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이즈 도시히코의 『전쟁과 문학 - 지금 고바야시 다키지를 읽는다』(제이앤씨, 2007)를 읽다. -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공선』의 작가다. 192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이 근 80여 년 만에 일본에서 화제를 일으킨 때는 2008년이었다.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배의 막일꾼들이 해상 파업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젊은 비일용직 노동자와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워킹푸어’층의 감성을 자극한 결과 그 해에만 50만 권이 팔려나갔다. 『게공선』붐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월 평균 1,000명씩의 신규 입당자를 일본 공산당에 몰아주었다.
우리나라 번역서는 사회과학 시대의 끝물인 1987년 원제 그대로 ‘친구’에서 출간되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던 2008년 새 번역자에 의해 ‘문파랑’에서 다시 출간되었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이즈 도시히코의 『전쟁과 문학』을 발견하고, 거의 자동적으로 ‘2008년, 『게공선』 붐으로 나온 책이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사실과 연관이 없다. 지은이는 오랫동안 다키지를 연구해왔고, 이 책은 2005년 ‘고바야시 다키지 탄생 100년, 사후 70년 기념’으로 기획된 것이다. 『게공선』붐이 일기 전에 나온 책이라서 『게공선』 현상에 대한 일본 비평가의 설명을 들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그 현상으로 작가가 한껏 미화되기 전에 출간되었기에 객관성에서는 더 믿을만한지도 모르겠다.
러일전쟁 전야인 1903년에 태어난 다키지가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죽었던 때는 1933년이다. 그가 스물아홉 해를 살았던 그 시기는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는 그 짧은 생애 동안 꽤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이라고는 『게공선』밖에 읽은 게 없지만, “왜 다키지는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그것은 다키지가 전쟁에 반대하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여 국민에게 호소하는 작가였기 때문이다”라는 지은이의 단언에 과장은 없다. 그 소설에서 다키지는 제국의 군대가 자본가의 호위병이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애국이 동상이몽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혔다.
가난한 농부였던 다키지의 아버지는 농사만으로는 호구가 어려워 가족을 데리고 홋카이도의 광산으로 들어갔다. 다키지는 거기서 가혹한 노동으로 몸을 망치는 사람들과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을 면하지 못하는 당대 농민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았다. 다키지의 많은 작품은 그때 몸소 체험하고 목격했던 밑바닥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하므로 “노동자·농민의 모습은 다키지에게 있어서 결코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다키지는 그들 속에서 자신의 양친을 발견했음은 물론 자매(누나와 누이동생)를 발견했으며 자기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거기에 그들과 같이 살았고 함께 투쟁했고 그 생활과의 투쟁을 계속 그렸던 다키지 문학의 강렬한 리얼리티의 근거가 존재한다”던 지은이의 단언 역시 틀린 데가 없을 것이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백부의 지원으로 진학하게 된 오타루상업학교에서였다. 이 무렵에 쓴 작품들은 “초등학교에서는 아키타에서 건너온 이주자라고 놀림을 받았고 상업학교에서는 가난뱅이 마을 자식이라고 조롱당했으며 백부의 집에서는 더부살이라고 차가운 눈초리로 무시”당했던 작가 자신의 체험이 녹아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훌륭하게 된다”라는 의식이 다키지를 저주받은 운명이나 어두운 인생 따위의 자학적 감수성에 허우적거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훌륭하게 된다’는 그의 향상심은 일차적으로 가난에 빠진 그의 가족들을 구하겠다는 입신출세를 뜻하기도 하지만, 곧 “학대받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연대감”으로 발전될 것이었다.
