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1949년에 초연된 『세일즈맨의 죽음』은 ‘현대에 비극이 가능한가?’라는 되풀이된 질문에 극작가 아서 밀러가 나름 대답을 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그는 왕성한 극작을 하면서, 자신은 물론이고 (미국) 연극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를 썼는데, 「비극과 인간」(1949)과 「사회극이란 무엇인가」(1955)는 그의 작품이나 연극관을 검토할 때 늘 거론되고는 한다(두 글의 출전은 아서 밀러의 연극 에세이집 『연극론 12장』, 문학사상사, 1978).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 가운데는 영웅이 부족”하거나, 현대인들이 회의론에 빠져 있기 때문에 비극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밀러가 보기에 이런 생각은 “비극적인 것은 고대에나 있는 것으로서 왕이거나 왕에 비할 만한 사람처럼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만 어울린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선입견 때문이다. “평민도 왕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의미에서의 비극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재미난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꼽는다. 원래 그것은 왕족과 왕실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나 정신분석학은 누구에게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적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고대 비극에 나오는 왕족(영웅)이나 현대의 소시민이나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지키고자 분투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고 할 수 있으며, 누구나 “어느 지위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잠재된 공포”는 똑같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성·존엄성·지위·자유를 지키고자 분투하는 사람은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기의 정당한 가치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터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던져 넣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는 비극적 능력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극론은 무대의 주인공과 관객 사이의 거리가 주는 효과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소박한 비극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성급한 이야기이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리들의 아버지나 가족 혹은 우리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과 관객의 거리가 부재한 이런 설정에서는 ‘연민이나 공포’가 생겨날 리 없다. 연민이란 비극의 주인공을 가엾어하는 감정이고, 공포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시차(時差)가 불러오는 것인데, 그것이 이미 나의 일상이 된 상태에서는 비극적인 고양감이나 숭고미가 솟아날 리 없다.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영웅의 파멸을 보면서, 영웅보다 더 큰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새삼 되새기게 되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 조건이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밀러의 비극론은 이처럼 소박하지만, 그의 작품과 연극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술한 비극론만으로는 모자란다. 그의 연극관을 온전히 살피기 위해서는 앞선 비극론에 「사회극이란 무엇인가」를 더해 보아야 한다. 그의 선배인 테네시 윌리엄스가 심리주의극(체홉)에 기울었던 반면 그는 사회주의극(입센)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되기도 하는 만큼, 밀러는 미국의 여느 극작가보다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작가이다. 거론한 「사회극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희랍인들에게는 특히 공연을 위해 만들어지는 연극이란 ‘사회극’이어야 했던 것이다”면서, “고대 희랍극에서 종교성은 세속적인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즉 희랍극에서 보이는 종교성은 민중적 염원을 표시하는 집단적(사회적) 행위의 표현이었지, 결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나만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충동”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러는 “순수한 사회극이 존재하든가, 이것을 전부 포기한다면 그 정반대인 반사회극 그리고 궁극적으로 반연극적 극만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생각으로는 사회극이 주류이고 반사회극은 측로이다”라는 말로 사회극을 편든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반사회극’이나 ‘반연극적 극’은 유럽의 반연극(부조리극)이나 개인적 문제를 천착하는 심리주의극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는 아무리 통찰력이 있고 정확한 관찰력이 있어도 “개인의 심리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1930년대엔 미국에도 계급주의에 입각한 좌파 사회극이 있었으나, 그는 “30년대의 사회극”을 “특수한 호소이며 전체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편협한 극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30년대의 사회극은 일방적인 선전극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옹호하는 사회극은 어떤 것일까? 그가 이상으로 삼은 사회극은 엉뚱하지만, 희랍 비극이다. 그는 희랍 비극이 “폴리스-전체 시민-가 이른바 ‘위대한 계획’”이나 “옳게 사는 방법”을 제시한다고 믿었다: “비극의 쇠퇴는 사회와의 바람직한 결합을 바라는 인간의 요구를 거절하고 유산케 하는 경향과 비례한다. 우리가 배운 모든 것, 우리가 아는 모든 것, 또는 우리가 알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을 기계 기술의 생산 속에 쓸어 넣어 버렸다.”
