)은 모두 폭력을 내포한다. 그래서 시선은 ‘지옥’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런 눈은 또 어떤가? 존 스튜어트 밀은 어려서부터 고전을 읽으면서, 온갖 주제별로 책을 편집하는 게 취미였다: “아버지는 이 유익한 취미를 내가 즐기는 것을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쓴 것을 보자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이것은 참 잘하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쓰면서도 누구를 꺼릴 것도 없었고, 또 누가 날카로운 비판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식은땀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서광사, 1983, 21쪽) 여기서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 아니다. 밀의 아버지가 밀에게 보낸 시선은 폭력이 아니라 자긍심과 안정성을 불어넣어주는 시선이고, 미래에 학자가 될 아들에게 일찌감치 정체성을 부여해준 그런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