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2001년에 개봉된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구자형의 소설 『와이키키 브라더스』(안그라픽스, 2003)는 제목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이런 짐작을 해볼 수 있다. 작가와 감독이 같은 제목과 주제 아래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가 작품 성격을 놓고 결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 제목에 대한 소유권이 공동으로 되어 있었다면, 똑같은 제목의 완전히 다른 영화와 소설이 나오게 된다.
구자형의 소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표지에는 ‘한국 최초의 록 소설’이라는 광고 문구가 붙어 있는데, 과연 이 소설은 비틀스·CCR·비비킹·다이어 스트레이츠·레드 제플린·레너드 스키너드·에릭 클랩튼·제프 벡·지미 헨드릭스·블랙 새버스·애니멀스·딥 퍼플·이글스·올맨 브러더스와 같은 록 뮤지션들로 도배되어 있다. 작가의 말을 들어 보면, 실제로 이 작품은 황종음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최훈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는 작중에서 ‘최 기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최 기타는 소설 속에서 줄곧, 지상에 내려온 음악의 신으로 묘사된다. 두 대목을 보자.
“최 기타가 나타났다. 겉모습은 무뚝뚝하고, 때로는 어수룩한 느낌도 있지만 소탈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다. 최 기타의 매력 중에 하나는 그가 아직 분노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반항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최 기타의 록에는 분노가 살아 있다. 지상의 모든 사랑의 훼방꾼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연인들의 진실한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는 기꺼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최 기타는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무대란 이토록 위대한 곳이다. 최 기타는 잠재의식을 마음껏 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객석을 향해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상태인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아가 우주의 가장 신비로운 기운과 연결되어 그 기운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승이었고, 다시 만나고 싶은 기분 좋은 체험이었다.”
이 소설의 말미에는 「팝과 록은 무엇인가」라는 작가의 보유가 붙어 있다. 여기서 작가는 본문에서 충분히 강조되었던 진짜 음악(록)과 가짜 음악(팝)이라는, 환상의 경계를 다시 구축한다. “록은 따라서 아티스트의 정신이 중요하다. 언제나 기존과 기성을 경계하고 젊음의 순수성을 간직하면서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예술적인 음악을 일궈내려는 정신적 흐름이 바로 록이다. 상업적인 팝과 이 점에서 다르다. 이 소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록의 순수성이다.” “그들의 본래 정처는 비주류, 비제도, 반反상술이다. 그것으로 제도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도 변절되면 (다시 말해 스타가 되면) 제도권에 따라서 호의호식하는 상류층이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작가의 이분법에 충실하게, 지상에 내려온 음악의 신인 최 기타는 당연히 진짜 음악인 록만을 추구하며, 비주류로 떠도는 자신의 운명을 감수한다. 그 가운데 최 기타를 오르페우스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고독이다. 음악에 바쳐진 공물이자 사제로 현현한 최 기타는 별칭 그대로 기타만 사랑할 수 있는 인물이며, 당연히 또 다른 연인(진짜 여자)을 섬길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최 기타가 사랑했던 여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무척 역설적이고 당연한 얘기로, 그녀의 자살이야말로 최 기타의 오르페우스됨을 완성한다. 들어보라! 그의 기타 소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마저 연결해 버리지 않는가?
“최 기타의 기타 연주는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그 스스로가 어느새 씻김굿을 하는 무당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친 듯 무대를 뛰어다녔다. 그 순간 최 기타는 어둠을 가로질러 비행하는 한 마리 갈매기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순간, 최 기타는 수없이 명멸하는 빛 속에서 정숙을 보았다. 정숙은 한 줄기 빛처럼 무대 위로 다가와 최 기타를 가만히 포옹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정숙이 최 기타의 품에 안겨 나지막이 속삭였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인 최 기타를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초상으로부터 가까스로 건져내는 것은, 이 소설 군데군데 삽입된 한국 대중 음악계 풍경이다. 이를테면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마저도 1979년 12월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은 뒤, 다시 7인조 밴드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화려하게 재기했었지만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자신의 음악 <커피한잔>, <님아> 같은 노래를 부르는 대신 비지스의 디스코 사운드를 연주해 달라는 경영자 요청을 거부하자, 끝내 해고당하고 말았던 아픈 경험이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한국의 음악 소비자들은 록 뮤직에 맞춰 춤출 줄 아는 록 댄스 감각이 너무 무딘 탓이었다”와 같은 연예 비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가 그런 연예 현장을 공들여 취재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 속의 최 기타는 18~19세기 때의 전형적인 낭만주의 ‘예술 천재’를 되풀이 보여주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소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작품 바깥의 보유를 다 읽고서도, 작가의 록 예찬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작가나 최 기타가 록 음악을 ‘진짜 음악’으로 여기는 선험적 태도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숭앙하는 록 음악이 “영혼의 양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바, 그것이 역사의 산물이자 음악 산업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도 고려해보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의 록 예찬가들은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정치가들의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록 뮤직이었다”라는 신화를 곧잘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그런 교의는 한국의 록 밴드가 한번도 록을 통해 사회적 운동을 일으키거나 그런 일에 가세한 일이 없었기에 요청된 일종의 문화적 격의格義에 지나지 않는다.
잘못된 추측일 수도 있지만, 만약 구자형과 임순례가 공동 작업을 하다가 결별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구자형의 소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록의 가치를 선험적으로 받아들이고 끝내 그 믿음에 충실했던 반면,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록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대해 쓴 나의 또 다른 글을 보시면 된다. 오래전에 쓴 그 글은, 웹진 나비의 4회째 연재물이다(나는 그 글의 첫머리에서 구자형의 소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놓고서는 “별 할 말이 없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