밀러는 심리주의 극작가들에게 인간의 본성만 파고드는 것으로는 안 되고, 인간의 본성을 “사회 개념의 어휘로 확대·외형화”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한편, 반대로 좌파 사회극을 쓰는 극작가에겐 “좀 더 깊이가 있는 심리학자가 되어야 하며 최소한 인간의 심리적 생활을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이런 종합적인 이해를 거쳐 나온 작품을 그는 ‘사회극’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제 「비극과 인간」으로 돌아가, 거기서 두 문단을 인용할 텐데, 이 두 문단은 밀러의 비극론과 사회극을 설명해 줌은 물론이고,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대에 비극이 부족한 일부의 원인은 현대문학이 인생을 순전히 정신분석학적으로 보거나 순전히 사회적으로만 보려는 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모든 불행과 치욕이 그의 정신 내부에서 생겨나고 자란 것이라면 영웅적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분명히 불가능해진다.
또한 인생의 구속이 사회에만 전적으로 그 책임이 있다면 비극의 주인공은 반드시 아주 순결하고 결점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인물로서의 그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견해들로서는 결코 비극은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느 것도 생에 대한 균형 잡힌 개념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무엇보다도 먼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이해력을 요구하고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주인공 윌리 로만의 심리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아서 밀러의 이른바 ‘종합적인 인간 이해’의 일단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총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희랍 비극을 좋아했던 그는 2막 끝에 ‘레퀴엠’이란 에필로그를 덧붙여, ‘발단-전개-해결’이라는 최소한의 형식미를 갖춘 3막극으로 만들었다.
연극은 63세의 세일즈맨 윌리가 출장을 갔다가 귀가한 당일 밤에서부터(1막), 그가 자살하는 다음날 밤까지(2막)로 구성된다. 작가는 소위 고전주의극의 3일치 원칙 가운데, ‘24시간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라는 시간상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는 현재 시간 속에, 윌리의 아버지와 형의 이야기(1대), 또 윌리의 두 아들인 비프와 해피의 유년(3대)이 자유롭게 삽입함으로써, 밀러는 윌리가家의 3대를 보여주는 한편, 그 3대 속에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했던 미국의 역사를 온축한다.
36년 동안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윌리는 한때 월급과 수당을 함께 챙기는 일류 세일즈맨이었으나, 현재는 월급 없이 수당만 챙기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급기야는 아무런 실적을 올리지 못해, 친구 찰리에게 주당 50달러씩을 빌려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는 그는 한차례 자살 미수를 행했고(67~68쪽), 실패한 후에도 계속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68~69쪽).
겉으로 보면 윌리는 성마르고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흔한 늙은이(꼰대)로 보이지만, 작가는 1막의 서두에서부터 윌리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운전에 집중할 수 없다는 12~13쪽과 난데없이 차를 닦으라는 28쪽의 말, 47쪽의 “숲이 불타고 있다”는 알 수 없는 말, 그리고 “아버지가 좀 이상해”(22쪽)라는 해피의 관찰과, “아버지를 미쳤다고 하지만”(64쪽)이라는 린다의 완곡한 표현 등등. 이런 정황은 사실주의극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주의적인 기법이 혼재된 이 작품의 혼란한 형식을 이해하게 해 준다. 이 연극은 사실주의극이자, 윌리의 정신분열극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152~154, 163~165쪽이 납득된다(물론 ‘정신분열극’이란 연극 장르는 없다).
한때 잘 나가는 세일즈맨이었다고는 하지만, 윌리는 그저 월급으로 생활비, 주택 구입비 등의 월부, 각종 세금, 아이들의 교육비를 빠듯하게 쪼개 써야 하는 중산층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에필로그인 ‘레퀴엠’에서 보듯이, 윌리는 주택 구입비를 다 갚지 못했으며, 남은 식구는 그가 재차 성공한 자살이 가져다준 보험금으로 가까스로 주택 구입비를 완납했을 정도다.
윌리의 불만족스러운 처지는 ‘자식들의 성공’이라는 대리 충족에 매달리게 한다. 그가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은 두 가지다. 남성적인 ‘기백’과 대중 사회의 성공 비결인 ‘인기’. 기백에 관해서는 윌리가 “내가 아들에게 심어 주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기백이야!”(59~60쪽)라고 직접 말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아들들에게 스포츠를 권장하고 자질구레한 물건 훔치기를 통해 호기를 키워주려는 윌리의 자녀 교육법도 놓쳐서는 안 된다. 또 그는 “인기가 있으면 부족할 게 없다”(37쪽)라는 말로 인기를 중요시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인기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가꾸어야 하는 매력을 뜻하는 것으로, 스포츠와 데이트는 인기를 얻거나 가늠하는 기준이다(인기와 매력은 미국 사회가 미국인들에게 강요하는 ‘감정노동’이며, ‘자기 계발’ 품목 가운데 하나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인가? 기백과 인기를 강조하면서 애초부터 성실과 정직이란 가치는 가르쳐주지 않거나 무시한 결과, 서른네 살의 비프는 좀도둑이 되고, 서른두 살의 해피는 바람둥이가 된다. 하지만 윌리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못난 자식에 대한 기대’는 그 말 자체가 형용 모순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모들이 빠져 있는 질곡이다. 아들만 보면 성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62쪽과 뜬금없는 희망으로 부푼 79쪽은 자식을 대하는 모든 부모들의 정신분열증적 풍경이다.
