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요로 다케시의 『바보의 벽』(재인, 2003)을 읽다. - 이 책은 1937년에 태어난 원로 지성인이, 일본의 재생을 위해 쓴 책이다. 지은이는 현재의 일본을 ‘뇌화腦化 사회’라고 규정하면서, 이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외친다.
정보 사회의 다른 명칭이기도 한 뇌화 사회란,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이며, 몸을 잃어버린 사회다. 인간 생활의 3분의 1은 수면, 즉 무의식이 지배한다. 하므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나의 의식에 기초한’, 혹은 ‘이것만이 옳다’라는 주장은 위험하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다른 상식(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는 ‘의식 일변도’를, 지은이는 ‘바보의 벽’이라고 일컫는다.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바보들이 만든 사회가 바로 정보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세계를 좀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온갖 정보를 자신의 뇌에 쓸어 담으면 된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방대한 ‘잡학’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상식’이 되지 못한다. 상식이란 대다수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누가 생각해도 그럴 거다’가 아니라, ‘여기서는 당연한 일이라도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상식을 통하여, 인간들은 ‘공통 이해’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공통 이해를 통해, ‘나는 네가 아니면서 너’라는 이해에 다가간다.
하지만 일본의 교육은, 공통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상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 교육은 다짜고짜하고 ‘개성’, ‘자기’, ‘독창성’을 강조한다. 지은이는 이런 교육을 지탄한다. “‘공통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문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한다면, 이건 참으로 모순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당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의 이해 사항을 넓혀서 문명이 발전해 가는 것인데, 한편으로 ‘개성’을 중시하자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독자의 눈을 잡아끄는 단어는 ‘문명’이다. 『바보의 벽』은 지은이 나름의 문명론을 통해, 일본의 재생은 물론, 9·11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인간이 의식 일변도로 바뀌게 된 것은, 도시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도시 생활 이전에 사람들은 의식보다 몸으로 세상의 논리를 터득했다. 지은이의 이런 주장은 그렇게 낯선 게 아니다. 그 주장보다 재미있는 것은, 농경 시대 사람들의 ‘뇌(의식)보다, 몸(체득)’이라는 주장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현대인들은 늘 자기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 것을 가리켜 ‘성인成人’이 되었다고 간주한다. 이런 덕목은 그야말로 근대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없었고, ‘나는 나’라는 자기 동일성 개념이 없었다. 이를테면 『삼국지』가 널리 알린 고사인 ‘괄목상대(刮目相對: 남자는 사흘을 만나지 않았으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긍정한다. 또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언명 속에는, 성장하고 늙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다, 인간의 몸을 자연의 일부로 기입할 수 있었던 시대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유리되고,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괄목이나 유전이 없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가 보여주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해설은 아주 기막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리 잠자는 수많은 발을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몸을 본다. 만물 유전에 익숙했던 옛날 사람이라면 이런 둔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변신」의 주인공은 ‘나는 그레고리 잠자’라는 자기 동일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몸은 변했는데도, ‘나는 나’라는 의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지은이의 「변신」 해석이 놀라운 것은, 성인의 병증을 유년이나 무의식과의 연결 통로를 통해 해결하려는 정신분석학이야말로,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질 때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은 사고의 개방성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이 도시를 만들면서, 사고의 개방성은 닫힌다. 도시는 효율과 성장을 위해 하나의 이념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을 위해 고안된 가장 오래된 이념 가운데 하나가 일신교일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대목을 약간 다르게 푼다. 전통(농경) 사회는 늘 자신의 먹을거리를 자신이 만들어 왔다. 그런데 도시 생활은 자신의 먹을거리를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런 나약함을 파고든 게 “종교이며, 그것도 일원론의 종교”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부족의 종교이자 다신론인 가톨릭과 달리 유대교·이슬람교·프로테스탄트교는 모두 도시에서 번성한 일원론 종교로, 중국의 도시들만이 일신교를 만들지 않았다.
이 책의 어떤 대목들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하지만 천황제는 “세계를 천황을 정점으로 한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신교와 같다면서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구호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일본이건 한국이건 북한의 난민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만 하더라도, 실행범이 일본인인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에게서는 그런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같은 자기비판은, 지은이를 일본 보수주의와 확연히 갈라서게 만든다.
『바보의 벽』이 강조하는 것은 몸이다. 그 점을 특히 잘 보여주는 대목은, 의식이 비대해지는 것과 반대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는 현대인들이 빠지게 된 것이 옴 진리교 사건이었다는 지은이의 해석이다. 교육을 통해 일본 젊은이들이 내화했던 ‘몸에 대한 경시’가, 동경대학교 졸업자로 하여금 아사하라[옴진리교 교주]의 요가 수행에 반하게 만든 계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지은이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태평양 전쟁의 패전 결과인 무장해제를 꼽고 있기도 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적 근대관을 공박하고 있는 이 책은, 몸을 중시하고, 몸을 존중하는 일이 공동체나 세계 평화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헐벗으면 춥고, 어디엔가 몸을 눕힐 장소가 있어야 하며, 아프면 치료받아야 한다는 것…이런 몸에 대한 감각이 나를 뛰어넘어 타인에게까지 확장된 것이 공동체다. 내가 바늘에 찔리면 아플진대, 나만 아니라 바늘에 찔리면 누구나 아파한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폭력이나 전쟁이 가능할까? 그러나 일원론적 관념의 세계는 그것과 반대다. 애초에 몸에 존중이 없는 의식세계는,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을 지키기거나 강요하기 위해 타인의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일조차 불사한다.