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하카와 레이코의 『도쿄에서 판타지를 읽다』(청어람미디어, 2004)를 읽다. - 현역 판타지 소설가가 판타지 소설에 대해 썼다. 나는 이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며칠 전에 읽은 『일본의 요괴문화』와 『도해 크툴루 신화』가 아니었다면, 이 책에 대한 흥미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모사하는 대상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판타지물은 모사의 대상이 없는 말 그대로 순전한 허구의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은이는 이런 선입견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지은이를 판타지 소설가로 이끌었던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많은 판타지물 지망생들에게 이야기를 만들게 하기보다는, 먼저 그들만의 종족·언어·지도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 이 장르가 일본에서는 ‘이異 세계 판타지’라고 불린다는 것이 판타지물의 가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런 선입견이 판타지물은 ‘아무나,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것’이라는 또 다른 선입견으로 발전하는 데에 있다. 지은이는 이런 선입견에 대해 단호하게 맞선다. 완전히 꾸며낸 세계가 사실적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꾸며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판타지물을 쓰려는 사람은 신화·상징·문화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상 세계의 리얼리티는 우스운 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異 세계 판타지’가 시간과 공간을 가상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만은 마음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문제를 거듭 강조하면서, 거기에 맞는 예화를 풍부히 제시하고 있다. 일본인이 만든 판타지물의 주인공이 외국식 이름과 ‘금발에 푸른 눈’처럼 서양인의 신체를 빌려 오더라도 사고만은 일본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의 자동기술적으로 행해지는 이런 경향은 서양의 판타지물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판타지물에 선과 악의 극한 대립이 팽배하고 집단보다는 개인적(영웅) 해결이 선호되는 까닭이나, 일본의 판타지물이 화해와 윤회 의식을 바탕으로 개인보다는 집단적(팀) 해결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만큼 마음의 이동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상은 어디까지나 이곳이 아닌 장소, 상상 속의 이국적인 공간으로 날아갑니다. 공상은 그렇게 날아갈 수 있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마음은 육체를 통한 체험과 나고 자란 환경, 상상을 위한 지식이라는 현실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물이라고 해서 무작정 가상의 세계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고, 나아가 서양의 판타지는 꽤 의식적으로 자신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해왔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기독교적 색채가 농후한 『나니아 연대기』는 동성애의 후유증을 기독교적 세계관에 위탁해서 극복하고자 했던 C. S. 루이스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고, 마이클 무어콕의 『이터널 챔피언』 연작물을 끌어가는 혼돈과 질서의 대결은 베트남전을 격렬하게 부정했던 미국 젊은이들의 고뇌를 담고 있으면서 주인공의 형상에는 ‘플라워 칠드런Flower children’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또 수잔 쿠퍼의 4부작 『어둠과의 싸움』 역시 웨일즈와 아일랜드 문제를 비롯한 영국의 민족적·종교적·사회적 대립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작가나 독자들이 판타지물은 ‘아무나,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것’ 혹은 ‘판타지물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된 이유로 지은이가 꼽은 것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문화가 “‘공公’보다는 ‘사私’ 쪽에 더 기울어져”있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생각에 일본의 판타지물이 말 그대로 ‘이異 세계 판타지’를 강조하게 된 것은, 근대 일본 문학의 내면에 깊숙이 파고든 ‘사소설’의 영향이 적지 않다. 전쟁과 패전 이후 현재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껴안고 거기에 대해 문학이 솔직하게 말해왔다면 “공상이나 환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서 ‘여자아이들만의 것이 아닌’ 판타지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차라리 데즈카 오사무 같은 만화가가 소설을 썼다면 “일본 문단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다음 해 신문의 4단 만화로부터 시작해서 일본 ‘만화영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되기까지, 그의 작품은 “어떤 작품이든 사회적인 테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의 SF장르에 대한 협소한 이해가 판타지물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기우다. 서양인에게 과학science은 ‘신이 만든 우주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인간이 ‘신’의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사이언스를 ‘과학’이라는 말로 번역하면서 받아들인 개념은 그 폭이 굉장히 협소한 기술technology이었다. 때문에 서양의 SF가 철학이기도 하고 사회학이기도 한 반면, 일본의 SF는 ‘테크놀로지 만능주의’가 되어 버렸다. SF의 이웃사촌인 판타지물 역시 SF와 같은 문화적 변용을 재현하고 있다는 게 지은이의 우려라는 것은 “사회와 세계 자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려는 통찰력 있는 시선을 일본 판타지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거나, 일본의 판타지란 “‘일본’의 사회 통념과 시대, 사상 같은 것들을 거울처럼 모사”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아쉬움 속에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가장 순수한 판타지물로 추앙받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조차 작가가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했거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하는 대영제국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작품이라는 말을 종종 들으며, ‘가운데땅’을 떠나는 엘프족이 대영제국을 최후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뜻에서 “허구에는 반드시 현실의 피드백이 있기 마련”이라거나 “현실 속에서 피드백이 가능하지 않은 허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허구)의 진리는 판타지물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그것을 잘해낸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모두 성공한 판타지물이다.
판타지물에는 작가에게 가장 익숙한 신화와 전설이 끼어든다. 때문에 “판타지를 쓴다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개의 민족 신화에는 보편적인 요소와 함께 창작된 부분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창작 과정에서 극히 위험한 색채가 더해져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단결과 민족의식 앙양이라는 목적을 위해 중세의 전설을 이용한 것이나, 영국 왕실이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아서 왕의 후예라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