1985년 TV 드라마로 제작된 <세일즈맨의 죽음> 한 장면
앞서 윌리가 자식들에게 기백과 인기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정직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윌리에게 그런 가치관을 심어준 사람은 아프리카와 알래스카에서 성공한 형 벤이다. 형 벤은 “공정하게 싸우지 마라”(56쪽), “주식 거래소에도 겁 없는 녀석들이 득시글거린다오”(58쪽)라는 식으로 성실과 정직을 비웃는 사람이고, 윌리는 그런 형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1막은 대개의 희곡이 그렇듯이 주인공 낱낱에 대한 소개와 그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갈등의 전조를 제시한다. 1막에 제시된 주요 갈등은 아버지 윌리와 장남 비프의 화해 가능성인바, 그 가능성은 비프가 윌리의 기대에 부응하게 될 것이냐에 달렸다. 2막에서 윌리는 하워드 사장을 만나야 하고, 비프는 올리버를 만나야 하는데, 하워드와 올리버에게서 얻은 나쁜 결과는 부자를 화해가 아닌, 대결과 파멸로 인도한다.
비프가 올리버에게 퇴짜를 맞은 데다, 윌리 역시 하워드에게 퇴출을 당한 때문에 부자의 대결은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싹수가 노란 비프는 차치하고, 윌리 혼자만이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면, 윌리는 계속해서 못난 아들에 대한 성화와 턱없는 기대를 냉온탕처럼 넘나들며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그 자신이 폐품처리 되자, 윌리는 아들에게 “나가 죽어라!”(160쪽)는 말로 의절을 선언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복합적인 인격을 드러내지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 비프다. 아버지를 영웅으로 여겼던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기백과 인기에 몰두한다. 35쪽에 나오는 ‘터치다운’ 일화가 그런데, 그는 수학 시험에 낙제하고 대학교 진학이 좌절된 이래로, 다닌 직장마다 도둑질로 쫓겨났다(160쪽). 그런데 그의 추락 요인이, 우연히 목격해버린 아버지의 부도덕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과장을 특기로 하는 ‘멜로드라마적 비밀’에 불과한 이 대목은 신뢰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까진’ 청소년이라도 아직 침범되지 않은 순수한 내면이 있다. 비프는 바로 그 부분을 가격당한 것이다. 24쪽에서 해피가 “형은 시인이야”라고 말하고, 비프가 “나는 그저 어린애”라고 대꾸하던 것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64, 73, 155쪽에서 비프는 아버지의 부도덕한 죄상을 위협한다. 어떻게 보면 이 대목은 굉장히 야비하게 보인다. 그래서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저 대목들은 소년의 상처가 그만큼 컸다는 뜻도 되고, 나아가 저 대목들은 비프의 진실에 대한 갈구를 보여 주기도 한다. 작중 마지막에 “아버지가 너무 띄워 놓으신 탓”(160쪽)에 내 인생이 망했다는 원망은, 아직 자기 인식이 모자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27, 159, 162쪽에서 보듯이 아버지와 아들 가운데 거듭 진실을 직면하고자 했던 사람은 비프가 유일하다.
이 글에서는 더 기술하지 않았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인간을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에 대한 고발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밀러는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연에 대한 동경을 곳곳에 심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이 의심할 나위 없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윌리의 형 벤과 윌리의 친구인 찰리의 적대적 관계로 암시된다. 아프리카/알래스카에서의 성공을 뽐내는 벤의 존재는, 자연이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라는 점에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와 반대로 밀러는 정직과 성실로 대도시에서 거둔 찰리의 성공으로부터 건전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지젝 같으면, 바로 저 찰리 때문에 자본주의가 독재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사족: 오랫동안 오화섭이 옮긴 『세일즈맨의 죽음』(범우사, 1976)을 보아 왔는데, 작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새 번역본이 나왔다. 새 번역본을 읽고, 오래전에 써 둔 글을 고쳐가며, 쪽수를 민음사 것으로 바꾸었다. 20대부터 지금까지 『세일즈맨의 죽음』을 몇 번이나 읽었지만(수업 교재로, 억지로!), 그때마다 지루했다. 그런데 이번에 읽고서는, 좀 감동했다. 나도 이제 작중의 윌리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