빈농의 아들이 품게 된 저 ‘훌륭하게 된다’는 의식의 배면에 깔린 인도주의는 훗날 그를 공산주의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인도하게 하지만, 그것과 접하기 전에 그가 먼저 만난 것은 <시라카바白樺>라는 문예지를 주축으로 활동했던 시라카바파白樺派다. 이들은 “윤리와 자아, 예술을 존중하며 보편적 인간성을 추구하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인류애와 이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는데, “이는 물질적이며 인간의 본능과 추함까지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자연주의와는 대조되는 경향이었으므로 당시 문단에 참신함을 불어넣었다”(한국일본학회 일본연구총서 간행위원회 『신 일본 문학의 이해』, 시사일본어사, 2001)고 평가된다. 지은이가 ‘훌륭하게 된다’는 의식 아래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했던 다키지를 가리켜 “시라카바파의 강한 영향하에 정신 형성을 이룬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키지는 시라카바파, 특히 시가 나오야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한 작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하지만 다키지와 시라카바파 사이에 직접적인 교우가 있거나 그들과 문학이론을 공유한 바는 없다. 다만 다키지가 습작기에 나오야에게 매료되어 있었던 것, 다키지가 옥중에 있었던 1930~1931년 사이 나오야의 작품을 다시 읽고 그에게 편지를 쓴 일, 그리고 출옥 후 나오야를 찾아간 사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문단사에 지나지 않는 일화를 침소봉대하여, 마치 다키지가 이전의 작품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과욕이다.
“나는 이 소세키와 다키지를 동일한 문제를 지닌 작가로 동시에 파악하고 싶다. (…) 나는 소세키와 다키지를 그 차이점이 아니라 그 근본에 존재하는 동일성의 관점에서 포착하려고 했다.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에 눈을 돌린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부르주아 문학이라는 형태로 양자를 단절과 대립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상호 관련하고 서로 침투하는 관계로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 문학사를 전체적으로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등등의 언명이 바로 그 과욕의 정체인바, 이런 몰역사성이 헌신하는 곳은, 문학성에 대한 턱없는 탐닉과 신비화다.
다키지가 죽기 2년 전인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 15년 전쟁에 돌입한다. 그전에 일본 정부는 총력전에 방해가 되는 비국민을 가려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된 일본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전향공작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다키지가 고문을 받고 죽었던 해에 공산당 지도자인 사노 마나부·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서를 제출했고, 그 뒤를 따라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전향자가 속출했다. 다키지가 고문을 받고 죽은 배경에는, 그 해에 있었던 일본 정부의 전향 공작이 놓여 있다.
1926년생인 지은이는 전쟁이 끝날 동안은 물론이고, 전후에도 한동안 다키지처럼 천황제와 전쟁에 반대하다가 옥중에서 죽은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나쓰메 소세키는 소위 일본의 ‘국민작가’가 되었다. 이 차이를 서로 다른 산허리에서 ‘하나의 굴’을 판 두 사람으로 관련지을 수 있다? 그 차이를 “문학 근저에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평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로 봉합할 수 있다? 다키지를 비롯한 비전향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평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유주의 문학 비평가들로부터 ‘너희들은 문학이 아니라, 정치를 했던 것’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반면 지은이가 다키지와의 차이성보다 동일성을 찾아내고 싶다던 소세키는 어떠했던가? 그가 내세운 ‘자기본위’가 전쟁 동안에는 서양에 대항하는 일본 정신으로, 전후에는 국가에 대항했던 개인주의 사상으로 윤색되면서, 그는 일본의 국민작가 되었다. 특히 패전 이후 소세키의 존재는 대외적으로 전쟁을 반성해야 하는 일본 정부나,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던 자유주의 문학가들에게 두루 편리했다. 천황제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비판은 식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반적인 회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그는 다키지가 아니라 ‘국체國體’를 내세운 그 시대의 평균적 지식인들과 더 가깝다. “나쓰메가 천황제나 제국주의에 반대했다는 기존의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하며, 여전히 잔존하는 나쓰메 옹호기제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메이지 시대 지식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쓰메 역시 메이지 내셔널리즘의 시류에서 부유하는 체제 내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윤상인, 『문학과 근대와 일본』, 문학과지성사, 2009) 실상이 이런데도 국가주의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다키지를 소세키와 관련지을 수 있다? 이런 무분별한 취향 끝에 정련되는 것은, 문학이라는 이름의 ‘신성 가족’이다.
이 책이 나온 몇 년 후, 일본에서는 『게공선』 붐이 일었다.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대”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미화하고 애국심에 매달려 전쟁에서 해결책을 찾는 경향”이 확대되어 간다. 다키지의 생전과 생후에 일본·한국·중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번성했고 다키지에 대한 소개와 연구도 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과 일본에서 ‘혁명적 문학’은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 뿐 아니라 공산당이 정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에서마저 “혁명적 문학에 대한 관심은 거의 사라진 실정”이다. 이런 시대에 고바야시 다키지를 읽는 것은, 문학과 정치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